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의 의도(마 5:21-26) / 산상수훈 15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계명의 의도(마 5:21-26) / 산상수훈 15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까닭없이)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 얼른 그와 화해하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은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어서 그가 너를 감옥에 집어넣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마 5:21–26)
오늘 본문 말씀 바로 앞 20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낫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 5:20)
이어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가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을 수 있는지에 관해 여섯 가지 사례를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5:20-47) 살인과 분노, 간음과 성적 욕망, 이혼, 맹세, 보복, 사랑과 증오에 관한 여섯 가지 사례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마 5:48)
오늘 본문이 첫 사례에 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21절과 22절입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21-22절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까닭없이)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21-22)
거짓 만족감
일단, 이 말씀에서 눈에 띄는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계명을 사법적인 문제로 제한했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법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로 해석하셨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은 계명을 “재판”의 문제로 급을 낮추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계명을 “심판”의 문제로 급을 높이셨습니다.
모든 고등 종교에는 계명이 있습니다. 공통점도 많지요. 열심히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율법학자와 바라새인들도 그랬고 그들의 영향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기준선을 낮추어서 지키기에 매우 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야만 자신들도 의롭게 되고,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만족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의 계명을 행했다는 만족감, 그것은 종교가 주는 큰 유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만족감은 거짓이라고 폭로하셨습니다. “아니다! 너희는 스스로 만족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만족하지 않으셨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의 영향으로 유대인들은 칼로 사람을 직접 죽이거나 하지 않으면 십계명 중 제6계명을 잘 지켰다고 스스로 만족하였습니다. 당연히 하나님도 만족하셔야 할 터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그런 견해에 대해서 “아니다. 절대 아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 중 제6계명입니다. 제1계명과 제2계명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아멘!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아멘!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누가 이 계명을 부정하겠습니까!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계명들을 쉽게 지킬 수 있게 기준을 낮춥니다.
“우리 집에는 불상이 없어요. 대신 십자가가 걸려 있지요. 저는 오직 하나님만을 굳게 믿고 있지요. 교회도 열심히 다닐 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점집 같은 데도 한 번도 가지 않았는걸요! 심지어는 돈도 우상이 된다면서요! 그래서 저는 우리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이후에는 로또도 사지 않는다니까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제1, 2계명뿐만 아니라 제6계명에 대해서도 이런 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만족과 기쁨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관점을 어떻게 고쳐주셨습니까?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까닭없이)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21-22)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본뜻이 형제자매에 대한 분노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이 말씀에서 어떤 고대 사본에는 괄호 안의 “까닭 없이”가 붙어 있습니다. (붙어 있든지 붙어 있지 않든지 충격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형제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거나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얼간이라고 번역한 원어 단어는 “라가”입니다. 라가는 아람어로 “쓸모없는 놈”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보를 개역개정은 “미련한 놈”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공동번역개정은 “미친놈”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즉, 이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형제자매에 대해 분노하거나, 멸시의 말이나 조롱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부담스럽고 엄청난 말씀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형제자매에 대하여 성을 내거나, 멸시의 말을 하거나 조롱하는 말을 하는 것이 바로 살인이라고 하신 셈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가 어떻게 가정생활을 할 수가 있을 것이며,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율법의 기준선을 낮추실 생각이 전혀 없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악한 행동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음에서 악한 생각들이 나온다. 곧 살인과 간음과 음행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다.” (마 15:19)
“마음에서 악한 생각들이 나온다. 그리고 악한 생각은 악한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주님의 교훈입니다. 살인이라는 행동의 배후에는 지정의로 이루어진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속에 분노가 있고 얕잡아보는 마음이 있고, 깔보는 마음이 있을 때 그것은 결국 살인으로 이어집니다. 사도들과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말의 힘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총이나 칼이나 독극물은 고작 우리의 육체를 죽일 수가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타인에게 뱉은 말은 인간의 영혼도 죽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말은 능력이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인간의 말은 타인의 영혼에 능히 상처를 주거나 얼마든지 죽일 수가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가 소시오패스에 의해 자행되는 가스라이팅이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우리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형제자매에 대한 분노나 형제자매를 낮추어보는 마음 자체가 살인과 똑같은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율법 조문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영적이라 함은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볼 때, 우리의 육적인 시각이 아니라 영적인 시각으로 보아야만 율법 조문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보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볼 때 육적인 시각으로 보면 나의 만족만 추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의 만족, 하나님의 기쁨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베푸신 하나님을 우리 순종을 통하여 만족시킬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형제자매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서 서로서로 나보다 더 낫게 여기고, 예수님의 희생을 본받아서 서로서로 손해를 보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서로서로 예수님 섬기듯이 섬기고, 예수님이 부족한 제자들을 위해서 그러하신 것처럼 인내하며 끝까지 소망을 두고 기도하는 것! 그것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뒤에 놓여있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23-24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23-24)
하나님의 마음
이 말씀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잘못을 했느냐 하는 문제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잘잘못을 따지지만, 하나님은 형제자매가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을 했느냐 하는 문제는 크게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는 어떤 형제나 자매가 다른 형제나 자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 문제시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형제자매를 사랑하라는, … 우리 주님의 가장 큰 계명을 지킬 때 꼭 기억해야 할 일은 우리는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지만,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잘못을 크게 괘념치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보실 때 하늘 아버지로서 바라보십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어린 자녀들은 “네 잘못, 내 잘못”을 따집니다. 하지만 부모는 동기간에 서로 아끼며 잘 지내기만을 바라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믿음의 형제자매를 바라볼 때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아버지의 마음을 편안하고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떠했습니까? 지난 주일에 우리가 배운 대로 종교적 위선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순간조차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은 보란 듯이 서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이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멸시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조롱하는 마음이며 무시하는 마음이며 하나님 자녀를 갈라치기 하는 마음이며, …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살인하는 마음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거짓 종교 시스템
이처럼 죄인 된 인간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기괴한 종교를 만들어 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가나안 땅의 종교와 동일한 방식으로 정교한 종교 시스템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유대인의 종교 시스템의 목적은 자기만족일 뿐 아니라 자기 양심을 달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분야의 전문가요 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발생하였습니까? 유대교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선행으로 악행을 덮으면서 양심의 가책을 달랠 수가 있었습니다. 제6계명을 지키기가 아주 쉬워졌을 뿐만 아니라 양심의 가책도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만족하실 터였습니다. 모든 것이 이런 식이었습니다.
나무로 깎은 드라빔만 불태워 버리면 제1계명과 제2계명은 준수된 셈이었습니다. “goddamn”과 같은 하나님 이름이 포함된 욕만 하지 않으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계명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일은 없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고 회당 예배에만 참여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완벽하게 지킨 것이며 뿌듯한 종교적인 만족감으로 가득 차서 하루를 기쁘게 보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부모께 드려야 할 몫을 하나님께만 드리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계명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도 이런 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종교가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다른 모든 종교와 같아져버린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완벽합니다. “내 양심이 깨끗해졌습니다.” 사람도 만족시키고 하나님도 만족시킬 수 있는 완벽한 종교 시스템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을 따르는 하나님 백성이 배교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정통 유대인의 삶을 그린 유명한 넷플릭스 미니 시리즈가 있습니다. (“슈티셀가 사람들”) 정통 유대인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며 기뻐 뛰노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구체적으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장면을 볼 때 가슴이 뭉클하며 뭔가 뒤통수를 맞은 기억만큼은 선명하게 살아 있습니다. 아마도 안식일 계명을 기쁨으로 지키는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똑 같이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기를 바라는 평범한 종교인이었습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 19:8) 이 말씀을 날마다 기억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기쁨으로 행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비난과 심판을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까? 그들이 매일 읽는 토라와 예언서와 성문서들이 그들의 양심을 일깨우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도 성경을 읽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령께서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음성에 순종하기보다는 종교적인 정교한 장치를 통해서 양심의 고통을 회피하는 수단에 의지하였습니다. 사도들이 선한 양심을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에 즉각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선한 양심을 달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성령의 강력한 음성을 듣고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 성령이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시험받던 날에 반역한 것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히 3:7–8)
어떤 사람은 점점 더 온유해지고 어떤 사람들은 점점 더 완고해집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성령의 음성에도 마음이 완고해진 사람들의 최후는 영적 죽음입니다. 이 일은 출애굽 때에도 일어났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항상 있었습니다.
참된 종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이 정죄하신 저 위선자들과 같은 경향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우리의 선을 악을 덮는 도구로 사용할 가능성을 인정합시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이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씀해 주실 때, 말씀해 주시는 그 음성과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지 않고, 다른 선한 일들로 대충 악을 덮음으로써 내 양심을 달래려고 하는 시도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내가 하나님께 이만큼 드렸으니, 하나님께서 나의 작은 잘못 정도는 눈감아 주겠지!” 하는 방식의 “기브 앤 테이크” 식의 경향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합시다.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기도했기 때문에, 선행을 했기 때문에 내 양심이 깨끗해졌다는 그런 착각은 하지 맙시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실제로 어떠한 모습이든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의 선행이 악행을 메꾸어줄 것으로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러한 경향성에 대해서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강조하고 계십니다.
어느 정도로 강조하시느냐 하면, 내가 비록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예배할 마음과 제물을 온전히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고, 내가 형제자매에게 잘못한 일에 대해 생각이 나거나, 형제자매에 대해 악한 감정을 품었거나, 형제자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이 있으면 오히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기다리시게 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형제자매와 관계를 바르게 한 후에 예물을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서로를 향한 죄를 품는 한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씀과 다름없습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시 66:18)
사무엘상 15장에 나오는 사례가 이 진리를 이야기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끔찍한 이 명령은 원수를 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약속의 계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자기 관점으로 자기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예배하며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예배를 받으셨습니까? 오히려 사울은 선지자들 통해 무서운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을 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삼상 15:22–23)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순종이 제사보다 우선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제사보다 우선이라고 말씀하신 것들은 우선 지킵시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제물을 내려놓고, 형제자매와의 일을 먼저 바로잡겠다고 결심합시다.
이러한 순종의 은혜가 우리 교회 안에서 하나하나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더욱 온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더욱 사랑하겠다고 결심합시다. 용서받아야 할 일은 용서받아야 하고, 용서해야 할 일은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이 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합시다. 하지만 오늘 마지막 주님의 말씀은 그때가 길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25-26절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 얼른 그와 화해하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은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어서, 그가 너를 감옥에 집어넣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25–26)
순종의 시급성
오늘 본문 말씀의 마지막 구절은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비유들과 비슷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빚진 자임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인 순종이 매우 엄중하고 신속하게 집행되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왜 형제자매와 화해하는 일이 이토록 시급합니까?
형제자매와의 관계가 엄중하고도 시급한 이유는 여기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과 화해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는 일을 지체하거나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화해 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의 양심에 말씀하실 때마다 다시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비유의 말씀처럼 큰 빚을 탕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빚은 그때 그때 탕감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옛 시대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염소나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려서 육체를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였습니다. 지금은 성령의 능력으로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제물이 된 동물들의 피보다 더욱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여 졌습니다. 옛 성도보다 얼마나 깨끗하여졌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음성이 우리 마음에 들려올 때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사함은 십자가 상에서 영단번에 이루어졌지만 그래도 우리는 날마다 발을 씻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의 양심을 통해 말씀하실 때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동물들의 피로 옛 성도들이 깨끗해지고 그 행실이 거룩하게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어찌 우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습니까! (히 3:7-8; 9:12-13; 요 13:8)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권고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이 권고가 저와 여러분의 양심에 들려지기를 원합니다. 아무도 우리 자신의 마지막 때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때가 바로 오늘이듯이 형제자매를 용서하고 용서를 받을 때도 바로 오늘입니다. “도중에 얼른 그와 화해하도록 하여라” 이것이 성령의 음성입니다. 이 음성이 들리십니까? 주님의 거룩한 법의 정죄가 느껴지십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의 동기까지 살피시며 세심하게 인도하고 계심을 알지 못하십니까? 모든 것인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긴급한 조치입니다. 우리 양심이 굳어져 이스라엘 백성처럼 광야에서 버림을 받기 전에 신속하게 순종합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더럽고 가망 없는 죄인이었던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날마다 더 성결해지고 날마다 더 거룩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면 거룩해질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온전한 교제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 그리고 기대와 소망이 하나님의 계명에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 19:8) 하나님을 사랑하는 온 세상의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계명을 즐거워하고 계명을 지켜 하나님의 복을 받은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요일 3:14–16) 아멘!
우리 교회에서 실제 살인이야 벌어지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의 교훈에 따르면 주님의 모든 계명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우리에게 당장 시급한 것은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이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어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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