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씨앗교회

빛을 비추어라 (마 5:13-16) / 산상수훈 11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빛을 비추어라 (마 5:13-16) / 산상수훈 11

 

오늘 주신 하나님 말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마 5:13–16)


오늘 본문 앞에 있는 말씀들을 생각해 봅시다. 앞에서 주님께서는 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진 내면의 특성, 즉 성품의 특성과 마음의 특성들을 주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것들입니까? “마음이 가난하다. 슬퍼한다. 온유하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자비하다. 마음이 깨끗하다. 평화를 이룬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 등의 여덟 가지 특성입니다.


뒤이어서,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특성을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다루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소금과 빛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나타내는 특성을 당연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


먼저,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을 불러 모으신 목적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불러 모으셨습니까?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불러 모으셔서 하늘씨앗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까? 오늘 말씀으로 주님은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소금처럼 행동해야 한다. 너희는 세상에서 빛처럼 행동해야 한다.”
신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을 불러 모으신 목적을 여러 차례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백성을 불러 모으신 목적이 성경에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여러분은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빌 2:15)


세상은 구부러지고 뒤틀렸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이 땅에 두셨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서 세상의 빛으로 삼으시려고 …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 땅에 남겨두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벧전 2:9)


사도들의 이런 말씀들은 오늘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이것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구원하셔서 하나님 나라 백성을 삼으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관점으로 본문을 살펴보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진리가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첫째, 빛과 소금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 백성이 빛과 소금이 되도록 설계하시고 만드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금이 되라거나 빛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소금이다,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우리 주님께서 이 점을 분명히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세상의 소금인가? 나는 세상의 빛인가?” “나는 세상에서 소금처럼 행동하는가? 나는 세상에서 빛처럼 행동하는가?”


사실상, 우리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명확하게 정의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정의하셨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입니다. “너희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 내가 가르쳐주겠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받으며 이 진리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두 번째 진리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소금이나 빛으로 행동하지 않는 일은 가능하지 않으며, 만약 그런 일이 있으면 그 자체로서 모순이며 어처구니가 없고 우스운 꼴이라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소금이 짠맛을 잃은 경우를 상상해 보라고 하십니다. 등불을 말이나 됫박 같은 것으로 덮어두는 꼴을 상상해 보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금이 짠맛을 잃는 실제 사례를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어떤 사람들은 곡식의 양을 재는 “말”이나 “됫박”에 기상천외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말씀은 너무나 쉬워서 어린아이라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소금이나 빛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꼴이라는 것입니다. 우스운 꼴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인데 그리스도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빛을 비추지 않는 일은 그 자체로 모순이라는 말씀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세 번째 진리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짠맛을 잃거나 빛을 숨기려 한다면 아무 데도 쓸데가 없는 존재가 된다는 진리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마 5:13) 


예수님은 짠맛을 잃은 소금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얼마나 쓸데없는 존재인지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짠맛을 잃은 소금을 소금이라고 부를 수가 있을까요? 요즘은 쓰레기도 재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을 짠맛을 잃은 소금이 있다고 하면 어디에 쓸 수가 있을까요?


옥수수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아무런 맛이 없는 옥수수가 있다고 합시다. 하지만 이런 옥수수도 쓸데가 있습니다. 가축 사료로 활용할 수도 있고, 정 안되면 퇴비로 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소금이 만약 소금의 특성을 잃어버린다면 정말로 아무 데도 쓸데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소금의 특성, 즉 짠맛은 예수님이 팔복에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여덟 가지 특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을 하나님께서 어디에다 쓰시겠습니까? 세상에서도 천국에도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은 아무 쓸데가 없습니다. 다만,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입니다.


유사 그리스도인의 운명


그러므로, …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가 바로 유사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데 이름뿐인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이 아닌 데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데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 … 주님께서 보시기에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가 없는 존재입니다. 


모든 존재가 나름의 목적에 충실합니다. 산속의 이름 없는 미물들도 다른 동물의 먹이로, 혹은 땅을 비옥하게 하는 물질이 되어 자연에 봉사하며 창조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룹니다. 사슴은 사슴대로, 사슴을 잡아먹는 표범은 표범대로, … 만들어진 목적대로 존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악인들도 자기 주인인 악마에 봉사하며, 스스로 멸망의 이유를 만들어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에 봉사합니다. 하지만 이름뿐인,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어떤 사람들을 멀리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 그대는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딤후 3:5) 경건하게 보이지만 경건함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멀리하라고 사도가 권면하셨다면 아예 경건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에 관해서는 어떻겠습니까! 경건을 잃은 그리스도인은 짠맛을 잃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유익은 누리고자 합니다. 마음의 평안도 얻고 싶고, 내세의 안녕도 준비하고 싶습니다. 팔복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백성의 복들에 관해서도, … 그리 믿기지는 않지만, … 혹시 주시고자 한다면 모두 받을 용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보아주시기를 바라면서도 하나님이 부여하신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수행하기 싫어합니다. 싫어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맛을 잃은 소금, 말로 덮은 빛”입니다.


거지 나사로 같은 사람이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맛을 잃은 소금같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부패한 세상도 아니요,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도 아닙니다. 맛없는 세상도 즐기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의 즐거움도 알지 못합니다. 어둠도 아니요, 빛도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명확한 표현은 “회색지대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도 버려짐을 당하고 하나님 나라에서도 버려짐을 받을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 25장의 주님께서 친히 하신 비유들과 연결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맡겨진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종을 향해 말합니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마 25:30) 


소금과 빛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나타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지요? 여러분의 정체성, 곧 소금과 빛임을 나타내지 않고 숨기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지요? 


우리는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감춘 빛이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외치면서 커밍아웃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팔복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점점 잃어가는 것이 아닌지, … (이것이 짠맛을 잃는 것에 관한 말씀의 의미입니다.) 혹은 오늘 말씀하신 사례처럼 빛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숨기려고 애쓰지는 않는지, …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소금이라도 짠 소금이 있고, 덜 짠 소금이 있습니다. 빛이라고 해도 다 같은 빛이겠습니까? 성경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빛으로 비유하셨습니다. 태양과 같은 빛도 있고 촛불과 같은 빛도 있습니다. 소금의 염도가 아무리 낮더라도 부패 방지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어두운 빛이라도 빛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는 천지 차입니다. 아무리 어두운 빛이라도 존재한다면 절대로 더 어두워지지는 않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소금과 빛으로 비유하신 이유가 소금과 빛이 이처럼 신비한 특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내가 소금인지, 내가 빛인지, … 도무지 확신이 들지 않아서 감추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밖에 여러 이유가 있을 수가 있겠지요. 


만약 여러분 마음에 숨기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면 오늘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왜 숨기고자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권면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을 소금과 빛으로 정의하시고 짠맛을 잃거나 빛을 감추어 두는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잃거나 감추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입니까? 마귀입니까? 여러분 스스로 원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짠맛을 잃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암시하십니다. 또한 짠맛을 잃고 다시 짠맛을 회복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도 암시하십니다. 그러므로 소금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빛이냐, 빛이 아니냐가 더욱 중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마 12:20) 정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분이시라면 우리는 오늘 말씀을 어떻게 받아야 하겠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야 하겠습니까? “아!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실망하여 주님을 따르기를 포기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더욱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를 열망하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산상수훈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던 최초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감동이 됩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이스라엘에서 가장 소외당하고 영향력 없는 계층의 사람들, 이스라엘의 주류 종교에서 완전히 소외된, … 더럽다고 여겨진 소수의 갈릴리 사람에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분들이 우리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진실로 세상의 소금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더 감동되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아직은 아니더라도, … 내가 어떤 존재이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이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이 만드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원하는가? 세상 사람과 다르더라도 세상에서 박해를 받더라도 진정 예수님을 닮기를 바라는가? 그것이 결국 우리의 존재를 결정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들은 찌질한 사람들이 결국은 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 간절한 욕망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바라면서도 내 자신이 바뀌기를 바라지 않고 욕망하지 않고, 내 자리를 고수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 앞에서 온유한 자세가 아니며 그러한 사람에게는 주님께 받을 복이 없습니다. (마 5:5)


여러분이 순종한다면 여러분은 소금입니다. 여러분이 순종한다면 빛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버려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있게 되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영원히 뵙지 못할 것입니다. 


기름과 심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오늘 본문 말씀을 전하면서 빛을 비추기 위해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첫째는 기름입니다. 둘째는 심지입니다. 우리는 등잔을 사용하지 않지만, 고대인들은 등불과 등경에 관한 말씀을 듣고 즉시 기름과 심지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어떤 설교자는 기름만을 강조합니다. 어떤 설교자는 심지만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성경과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기름과 심지, 둘 다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마 25:1-13) 우선, 기름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던 팔복 말씀 전체가 기름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 않고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성이 발현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인 이유는 세상의 빛이신 분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는가?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있는가?” 이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음을 확신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마음속에 충만하게 거하시기를 날마다 기도하였습니다. (엡 3:16-19 등.)


생명을 주시는 일은 성령의 사역입니다. 성령의 사역의 본질은 기적을 연출하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일하시는 목적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일하시는 목적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하게 하시며, 우리가 새롭게 되어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성들을 발현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에게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권면은 성령의 은사를 끊임없이 구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의 은사를 끊임없이 구한다는 것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기도입니다! 기도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이 우리에게 임하도록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하도록, 즉 성경의 표현으로 말씀드리자면, …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우리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날마다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름을 준비하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를 단번에 주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요 7:37–38)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다.” (요 6:35) 어떤 사람은 주님의 이러한 약속의 말씀을 오해하여서 성령의 은사가 단 한 번에 받아서, 영원히 누리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하고 날마다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소금의 짠맛을 유지하는 힘은 오직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며 날마다 생명의 양식을 먹는 데서 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팔복 말씀에서 하신 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기 때문에 날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사모합니다.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마 13:12)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들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들은 교회 역사 안에서 등대처럼 우리의 앞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진실로 의에 주리고 목말랐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생명의 샘에 가서 생수를 마셨고, 날마다 주님께 가서 생명의 떡을 먹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분들의 전기를 읽어보십시오. 그분들은 처음 주님의 은혜를 받은 이후에 절대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이 말랐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기도 시간은 늘어만 갔고 그분들의 성경 연구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분들은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날마다 즐기고 누렸습니다. 그분들은 절대 기름을 공급받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분들은 짠맛은 더욱 짜졌고, 그분들의 빛은 더욱 밝아졌습니다. 


그다음에 중요한 것은 심지입니다. 심지도 중요합니다. 심지가 없으면 기름이 있어도 불이 타지 않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심지가 모양이 흐트러지거나 오염되면 연기가 나서 불빛이 비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심지를 정돈하고 손질해야 한다고 권면하였습니다. 심지를 손질하는 일은 매우 세심한 작업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우리 삶에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이 나를 어떤 목적으로 어떤 모양이 되도록 의도하셨는지를 묵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되도록 운명지어졌는가?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모습으로 빚으시기를 원하시는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팔복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성을 묵상하는 것으로 출발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특성이 나타나기를 원하시는가를 매일 바라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팔복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는 세상과 달라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과는 정 반대 방향을 바라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과 정 반대 방향을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달라지고 싶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비극입니다. 주님을 닮아감으로써 세상 사람과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재앙입니다. 이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방향성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거나 우스꽝스러운 일을 넘어서 그 자체가 정신 분열입니다. 자기가 되기를 바라는 자기와 실제 삶의 방향성이 다르다는 것은, … 오늘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미친 짓입니다.


단 한가지 목적- 하나님의 영광


마지막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소금과 빛이라고 정의하시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성과 기능을 잃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를 말씀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을 만드신 궁극적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여러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런 설교를 우리는 몇 번을 들었고 이 말씀을 몇 번을 읽었겠습니까! 사실상 주님은 팔복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시간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굳게 결심한다고 해도 그 결과는 미지수입니다. 잘못하면 위선자가 되거나 잘 돼야 우리의 본모습을 감추는 것이 우리 순종의 최대치일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절대적인 명령 앞에 우리는 절망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나의 자아가 완전히 깨어져야만 합니다. 내 안에 오직 그리스도만 사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의 모든 것이, 내 안의 모든 것이, 내 존재의 모든 측면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성령께서 나를 사로잡고, 내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오직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어야만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롬 12:2)


사람의 제일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의 목적은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고백한 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까! (웨스트민스터 대교리 문답 1문) 우리의 전 존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할 때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으신 목적이 이루어지고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의 말은 정말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이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롬 8:1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광을 위해 살라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반하는 모든 경향이 바로 죄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는 의지가 박약하고, … 심지어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시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오직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완전히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평생 하나님 영광만을 위해 사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너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라! 내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니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너희도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저와 여러분을 보고,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저 사람은 참 이상하다! 무슨 재미로 살까! 저 사람에게는 나와 다른 면이 있다! 다르면서도 매력이 있다! 저 사람처럼 되고 싶지는 않지만 저렇게 사는 것이 옳지 않을까! 저 사람처럼 살아야 천국에 가지 않을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까?” 사람들은 저와 여러분을 보며 결국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구나! 하나님의 백성이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요! 예수님의 제자들이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사람들이구나!”


이렇게 될 때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예수님의 형제요, 빛이신 예수님을 반사하는 예수님의 반사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신 것처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이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의 빛이 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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