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를 받는 사람들 (마 5:10) / 산상수훈 9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박해를 받는 사람들 (마 5:10) / 산상수훈 9
오늘 본문은 팔복에 관한 마지막 말씀입니다. 다음 본문은 오늘 본문 말씀의 적용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로써 팔복 말씀을 마무리하고 적용 부분인 다음 구절은 다음번에 설교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 5:10)
먼저 뒷부분,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의 의미부터 먼저 살펴보고, 그다음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큰 복
예수님은 팔복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 5:3)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여덟 번째 복을 말씀하시면서, 똑같이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전체 팔복 말씀이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묶여 있는 형태입니다. (수미쌍관법, inclusio)
예수님이 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까? 왜 처음과 마지막을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구절로 묶으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울 나라는 세상의 나라들과 같지 않다. 내가 세울 나라의 백성들은 이러저러한 특성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특성이 있는 내 백성들은 모두 이런저런 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욱 큰 복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늘나라를 소유하는 복이다. 다른 모든 복들은 하늘나라를 소유하는 복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팔복 말씀 전체의 개요입니다. 예수님은 팔복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성과 하나님 나라 백성이 받는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천국 백성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천국 백성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이 있습니다. 천국 백성은 영원한 만족을 누릴 것입니다. 천국 백성은 하나님의 자비를 입을 것입니다. 천국 백성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은 천국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복을 누림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이러한 복을 믿고 계십니까? 다른 방식으로 질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주시는 복을 누리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복은 일부 특별한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 자녀에게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경험하고, 맛보고, 누려야 합니다. 이 복들을 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중요한지요! 그래서 사도는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에게 …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엡 3:16–21)
저는 에베소 교회 성도를 위한 사도의 기도가 자기 경험을 반영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는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복이 늘 자기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간증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복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앞으로 여러분이 경험하실 하나님의 복들은 여러분이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일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과거의 신앙 경험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현재의 신앙 경험이 앞으로 경험할 신앙 경험과 비슷할 것이라고 예단하지 마십시오.
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합니까? 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 주는 이런저런 육적인 축복에 미련을 두고 여전히 붙잡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축복,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축복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우리 삶의 중심으로 밀려 들어와야만 세상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물러갑니다. 무한히 밝은 빛이 밀려 들어와야만 우리 속의 어둠이 소멸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 무엇이든지 강한 것을 붙잡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알고, 누리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삶이 위대하게 되었던 비결이었습니다.
팔복의 복을 누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는 복의 조건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박해에 대한 오해
박해를 받는 것은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모든 박해를 싸잡아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고 주장하거나,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박해를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보장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에 대해 주도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지혜가 부족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런 행동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기를 원하신다”라고 합니다. 자기만 그런 방향으로 가면 차라리 나은데, 다른 사람들도 그런 방향으로 끌고 갑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예수님을 위한다는 깃발을 높이 쳐들고 어리석은 그리스도인들을 모아서 수년 혹은 수 세기동안 교회의 힘을 낭비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몬타니즘 운동과 중세의 십자군 운동, 몇몇 부흥 운동 등이 그러한 사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지혜가 부족하고 어리석은 것은 불쌍한 것이 아니라 죄라고 말합니다. (시 69:5) 왜 그렇습니까? 지혜가 부족하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게 되고 어리석은 사람이 열심이 있으면 있을수록 하나님의 뜻을 더욱 해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십자군 운동이 현대 이슬람 사회 안에 얼마나 거대한 복음의 장벽을 만들어 놓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에서 발흥한 특정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인터콥이라고 하는 단체인데 한동안 복음 전파가 금지된 지역에서, 노출된 과도한 복음 운동으로 신실한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를 오히려 방해한 사례가 있습니다. 이단들이 하나같이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일에 중심상가에서 정명석의 추종자들이 전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직도 정명석이 의인이기에 박해를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영역에서, 직장과 사회의 영역에서, 가정과 개인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여 불필요한 박해를 받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본문은 “광신적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거나 “지나친 열심으로 인해서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개역개정)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깊이 생각한다면 우리가 우리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쓸데없고 무의미한 박해를 피할 수가 있습니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박해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바로잡는 교훈은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아무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을 행하는 자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서 고난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벧전 4:15) 이 말씀에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한 일을 하는 것을 남의 일을 간섭하는 일과 같은 선상에 놓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남의 일에 끼어들다가 쓸데없이 고난을 당하는 일이 당시에도 많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오지랖이 넓어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려 하기가 쉽습니다. 매우 조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은 대의명분을 위해 박해를 받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정치라는 대의명분으로 박해를 받는 사람이 확실히 늘어났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태평양 전쟁을 지나서 냉전 시대를 거쳐서 우리는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중 특별한 경험을 가진 우리 대한민국 안에서 교회와 정치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정치에 직접 관련되기보다는 거리를 두려고 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우리 개인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거나 특정 정치 체제를 옹호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리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는 것”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많은 오류를 낳습니다. 저는 종교적인 박해를 받는다고 주장하는 많은 경우가 사실은 정치적인 박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정치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이 한국 교회를 친미, 친일, 반공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단순히 혐오와 차별, 혹은 반동성애 집단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오해입니까? 우리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억울한 오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오해가 교회 지도자들의 어리석음과 무지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한국 교회의 어리석음은 반드시 불필요한 박해를 불러올 것이며 이미 그러한 박해는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박해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박해에 대한 오해 중 가장 미묘하고 가장 큰 오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선한 행실로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선한 행실과 희생적인 삶을 살아가기에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절대로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세상 사람을 오해하는 셈입니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세상 사람들도 우리처럼 선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희생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칭찬하고 존경합니다. 세상에서 큰 희생을 감행하고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자기 목숨까지 희생한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영웅으로 칭송하고 높입니다.
조심스럽게 말씀드립니다. 마더 테레사를 전 인류가 존경합니다. 하지만 마더 테레사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의인인가는 의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반론을 제기할지 모르지만 마더 테레사가 박해를 받았는지요? 박해를 받았더라도 그 박해가 의를 위하여 받은 박해인지요? 저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보편적인 인류애를 실천했기 때문에 존경할 만한 분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의인은 반드시 박해를 받는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자들
의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구약의 의인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으로서 경건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전심으로 지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신약의 의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반에서 의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들이며 예수님의 제자들이기에 예수님의 특성을 그대로 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다른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았기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미워합니다. 왜 미워합니까? 예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이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여 있다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으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아냈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그의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또 그들이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의 말도 지킬 것이다.” (요 15:18–20)
이 말씀에 어떤 오해가 있을 수가 있습니까? 이 말씀에는 해석을 달리할 어떤 수식어나 조건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절대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면 반드시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의 제자 디모데는 여러가지 일, 특히 박해로 인해서 낙심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디모데를 격려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딤후 3:12)
사도의 말씀도 예수님의 말씀처럼 절대적인 진술입니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의인은 반드시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자들이 천국을 소유하는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성경 전반이 이 말씀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벨이 왜 가인에게 박해를 받았습니까? 히브리서의 해석에 의하면 아벨은 의로운 자였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히 11:4) 구약 성경에서 박해를 받았던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 다윗, 엘리야, 예레미야, 다니엘, … 이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왜 박해를 받았습니까? 이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특별히 의로웠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분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의 생명까지 드렸습니다. 이분들이 박해를 받은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이분들이 의인이었기에 하나님께 속한 자였기 때문에 세상은 이분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세례 요한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데, 세상이 세례 요한에게 어떤 일을 하였습니까? 세상이 의인 중의 의인이신 예수님께 어떤 일을 하였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핍박하였습니다! 교회 역사를 읽어 보십시오. 순교자들의 역사를 보십시오. 존 후스, 그리고 많은 청교도를 보십시오. 18세기의 위대한 부흥의 시대에 부흥의 주역들이 받았던 박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근세기에 들어와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믿음의 선배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더 핑크와 마틴 로이드 존스와 같은 분들의 깊은 외로움과 받았던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이 누구의 박해를 받았습니까? 세상의 박해가 아니라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선한 그리스도인이나 선한 행실을 하는 고귀한 성품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존경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의인,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미워하고 박해합니다. 왜 그런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착하고 고상한 성품을 가진 종교인들을 보면, 사람들은 자기의 선함이 극대화된 모습을 투영합니다. 나도 관심을 두고 노력하면 저 정도는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착하고 고상한 성품을 가진 종교인들을 칭찬하는 일은 자기의 선함과 인간성을 칭찬하는 일이 됩니다.
하지만 의인들은 다릅니다. 사람들이 의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이유는 의인들은 그들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우리 주님을 미워한 본질적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우리 주님을 미워한 이유는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그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셔도 예수님이 가만히 계시기만 해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자기 속을 꿰뚫어 보시고 정죄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시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싫어하는 이유를 찾아보시면 제 말이 맞다는 사실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서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자기 의가 낡은 누더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닮아가서 아무리 의롭게 되어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더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모두 부정한 자와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사 64:6)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 원리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 앞에서 그토록 자랑스러웠던 자기 의가 싸구려 보석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청년 시절에 불신자였던 형제들은 경험이 있을지 모릅니다. 친한 친구이지만 경건하기 때문에 다 함께 창녀촌에 몰려간다든지 악한 일을 도모할 때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게 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의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의인이 아무리 겸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괜히 싫은 것입니다. 괜히 불편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이유가 없는 미움은 아닙니다. 더러운 영혼은 거룩한 영혼 앞에서 비참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악한 자들은 의인의 결점을 찾아내어 물고 뜯으면서 즐깁니다. 그래서 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의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간구하고 지혜를 간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편의 수많은 눈물의 간구를 보십시오!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저는 예수님은 좋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저 그리스도인들을 보세요. 그들은 너무 지나칩니다. 그들의 기준은 너무 높고 그들의 목표는 너무 거룩해요. 그것이 인간으로서 할 짓인가요? 너무 인간미가 없는 것 아닌가요?” 그들이 비난하는 사람이 위선자라면 받아야 할 마땅한 비난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이 비난하는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다니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자기 의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경건을 숨어서 행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니엘이 온 몸으로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처럼 반응했습니다. 우리 주님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도 동일합니다. 주님은 빛이셨습니다. 그들은 어둠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난한 것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첫째로,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해 중요한 부분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이 가진 특성이 있다면 예수님을 닮은 그 특성이 어떠한가요?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닙니다. 그것이 팔복 말씀 전체의 개요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거나, 우리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자 할 때, 우리가 소개한 예수님, 혹은 예수님을 닮은 우리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정도라면 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거나 우리가 소개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참 예수님은 좋은 분이시군요. 나도 당신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좋겠네요!”라고 반응하는 정도로 끝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왜곡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명한 정체성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에게 돌을 던졌다는 점에서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워했고 예수님 대신 살인자를 살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끼친 영향과 그 결과는 항상 그랬습니다. 진정 예수님을 닮은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님처럼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도 이루시려고 할 때 세상 전체가 들고 일어나 그들을 미워했습니다.
요즘 “예수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하지만 이들은 잘못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모습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분명히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였을 것입니다.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최대한의 호감을 느꼈던 자들도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요 6:60)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떠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예수님을 닮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칭찬을 듣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둘째로, 본문 말씀은 우리의 정체성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은 예수님의 닮아 예수님의 특성을 보일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팔복 전체의 말씀, 특히 하늘나라에 관한 오늘 말씀은 더욱 분명한 우리 신앙의 시금석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복음서에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와 동일한 개념이 사도들의 편지에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눅 6:26)
주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름답고 선한 성품을 지니고 있기에 사람들이 좋아하고 함께 하고 싶고 매력적인 인품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함께 있으면 뭔가 불편하고, 함께 있으면 내 부족함이 더욱 드러나는 것 같고, 함께 있기만 해도 내가 뭔가 잘못된 인생을 사는 것 같고,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을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던 소수의 사람에게 예수님 동시대인이 느꼈던 감정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마음이 지독히도 가난한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만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눅 6:26)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오늘 본문 말씀에 대한 정확한 주석입니다.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좋게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과 주님의 백성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호감을 갖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혐오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왔을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워하여 죽였습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아주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 오늘날까지 세상은 하나님을 미워하며 혐오하였습니다. 그래서 중생이 필요합니다.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두운 세상을 탈출하여 빛의 나라로 이민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의미입니다. (롬 8:28–30)
그러므로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우리는 옛 성품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혐오하는 부분이 여러분 마음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의를 싫어하고,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두드러기를 일으키는 옛 성품이 여전히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고 우리의 더러운 누더기를 완전히 벗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육신의 열심으로 열심히 닮으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면 세상은 여러분을 칭찬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으려고 하면 세상은 여러분을 미워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으려고 하신다면 세상은 여러분을 혐오하고 박해할 것입니다. (롬 13:14)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박해를 받을 때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박해를 하나님 백성이라는 분명한 증거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 5:11–12)
하나님께서 악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허락하신 모든 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했던, … 예수님과 옛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가셨던 그 길을 저와 여러분도 걷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기쁨으로 마귀의 불화살을 모두 막아내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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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마 5:11-12) / 산상수훈 10 (0) | 2024.07.13 |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마 5:9) / 산상수훈 8 (0) | 2024.07.13 |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마 5:8) / 산상수훈 7 (0) | 2024.07.13 |
자비한 사람들 (마 5:7) / 산상수훈 6 (0) | 2024.0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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