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마 5:11-12) / 산상수훈 10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마 5:11-12) / 산상수훈 10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앞 말씀에 대한 해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지난번 말씀인 10절에서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 5:10)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마 5:11–12)
먼저, 오늘 말씀이 앞뒤 본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분명하게 보여주신다는 점에서 앞서 하신 팔복 말씀들과 연결이 됩니다. 앞서 하신 팔복 말씀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성들을 보여줍니다. 이어서, 오늘 말씀도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바로 뒤에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으로 그리스도인의 특성과 함께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다음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특성과 세상
오늘 말씀에는 그리스도인의 특성에 관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관계에 관해서 세 가지를 보여 주십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세상 모든 사람과 명확하게 다른 계열에 속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예언자와 같은 반열에 속한 자로서 세상 사람과 구별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팔복 말씀을 통해서 가장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이 이 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모든 사람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박해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쪽과 저쪽에는 일종의 전선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북한에서 탈출해서 대한민국으로 넘어오면 탈북 주민과 북한 정부와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듯이 이쪽과 저쪽 사이에 장벽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넘어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단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특성은 예수님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해서 세상 사람과 구별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모두 자기를 위해 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주님을 위해서 삽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너희가 나 때문에”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가 나 때문에” …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정체성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살지 않으면 박해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롬 14:7–8)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이 말을 들려주면 “너무 심한 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너무 과하다”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위해 산다고 하더라도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각각 수준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얻은 새 생명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전적으로 빚지고 있다는 빚진 자의 의식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를 위해 이루신 일을 믿을 때 이미 나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닙니다.
“…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고전 6:19–20)
신약성경에 이러한 말씀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한 마음의 소원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예수님에 대한 충성으로 세상 사람과 구별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주님을 위해 삽니다. 주님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특성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인해 세상 사람과 구별됩니다. 예수님께서 이점을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 (마 5:11–12)
하늘나라를 소망하고 하늘나라의 상급을 고대하는 것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인과 모든 믿음의 선배들의 특성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 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삶의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분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하늘의 고향을 사모하면서 살았습니다.
“이 땅 위에는 우리가 차지할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앞으로 올 도성을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히 13:14/공동번역개정)
여기서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과 땅에 속한 사람들의 명백한 차이점을 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은 땅만 생각합니다. 죽음 너머의 영원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가물가물 올라오는 죽음 이후의 생각을 꾹 눌러 버립니다. 불안해지기 때문입니다. 불안할 때마다 헛된 희망을 찾습니다. “뭐, 잘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일단 현재만 생각하고 현재에만 집중하자!”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과 죽음 이후에 관해 깊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주 생각합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할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를 기대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랍니다.”(고후 5:8)라고 고백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불안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와 힘이 됩니다. 천국이 주는 위로와 힘이 얼마만큼 큰가 하면 어떠한 고난과 박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정도로 큽니다.
말씀드린 세 가지가 예수님께서 본문 말씀으로 보여주신 그리스도인의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성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다른 족속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이 땅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특성들은 세상 사람들에게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이며 오직 그리스도인에게만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박해는 세상의 사람들이 당하는 박해와 다릅니다. 세상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집단의 사람들이 서로 박해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박해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족속이 되었기 때문에 당하는 박해입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님을 닮았다는 이유로 당하는 박해입니다.
박해에 대처하는 자세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경험하는 박해는 다양합니다. 오늘날도 세상에는 죽음과 폭력을 경험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감옥이나 수용소에서 신음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직장을 잃은 성도가 있습니다. 결혼을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성도가 있습니다. 왕따와 외로움을 경험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몰이해와 수군거림을 날마다 경험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거짓 고소로 고통받고 있는 성도가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어떤 형태로든지 성도라면 박해를 받습니다.
하지만 박해의 종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박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된 삶의 정황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박해를 당할 때 어떤 자세로 대처하느냐”입니다. 어떤 자세로 세상의 박해에 대처할 것인가!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중요하며 가장 어려운 점입니다. 이후에 살펴볼 산상수훈 말씀들과 신약성경에는 박해와 관련된 명백한 지침이 있습니다. 간단히 세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박해에 대해 반발하여 행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과도한 반응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박해를 당연하게 여겨야 하고, 박해에 반발하여 과도하게 행동하거나 말하는 것을 자제해야 합니다. 물론 보복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보복하지 말라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성경 말씀과 역사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보복을 자제하는 데서 더 나아가서 원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박해를 받을 때 원망과 분노의 감정이 생기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원망과 분노를 초월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초월할 수가 있습니다. 이 또한 성경과 역사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 봅시다. 사도 바울이 당한 박해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박해를 받을 때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박해하는 대상에 대해 분노하고 원망하였습니까? 아니면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며 보복을 자제하였나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매우 예민한 분이셨지만 박해자들을 원망하거나 처한 상황에 대해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를 읽어 보면 이러한 감정이 오히려 기쁨으로 승화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런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도 수많은 성경적, 역사적인 사례와 간증이 있습니다.
셋째, 우리 그리스도인은 박해에 주눅 들거나 절대로 기가 꺾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이 지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의 비난이나 박해를 받게 되면 우울한 감정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왜 이런 일이 계속될까?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감정에 사로잡히기가 쉽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울증에 빠지거나 자기 연민에 사로잡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명쾌하게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땅에 속한 사람, 하늘에 속한 사람
어떻게 인간으로서 박해에 대해 이렇게 반응할 수가 있을까요! 사실상 우리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이 땅에 속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은 산상수훈 말씀에서 “…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 5:44)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이렇게까지 할 수가 있겠습니까!
팔복 말씀도 그러하지만, 오늘 말씀도 자기 노력과 자기 힘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있다고 하는 모든 사상을 철저하게 깨뜨립니다. 육신을 좇아 행하는 사람들은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분노를 억제하는 일은 더욱 불가능합니다.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은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백성에게 요구하십니다. 나의 영광을 위해서 기쁨으로 인내했던 너희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아라! (골 1:11) 십자가를 넘어 저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바라보았던 나를 닮아라! (히 11:2)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박해하는 자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나를 본받아라! (사 53:7)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눅 23:34)라고 기도했던 나를 기억하라!
우리는 모두 믿음이 있기 때문에 주님과 주님을 따르던 옛 성도를 닮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주님의 명령 앞에서, 특히 우리 육신으로는 불가능한 명령을 주님께서 하실 때, … (이런 것들이 신약성경에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을까!” 혹은 스스로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지요. “나는 정말로 그리스도인의 이런 특성이 있기를 원할까!” “나는 정말로 이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에 도달하게 됩니다. 땅에 속한 사람과 하늘에 속한 사람의 뚜렷한 구별입니다. 과연 사람이 박해를 기뻐할 수가 있는가? 과연 인간이 박해를 견디는 것을 넘어서서 박해를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가 있는가? 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에게 이러한 것을 요구하시는가!
먼저, 한 가지 분명하게 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박해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 자체를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박해 자체를 즐기는 듯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영적 피학성애자(마조히스트)라고 부릅니다. 선교사들 가운데 가끔 이런 사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들은 어린 그리스도인들에게 헌신을 독려하며 이런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향을 우리 주님은 싫어하십니다. 우리는 주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서 이런 경향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 멋진 일이야! 나는 다른 사람과 달라! 내가 얼마나 주님께 헌신이 되어 있으면 저 사람들이 나를 박해 하겠어! 나는 편하게 지내는 많은 그리스도인과는 달리 뭔가 특별한 사람이 틀림없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런 사람이 바리새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박해받는 상황을 싫어해야 마땅하고 그것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모든 면에서 박해는 슬픔을 야기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이런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하십니다. “너희의 박해는 너희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를 증명한다.” 그러므로 “…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 (마 5:11–12) 이것이 주님의 명쾌한 답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모욕하고 박해를 하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으면서 기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편이라고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으며 대적 마귀가 나 싫어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박해를 당할 때 오히려 기뻐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동일한 이유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협박하고 매질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이를 기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다가 때린 뒤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고서 놓아 주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다.” (행 5:40–41)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 이러한 성도의 기쁨은 신약성경과 교회 역사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박해를 받았으니 주님을 닮은 우리도 박해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같은 대우를 받는구나! 이처럼 영광스러운 특권이 어디에 있겠는가!”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을 슬퍼하는, 함께 고난을 받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빌 1:29)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골 1:24)
고난과 박해는 결국 우리의 천국 시민증과도 같은 것입니다. 고난과 박해는 우리가 예수님과 사도들의 반열에 들어선 선택받은 천국 시민임을 증명합니다. 이런 말씀들을 신약성경에서 얼마나 많이 발견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성경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천국을 소망하기에, 이 땅에서 기쁘게 살아간다는 교리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이 교리의 영광스러움은 단지 천국에 대한 확신과 소망 이상입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
성경과 역사를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살면서 세 가지 생각의 지배를 받는 것 같습니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생각입니다. 둘째, 나는 어디로 가는가? 죽음 너머의 영원한 세계에 대한 생각입니다. 셋째,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 삶에 대한 보상에 대한 생각입니다.
사실은 모든 사람이 의식하든지 못하든지 이러한 세 가지 생각의 지배를 받습니다. 선한 사람이든지 악한 사람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든지 비그리스도인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 가지 생각의 측면에서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구별됩니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확신합니다. 이러한 확신에 문제가 있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둘째,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스도인은 죽음 너머의 영원한 세계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확신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습니다. 셋째,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놓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성경은 이에 관해 아주 자주 말씀하시는 것에 비해 절대 구체적으로는 묘사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필설로 말할 수 없는 너무나 신비하고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실 상”을 믿고 계십니까? 그것을 바라고 믿고, … 그래서 그것을 위해 살고 계십니까!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롬 8:18)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4:17–18)
하나님이 이에 관해서는 많이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마땅히 죽음 너머의 영원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에는 이러한 보상의 개념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놓고 교리를 반대하지는 못합니다. 보상의 개념이 성경 곳곳에 확실하게 박혀있는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시적으로 이러한 교리를 반대하지는 못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이러한 성경의 교훈과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천국이나 지옥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과거를 잊고 미래도 생각하지 말고 현재만 집중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구호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입니다. 호라티우스의 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현재를 잡아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이 시는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이런 생각은 매력이 있기에 기독교로 포장되어 교회 안에도 널리 퍼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에피쿠로스 철학 사상이며 현대 불교와 매우 유사합니다. 이러한 사상이 복음보다 더 멋있게 보이는 이유는 보상이나 처벌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에게는 영원한 보상이니 영원한 처벌이니 하는 것들은 우습게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보상이나 처벌에는 관심도 없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영향도 받지 않고 현재의 삶의 의미와 기쁨을 추구한다는 면에 있어서, 이러한 사상은 쿨하고 세련되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아무리 매력적으로 보이더라도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사상은 성경으로 검증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이 모든 생각과 사상의 시금석입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 (마 5:12)
주님의 가르침은 우리 주님의 삶과 항상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히 12:2) 즉,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생명의 무게를 견디신 것은 당신 앞에 놓여 있는, 죽음 너머의 무언가 영광스러운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이 땅의 삶에 관해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것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땀 흘리는 고생과 수고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 그 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불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든 작품이 그대로 남으면, 그는 상을 받을 것이요, 어떤 사람의 작품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불 속을 헤치고 나오듯 할 것입니다.” (고전 3:11–15)
우리의 이 땅 위에서의 업적은 시험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급을 받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상급을 받지 못합니다. 너무 어린아이 같은 생각일까요? 너무 유치한가요? 어떤 사람은 이러한 말씀들을 믿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저 하늘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의 모습도 매우 달라집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각 사람은 선한 일이든지 악한 일이든지, 몸으로 행한 모든 일에 따라, 마땅한 보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심을 알기에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 (고후 5:10–11)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히 12:28–29)
결론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아무런 이유없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땅을 살아가는 자녀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바라고 기대하고 소망함으로써 이 땅에서의 삶이 달라지기를 원하십니다. 단지 고난을 이길 뿐만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히 11:6)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천국과 천국의 보상에 관한 계시를 어린아이처럼 믿고 상을 바라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심판대 위에서 부끄러움을 당할까봐 두려워 하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왜 이집트 왕자로서의 안락한 삶을 버렸습니까? 히브리서 11장에 의하면 모세는 장차 받을 상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고난을 견뎠냈습니다. (히 11:24-27)
여러분은 지금 어떠십니까?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계십니까?
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에게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골 3:2)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하늘씨앗교회 지체 여러분, 여러분은 저 하늘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주실 상을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뚫어지게 쳐다보십니까? 우리가 자주 그렇게 하지 못하며 또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지 못하는 까닭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세월을 보낸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너무나 세상이 좋고 편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이 세상이 주는 기쁨을 바라보는 것은 좋은데 저 하늘의 영원한 기쁨을 바라보는 것이 왠지 불편하다면 왜 그런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사랑하는 하늘씨앗교회 지체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천국임을 기뻐합시다. 하나님의 상급이 우리를 기다라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기뻐하며 삽시다. 항상 죽음을 생각합시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생각합시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남겨진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게 될까요? 그때, 우리는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우리를 둘러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말해줄 수 있도록 합시다. “나는 이제 사랑하는 주님 곁으로 가니 슬퍼하지 말아라. 나는 평생 이날을 소망해 왔다”라고 확신 있게 말해주도록 합시다. 세상을 떠나는 순간 큰 기쁨으로 할렐루야라고 외치며 천국에 입성합시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서 남겨진 가족에게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날 때 꼭 믿음의 선배들과 동일한 고백을 하기를 기원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딤후 4: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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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비추어라 (마 5:13-16) / 산상수훈 11 (0) | 2024.07.13 |
박해를 받는 사람들 (마 5:10) / 산상수훈 9 (0) | 2024.07.13 |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마 5:9) / 산상수훈 8 (0) | 2024.07.13 |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마 5:8) / 산상수훈 7 (0) | 2024.0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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