하늘씨앗교회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마 5:9) / 산상수훈 8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마 5:9) / 산상수훈 8

 

오늘은 팔복 중 일곱 번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마 5:9)


생명의 탄생은 신비한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영적인 탄생이 아닌 육체의 탄생이라고 하더라도 생명의 탄생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신비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결합하면 배아로 자랍니다. 임신 8주가 지나면 태아라고 부르고 8주 이전에는 배아라고 합니다. 임신 8주가 되기 전까지는 배아 상태입니다. 참으로 신비한 것은 포유류의 경우 배아 상태에서는 고등동물과 하등동물의 차이를 겉으로는 구분하기 힘듭니다. 사람이나 원숭이나 눈으로 보기에는 같아 보입니다. 심지어는 사람과 쥐도 거의 같다고 합니다. 


영적인 탄생은 더욱 신비합니다. 사람이 처음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면, 처음에는 세상에 속한 사람과 다름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과 세상에 속한 사람은 그 차이가 점점 뚜렷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에게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리스도 밖에 있다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마술적으로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똑같아 보입니다. 차이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이 시간이 지나고 자라가면 그 차이가 점점 더 뚜렷해집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팔복 말씀들은 이른바 배아 상태의 그리스도인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그 특성이 뚜렷해지고 형질이 분명하게 형성된 이후에 관한 말씀입니다. 태아에서 영아로, 영아에서 유아로, 어린이, 청소년, 청년… 이렇게 자라면 자랄 수록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의 특성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생명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결국은 에베소서 말씀처럼 “…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엡 4:13) 


여기에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모든 구절을 읽을 때도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 특히 팔복과 산상수훈의 말씀을 읽고 지레 낙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성장을 포기하고 제 자리에 머물러 서 있어도 안 되겠습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이 종말론적인 말씀임을 기억하고 오히려 힘을 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의 품성과 믿음의 선배들에게 나타났던 성령의 열매들을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특성이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특성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집중해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주님을 닮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을 불러 일으켜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정의할 수가 있습니까?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 개역개정은 “화평하게 하는 자”라고 번역하였고 공동번역개정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평화를 지향하고, 평화를 도모하며, 평화를 위해 애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절대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습니까? 평화를 깨뜨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과 세상에 속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무엇을 지향하는가?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가?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평화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의미


성경에 나오는 주요한 단어의 의미가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 평화의 의미도 마찬가지로 의미가 많이 왜곡된 것 같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아마도 그리스도인의 이미지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만면에 미소를 짓는 유약한 온정주의자를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본래부터, 기질적으로, 갈등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팔복 말씀을 통해 계속 살펴보는바, 하나님 백성의 성품은 타고난 기질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팎에서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갈등을 회피하는 유약한 성품을 가진 사람을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평가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단지 기질적으로 갈등을 못 견뎌 하기에, 평화를 이루는 사람으로 보이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화는 무조건 전쟁과 갈등을 회피하는 그러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화는 의로운 평화이며 거룩한 평화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무조건 하나가 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지향합니다. 대충 겉으로만 얼버무려서 하나가 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화가 아닙니다. “의로움에 바탕을 둔 본질적인 평화, 거룩함에 바탕을 둔 근본적인 평화”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화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지향하는 평화가 의로운 평화였기 때문에 때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를 깨뜨리는 사람으로 종종 오해를 받았습니다.


진리에 기반한 평화


예수님이 평화를 이루실 분이라는 사실은, 일찍이 태어나실 때 하늘의 군대와 천사들에 의해 예견되었습니다. 목자들 앞에 나타난 천군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 2:14/개역개정)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런데 평화의 사도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평화를 이루셨습니까?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힘과 권세로 평화를 이루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피로 하나님과 우리의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모든 힘과 모든 권세를 버리시고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 (골 1:20)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평화가 온 세상의 평화의 시작이요, 근본입니다. 온 세상의 분열과 갈등과 전쟁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짐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써 이를 역전시키시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백성의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힘과 권세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힘과 권세를 버림으로써 그렇게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예수님의 피로 만물과 화해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의 죄의 해결이 먼저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과의 평화가 먼저입니다. 그래야만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고 (그다음에)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일하게 됩니다. 이것이 평화의 본질이며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라는 오늘 말씀의 의미입니다. 


진정한 평화가 의롭고 거룩한 평화라는 점은 역사가 증명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평화는 하나님의 평화와 다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소위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를 깨뜨리는 원흉으로 지목받았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 천성적으로 갈등을 싫어하고 교회의 하나됨을 간절히 바랐던 분들이 종종 교회 분열의 원흉으로 비난받았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끝까지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끝까지 진리를 고수하였고 이는 결국 교회의 큰 분열을 야기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를 생각해 봅시다. 서구 교회 전체가 마틴 로이드 존스를 비난하였습니다. 분열주의자라는 비난을 평생 받았지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평생 이러한 비난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비난을 받았습니까? 진리를 고수하였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버리고는 절대 하나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교회의 순결과 의로움을 훼손하는 교회 평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끝까지 주장하셨습니다. 결국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많은 친구를 잃고 전 세계 복음주의 교회의 왕따가 되었습니다.


현대 교회 안에는 인도주의자가 가득합니다. 한 세기 안에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인도주의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평화를 주장하던 분들은 모두 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의 오류는 교회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어떤 오류입니까?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를 도모하지 않고도 교회 평화, 더 나아가 세계 평화를 도모할 수가 있다는 오류였습니다. 이분들은 인격적으로는 모두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었지만 이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였기에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곧, 이분들은 거룩함이 없는 평화를 추구하였고 결국은 교회 세력의 힘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왕따시켰습니다.


교회 안의 선한 사람들은 가톨릭이든지 오순절주의자든지 신사도든지 극단적인 은사주의자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들이 낳은 열매로 진리는 훼손되고 하나님의 밭은 황폐하게 되고 교회는 예수님이 경계하신 누룩 천지가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교회의 하나됨을 추구하였지만, 그 결과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그나마 소수로 남아 있던 복음주의 교회를 산산조각 내었습니다. 이것이 지난 한 세기 안에 세계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존경받는 지도자였던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마저 이러한 도도한 거짓 평화의 흐름 속에서 눈먼 소경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감히 이분들을 평가할 수가 없고, 금세기에 돌아가신 이분들을 정확하게 평가하려면 좀 더 세월이 흘러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 전체 역사를 볼 때, 이러한 존경할 만한 지도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실지 생각해 보면 참으로 두렵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엄중하게 말씀하셨습니다. “…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눅 18:8)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화는 외형적으로 하나됨을 견지하는 것이 아니며 이것저것 섞어서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평화가 죄 문제에 대한 해결 없이 불가능한 것처럼 사람과 사람, 세력과 세력 사이의 진정한 평화도 정의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곧, 주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의로운 평화입니다. 마음의 깨끗함이 전제된 평화라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충족된 평화라는 것입니다.


유대민족과 게르만 민족의 평화가 독일의 진심 어린 사과 없이 가능하겠습니까? 일본과 대한민국의 평화가 과거의 일제 만행에 대한 사죄 없이 가능하겠습니까? 사죄와 용서 없이 구축된 평화가 오래 가겠습니까? 하나님과의 평화, 세상의 평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정의가 구현되지 않는 평화를 주장하거나 힘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라 불의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런 자들은 평화를 이루는 자들이 아니라 평화를 깨뜨리는 자들이기에 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님은 우선은 순결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는 순결한 평화이며 정의의 열매가 가득한 평화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평화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 (약 3:17–18)


공동체 적용 1


예수님의 말씀을 교회 안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저는 교회가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분열되면 안 된다는 것이 절대 원칙은 아닙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 또한 요한 문헌, 즉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를 보면 진리의 문제라면 반드시 갈라서야만 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가 겪은 분열은 다른 문제가 아니라 진리와 의로움의 문제임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외형적으로는 그들이 스스로 나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이 저들을 쫓아내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남은 자들이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이 점을 확실히 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사람의 문제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문제나, 이익을 위한 다툼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진리의 문제, 의로움의 문제, 선한 양심의 문제였습니다. 제가 최근에는 오광택 형제의 가르침을 명시적으로 반박하지 않는다고 해서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오광택 형제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이미 제가 예수님과 사도의 교훈에서 멀리 떠나 있다고 하나님 앞에서 정죄하였습니다. 수년 전에 제가 목사로서 정신을 차리고, 거짓 평화를 붙들지 않고 깨어서 기도하였다면, … 오광택 형제의 죄가 더 커지기 전에 막을 수도 있었다는 후회와 죄송함이 제게 있습니다. 지금도, 오광택 형제가 뿌려놓은 거짓 복음의 씨앗이 점점 자라나 결국은 교회를 망가뜨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제 안에 있습니다. 모든 가르침이 잘못된 것은 아니나 거짓의 씨앗이 남긴 폐해서 아직 교회 안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한 양심으로 여러분께 권면합니다.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조심하십시오. 앞으로 우리는 이 교회안에 진리만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되지 않으면 결국은 악한자의 의도가 먹힐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면 돌아와야할 지체들이 돌아올 고향이 없어집니다. 저는 최근에 저들의 그룹에서 떨어져나온 한 지체의 회복을 지켜보았습니다. 한 지체의 신앙 회복이 앞으로 돌아올 지체들의 신앙 회복의 전조이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겪은 일들은 우리만 겪은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똑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진리에 관한 한 앞으로 우리는 냉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는 거룩한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 교훈을 가진 자들과는 교제해서는 안 됩니다.


“지나치게 나가서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한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그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다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찾아가서 이 가르침을 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집에 받아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마십시오. 그에게 인사하는 사람은 그가 하는 악한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요이 9–11)


공동체 적용 2


오늘 본문의 예수님 말씀을 다른 차원으로 교회에 다시 적용해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히 12:14)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거룩함이 훼손되는 평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사이의 평화도 거룩함이 있는 평화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주님을 알아야 하고 주님을 두려워해야 하고 주님의 거룩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께서 공동체에 임재하십니다. 가상의 시나리오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두 지체의 관계가 깨졌다고 해 봅시다.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가 있겠지요. 이런 경우 쉽게 중재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사자 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단기간에 극복하기 힘든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에 신속한 해결만이 능사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지혜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교훈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의로운 평화입니다. 우리 지체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쪽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경우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설교를 통해서든지 권면을 통해서든지 하나님이 죄를 깨닫게 해 주셔서 다른 한 쪽에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평화가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집니다. 서로 잘못한 경우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 너무나 당연하게, … 하나님의 은혜로 각자가 자기의 잘못을 인식하고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지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기가 힘듭니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문제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양심으로 자기를 점검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못한다면 평화는 요원합니다.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과의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죄가 죄로서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평화를 시도하기보다는 서로가 거리를 두는 편이 차라리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정도의 성숙함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성숙함입니까? 누군가가 나의 죄를 지적할 때 어린아이처럼 반발하지 않고 깊이 생각할 만한 성숙함입니다. 우리 교회는 좀 특이한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마음에 상처를 받기 쉬운 예민한 영혼들이 많이 모인 교회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하신 주님의 말씀에 유념해서 순종하며 교회 생활에서 지혜롭게 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마귀는 교회의 평화를 깨고자 하므로 이럴 때일수록 더욱더 교회의 평화를 위해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평화를 깨뜨리고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좋아할 존재는 마귀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세상의 평화를 말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 안에서 진정한 평화를 이루지 못하면 세상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평화를 이루지 못했는데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가 어떻게 평화의 복음을 전할 신을 신을 수가 있겠습니까? (엡 6:15) 평화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의 왕


세상에 왜 평화가 없습니까? 왜 인류에게는 평화의 시기보다 전쟁과 분열의 시기가 훨씬 많습니까? 왜 교회의 평화는 그토록 쉽게 깨어져 버립니까? 왜 지체간에 평화보다는 긴장과 갈등이 쉽게 싹이 틉니까? 무엇보다도, … 왜 내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가 신앙의 문제입니다. 평화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세상의 모든 평화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신앙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모든 문제의 원인이 사람의 정욕과 탐심과 이기심과 자기 중심성이라고 말씀합니다. 개인이든, 교회든, 단체든, 국가든 모든 불화와 반목은 바로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이러한 죄로부터 출발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확실히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문제는 신앙의 문제이며, … 마음의 평화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지 못하면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는 없습니다. 경제적인 것이 원인이 아닙니다. 내 가족과 이웃이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나 사회나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더럽고 추악한 이기심으로 가득찬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모든 문제가 사람의 마음속에 있으며 사람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기 전까지는 완전한 문제 해결은 있을 수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지금 상태로 그대로 있는 한 마음의 평화부터 세상의 평화까지,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 애통한 마음으로, 온유한 자로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기에,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면서, 마음의 깨끗함을 유지하며, … 그렇게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하늘씨앗교회 지체 여러분, 우리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와 여러분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의 말씀대로 “평화의 왕”(사 9:6)이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낮추지 않으셨다면 평화의 왕이 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과 우리의 평화를 중재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 (골 1:20)


예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제가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에 관한 사도의 영광스러운 진술을 함께 읽어 봅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엡 2:14–16) 아멘!


주님은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자기의 특권을 버리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저와 여러분과 같은 연약한 육체를 입으셨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당신 자신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빌 2:5)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빌 2:4)


이것이 예수님과 사도의 교훈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평화를 갈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인 평화를 갈망해야 합니다.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를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예수님을 따라 자기를 낮추고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할 일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평화의 왕되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여러분과 저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분명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마귀처럼 평화를 깨뜨리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평화를 이루는 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무엇보다도 평화를 향한 갈망이 우리 안에 가득해 지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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