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씨앗교회

"더 나은 의" (마 5:19-20) / 산상수훈 13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더 나은 의" (마 5:19-20) / 산상수훈 13

 

지난번 들은 말씀을 되살려 봅시다. 주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마 5:17) 그리고 주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셔야 할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왜 주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셔야만 합니까? 율법이 뭔가 모자라거나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마 5:18)


사실상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천지는 없어지더라도 율법은 없어지지 않는다!” “비록 천지가 없어지더라도 율법은 영원하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율법의 완전성입니다. 하나님의 법의 영원성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율법의 완전함과 영원함을 선언하셨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 주신 하나님 말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아주 작은 사람으로 일컬어질 것이요, 또 누구든지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 5:19–20)


주님께서 율법의 절대성과 영원성을 선언하시고, 이어서 오늘 말씀을 하셨습니다. 먼저 “그러므로”라고 하셨습니다. 논리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순서입니다. 율법의 절대성을 선언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법을 어떤 관점으로 보아야 하고 어떤 비중으로 다루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두 종류의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율법주의자와 율법주의자입니다. 예수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반율법주의자와 율법주의자가 있습니다. 말씀의 앞부분은 반율법주의자(antinomian)를 염두에 두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아주 작은 사람으로 일컬어질 것이요, 또 누구든지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마 5:19)


그리고, 말씀의 뒷부분은 율법주의자(legalist)를 염두에 두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 5:20)


반율법주의를 반대하심


먼저, 반율법주의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아주 작은 사람으로 일컬어질 것이요, 또 누구든지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마 5:19)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교회 내의 두 사람을 대조하고 계십니다. 한 사람은 작은 계명 정도는 쉽사리 어기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계명 중 작은 것 하나라도 중하게 여기고, 자신도 행하며 다른 사람도 행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 사람은 계명을 행하는 일에 모범이 되지 않는 성경 교사이며, 다른 한 사람은 계명을 행하는 일에 모범이 되는 성경 교사입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명백합니다. 한 사람은 천국에서 아주 작은 사람이라고 평가하십니다. 다른 한 사람은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고 평가하십니다. 


은혜를 주신 목적


계명을 경시하는 반율법주의자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의 은혜를 악용하여 방종한 삶을 조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는 더는 율법의 종이 아니다. 나는 죄사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나에게 계명은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의 교훈을 전수받은 사도들은 이런 견해에 대해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롬 6:15)의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롬 6:15)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우리는 분명히 대답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은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갈 5:16) 말씀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따라 행하는 그리스도인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됩니다. 이와 관련된 말씀이 많습니다.


주님과 주님의 교훈을 받은 사도들이 이렇게 말씀하시는데도 이른바 성결(깨끗함)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비한 체험이 한 순간에 성결을 제공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한 순간에 내 안의 더러운 죄가 불타 없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성화의 끝이 아니라 성화의 시작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도들의 교훈은 한결같습니다. 성결하게 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법을 행하는 길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은 중생뿐 아니라 중생 후 성화를 위해서입니다. 성결하게 되는 일은 중생 이후의 일입니다. 성결은 우리의 일상에서 예수님의 계명을 따를 때 날마다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고 주장할 때 그 사람이 받은 은혜가 계명을 행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받은 은혜는 거짓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한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그 사람의 모습이 예수님의 계명을 행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 봅시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 사람이 받은 것은 성령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을 떠난 이단들은 필연적으로 도덕적인 사고를 치게 되어 있습니다. 계명을 경시하는 교훈은 주님의 교훈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받았고 지금도 더 큰 은혜를 사모하는 그 은혜가 어떤 것입니까? 


은혜는 우리를 율법의 권세에서 구출하여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의롭게 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혜란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하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은혜는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성결하심을 본받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온전히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은혜를 받아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14:21) 말씀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요 14:21)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계명을 행하는 것은 절대로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분리하기 시작하면 율법의 절대성에 대한 우리 주님의 선언에 대놓고 반대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교회로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계명을 무시하는 반율법주의자들을 분별해야 합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게 방해하는 우리 안팎의 모든 영향력과 싸워야 합니다.


율법의 완전성과 영원성을 선언하신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마 7:21) 말씀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 7:21)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법, 율법이며, 십계명과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계명입니다. 이 법들은 영원히 폐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도덕법은 하늘과 땅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더 나은 의” - 하나님의 뜻


그렇습니다! 산상수훈 전체가 오늘 하신 주님의 말씀에 빛을 비추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성경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산상수훈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더 성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시고 이렇게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 5:20)


우리는 어떤 면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합니까? 어떤 면에서 그들보다 더 의로워야 하고 더 성결해야 합니까?


율법주의 비판 - 마음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끊임없이 비판하셨습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 (눅 18:9–14)


바리새인과 세리는 동일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동일하게 살던 집을 떠나 동일한 성전으로 올라가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종교적 행동을 하였습니다. 마치 주일이 되면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차를 타고, 혹은 걸어서, 예배당을 향해 모여드는 것처럼, … 주일이 되면 우리가 이렇게 동일한 장소에 모여서 동일한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바리새인과 세리는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동일한 계명 준수, 동일한 종교 행위, 동일한 예배와 기도가 드려졌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천지 차이였습니다. 한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셨고 다른 한 사람의 예배는 거절하셨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처럼 말입니다. 당시 사람이 보기에 바리새인은 겉으로 의롭게 보였고, 세리는 불의하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종교적인 행위의 차이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형식의 차이 때문이었습니까? 서서 기도하는 것과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행동의 차이 때문이었습니까? 


바리새인의 예배는 사실, …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만한 요소가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바리새인의 감사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감사입니다. 자기의 공로를 하나님께 자랑하는 감사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높이는 감사입니다. 무릇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을 예배로 알았습니다. (시 29:2) 그런데, 바리새인의 예배에 하나님을 높이는 요소가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바리새인의 감사의 내용으로 볼 때, 바리새인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사모하고 자신도 거룩하게 되고자 하는 바람이 있겠습니까? (레 11:44-45; 벧전 2:15-16) 전혀 없습니다! 바리새인이 매일매일 예배를 드리더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함을 단 한 조각이라도 닮아갈 가능성이 있습니까? (마 5:48)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에게는 마음의 가난함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현재 모습에 대한 슬픔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의 마음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태도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팔복에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성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바리새인의 마음은 자기만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만족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바리새인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자기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 … 그것이 바리새인의 예배의 목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응답하셨고, 세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의인이라고 존경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멸시하는 세리를 더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까?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었습니다. 여러분, 세리의 기도를 들으며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고백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시 51:17)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이사야 선지자가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사 6:5)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뽐낼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남과 비교하며 자랑을 늘어놓을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예배드리러 하나님 앞에 나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나왔다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고, 슬퍼지지 않고,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참되신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하나님이겠습니까! 우리가 만약 바리새인과 같은 태도로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한다면 우리가 살아계시고 참되신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자이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는 “자기 의”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바로 그 “더 나은 의”는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배운 바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순종케 하는 복음을 믿은 자에게 주어집니다. (롬 10:16; 16:26)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 6:17–18/개역개정)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서 꾸밈없이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벧전 1:22)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이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다름 아닌 마음의 순종입니다. 형식도 아닙니다. 열심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 우리의 찬양, 우리의 기도, 우리의 삶을 받으실 때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삼상 16:7)


마음과 행위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행하는 것이 마음의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뜻에서 교묘하게 빠져나갑니다. 반(反)율법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는 관심이 없고 행동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법에 각종 규제와 규칙을 달아서 자기도 지키고 남도 지키라고 강요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반율법주의를 명백하게 배격하셨습니다. 많은 말씀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아주 작은 사람으로 일컬어질 것이요, 또 누구든지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19절) 그리고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 7:21)


여러분, 마음뿐만 아니라 행위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주님께서 당신의 계명을 왜 강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법과 주님의 계명은 우리가 지키라고 주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율법주의도 배격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주님의 신랄한 비판들이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많은 인용 구절을 말씀드릴 필요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우리 주님은 율법주의자의 한계를 지적하시고 그리스도인이 율법주의자들보다 더 의로와야 할 것을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율법주의도 아니고 반율법주의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중요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행위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과 사도들은 이 두 견해 모두 철저하게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들은 반율법주의자들에게 분명히 경고합니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약 2:26) 
또한 사도들은 교회 내의 율법주의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음에 근거하여 의에 이르려고 한 것이 아니라, 행위에 근거하여 의에 이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롬 9:31–32)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중요한 것은 반율법주의나 율법주의가 아니라 사랑하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녀 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 그것이 중요합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바리새인은 나름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의 율법 준수는 하나님께 모욕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지, 무엇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 바리새인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진정 원하시는지에 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의 종교 행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은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레 11:44-45; 벧전 2:15-16)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 같이 우리도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마 5:48) 이것이 여러분과 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바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놓친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요? 하나님 백성된 우리는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우리에게 이미 알리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율법학자에게 예수님은 모든 계명의 핵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마 22:37–40)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또 우리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이요, 구원하신 목적이요, 부르신 목적이자, 우리를 향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요일 3:23)


결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결이 무엇입니까? 성결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이며 사람에 대한 태도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결은 하나님에 대한 관점에서 나오는 행동이며 사람에 대한 관점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독교적인 형식과 예배와 기도에 매달리더라도 성결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비한 체험을 뜨겁게 하더라도 우리는 성결해질 수가 없습니다. 


성결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며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입니다. 성결은 하나님이 구원하신 형제자매에 대한 마음이며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우십니다.


반면에 죄는 무엇입니까? 죄는 불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우습게 여기는 마음이며 그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요일 3:4) 사도의 말처럼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 6:9–10) 아멘!!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으로 아무 탈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벧후 3:11–14)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엄히 명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의 말씀입니다.


“이제는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러운 채로 있어라. 의로운 사람은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채로 있어라.” (계 22: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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