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씨앗교회

계명의 대원칙(마 5:21-22) / 산상수훈 14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계명의 대원칙(마 5:21-22) / 산상수훈 14

 

https://youtu.be/LB8UHoaTK5c

 

“옛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마 5:21–22)

 

문맥

 

주님께서는 본문부터 시작하여 여섯 가지의 계명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오늘 본문 말씀부터 시작하여 5장 48절까지 이어지는 말씀 전반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 21절에 보면 “옛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21) 라고 하셨습니다. 


27절에 보면, “‘간음하지 말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27) 라고 하셨습니다. 


31절에서는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는 사람은 그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어라’ 하고 말하였다.” (31)


33절에 보면, “옛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고, 네가 맹세한 것은 그대로 주님께 지켜야 한다’ 한 것을 너희는 또한 들었다.”(33) 라고 하셨습니다. 


38절에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38) 라고 하셨습니다.


43절에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43) 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여섯 가지 주제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살인과 분노, 간음과 성적 욕망, 이혼, 맹세, 보복, 사랑과 증오. 이렇게 여섯 가지 주제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결론을 이렇게 맺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마 5:48)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이 속해 있는 전체 단락의 개요입니다.

 

형식

 

말씀드린 여섯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산상수훈의 나머지 말씀들과는 달리 일정한 형식이 있습니다.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일관된 형식이 있습니다. “옛사람들에게 이러저러하게 말한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늘 구약성경을 공부하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했기에 율법의 의미를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옛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비슷한 패턴이 여섯 번 반복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살인과 분노, 간음과 성적 욕망, 이혼, 맹세, 보복, 사랑과 증오에 관한 여섯 가지 주제는 예수님 시대(BC1-AD2)에 실제로 유대교 안에서 논쟁이 되었던 신학 주제들이었습니다. (“IVP성경비평주석-신약”, p144)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받았던 유대교의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으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 밭에 있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잘못된 해석, 잘못된 관점, 잘못된 적용의 돌들을 뽑아내시고 올바른 해석, 올바른 관점, 올바른 적용의 씨앗을 뿌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 점이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 밭에 있는 돌들을 주님께서 제거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 마음 밭에 널린 돌들을 제거해 주십시오.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제게도 ‘너는 이렇게 들었다. 하지만 나는 네게 이렇게 말한다.’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제가 주님의 시각으로 오늘 말씀을 보게 하시고 들었던 설교, 들었던 설명, 제가 가졌던 잘못된 고정 관념을 모두 제거하여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는 올바른 자세입니다.

 

원칙

 

살인과 분노, 간음과 성적 욕망, 이혼, 맹세, 보복, 사랑과 증오에 관한 여섯 가지 계명은 예수님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계명에 더 마음이 쏠리시는지요? 예수님이 이 계명들의 본뜻을 설명해 주실 것이고, 또 이 모든 계명이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계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모든 계명의 공통적인 원칙입니다. 성경에 얼마나 많은 교훈이 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교훈들은 하나하나, 모두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교훈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통된 원칙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섯 가지 계명은 각각이 모두 중요하지만, 예수님께서 여섯 계명을 하나의 사례로 제시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례입니까? 본문 바로 앞의 말씀에 대한 사례입니다. 지난 주일의 말씀이었지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 5:20)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더 나을 수가 있는가!” 그 구체적인 사례로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계명을 제시하셨습니다. 


각각의 계명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너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살인과 분노에 관해서, 간음과 성적 욕망에 관해서, 이혼에 관해서, 맹세에 관해서, 보복에 관해서, 사랑과 미움에 관해서, …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예수님은 구체적인 계명을 통해 원칙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좀 어려운가요?)


예를 들어서, 만약에 어떤 그리스도인이 십계명 각각을 열심히 지킨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서도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법의 원칙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에 어떤 그리스도인이 각각의 계명에 목숨을 걸고 온 생명을 다해 열심히 준수한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인이 십계명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원칙,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대원칙을 알지 못한다면 그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처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각의 의미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것에만 너무 집중하고 열심히 지키느라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원칙을 놓치면 우리도 바리새인처럼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과 관련해서는 구체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원칙적인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항상 그렇습니다! 구체적인 것들보다 원칙이 더 중요합니다. 어쩌면 우리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의 세부적인 사항과 교훈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부적인 교훈들의 공통된 원칙입니다. 원칙이 분명하면 세부적인 사항들은 자연히 밝혀집니다. 원칙 안에서 세부적인 사항들은 자연스럽게 통합이 됩니다. 그런데 원칙이 분명하지 않거나 원칙에 관해 혼란스럽다면 세부적인 사항들도 혼란스럽게 되고 모순된 해석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성경 공부를 시작할 것이기에 이 점을 다시 한번 힘주어 강조합니다. 물고기를 잡아서 한 끼 때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물고기를 잡는 법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성경 해석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정황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제자들의 상황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두 세대 이상이 흘렀습니다. 당시 제국의 언어였던 아람어가 오늘날 영어처럼 국제 공용어였기에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람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이민 3세대면 모국어를 잃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도 어느덧 히브리어로 되어 있던 모세의 율법을 읽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일반 대중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받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경향성이 더욱 심화하여서 일반 대중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법을 직접 읽거나 들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의 상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백성들이 율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은 율법이 아니었습니다. 일반 대중이 율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하나님이 전해주신 참 율법이 아니라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을 통해서 전해진 율법의 구체적인 하나의 해석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고 하신 말씀의 배경입니다. 


중세 시대를 생각해 봅시다. 중세 시대에 라틴어 성경만 있었기에 일반 대중은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고 사제들의 강론을 통해서만 하나님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사제들이 독점함으로써 참 복음은 일반 대중에게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수십 독” 하셨다는 권사님이 기억납니다. 오래전 일인데요. 그 권사님이 휴거에 대해 제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권사님의 신앙 배경을 잘 알고 있던 저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하나님 말씀의 중요한 원칙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가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러저러한 구절들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성경의 중요한 원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라고 자세히 설명해 드렸습니다. 관련된 책까지 소개하고 읽어보시라고 빌려드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권사님은 끝까지 자기의 원칙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 권사님은 휴거를 강조하는 “극단적 세대 주의”를 신봉하는 교회 출신입니다. 평생 스스로 성경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읽은 관점이 아니라 평생 목사를 통해 들어온 관점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들었던 설교, 자신이 읽었던 신앙 서적, 자신을 지지해 주는 성경 선생들의 관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이 아니라 권위가 있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 어느덧 권사님 자신의 관점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표현으로 “영적 맹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원칙에 따라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라고 하시면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중요한 원칙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자가 아니라 정신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문자에만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문자가 아니라 정신이라고 갈파하셨습니다. 


그 예로 여섯 가지를 말씀하셨고 그 첫 번째로, 오늘 본문 말씀에 있는 살인을 예로 드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제 육 계명”(출 20:13; 신 5:17)을 온전히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계명을 문자로 지켰는지 모르지만 정작 하나님이 제 육 계명을 주신 정신은 잃어버렸습니다. 

 

살리는 계명

 

하나님이 왜 계명을 주셨습니까? 우리를 억압하고 죽이려고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계명을 주셨습니다. 왜 아담에게 인류 최초의 계명을 주셨습니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창 2:16–17) 하나님은 죽지 말고 살라고 아담에게 처음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계명을 억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계명의 정신을 놓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엄히 물어보셨습니다. “…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 (막 3:4) 바리새인들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안식일 계명의 정신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계명을 문자적으로만 지키는 바리새인들에게 직접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화가 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완악한 것을 탄식하셨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을 내밀어라!” 손을 내밀자마자 손이 펴지고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자기들의 원칙을 바꾸고 회개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율법의 정신을 다시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하였습니다! (막 3:6)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를 억압하거나 죽이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려고 주셨습니다. 이것이 계명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 3:6)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 문자로 지키는 사람들은 자기가 인간 동료를 칼로 찔러 죽이거나 독살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의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이 계명의 정신은 살인을 포함한 인간 동료에 대한 우리의 태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료 인간에 대한 나의 태도가 올바르고 사랑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율법의 정신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례로 드신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문자로 행하는 사람들은 배우자 외의 이성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명을 준수했다고 항변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간음은 마음과 마음의 욕심의 문제이지 육체적인 문제만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마음과 마음의 욕심이 “제 칠 계명”(출 20:14; 신 5:18)의 정신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손도 안 잡았기 때문에 자기가 깨끗하다고 착각하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형제자매를 죽도록 미워하면서도 자기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그리스도인은 자기는 주일에 돈도 쓰지 않고 TV도 보지 않고 주일마다 가정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자기는 안식일 율법을 준수하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산상수훈의 주님 말씀을 코미디로 만들어 버립니다. 폭력배에게 뺨을 맞고는 “더 때리세요”라고 하면서 다른 쪽 뺨을 돌려대며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계명을 행하는 짜릿함에 몸을 떱니다.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를 쓰다가 우울증에 걸려버리고 맙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늘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율법 조문으로만 알고 영으로는 알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계명의 목적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은 계명을 어떤 식으로 행합니까? 그런 사람들은 율법을 쭈욱 써서 벽에 걸어두는 식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리스트로 만들어서 책상 앞에 걸어 놓고 하나하나 체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 나는 하나님 앞에서 더 의로워졌구나!”라고 생각하며 뿌듯해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 이것은 … 하나님이 싫어하실 것 같은데!”라고 하면서 죄책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식으로 살면 율법학자나 바리새인과 다름이 없습니다. 의지가 강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지는 듯, 착각할 것이며 의지가 약한 사람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듯 착각할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율법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동안 배워왔던, 그리고 앞으로 배울, 특히 산상수훈에서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여 주신 사례들은 법전이 아닙니다. 율법의 리스트가 아닙니다. 그런 관점은 바리새인들이 보는 관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읽고 배우며 늘 마음에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은 율법의 목적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시는 목적입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의도가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계명에는 주님의 영과 주님의 정신, 주님의 품성이 완벽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 우리는 사실상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책상 앞에 붙여 두어야 할 것은 율법의 구체적인 리스트가 아닙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 마음에 써 붙여야 할 것은 말씀 한 구절 뿐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


이것이 계명을 주신 주님의 진정한 의도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고는 우리 주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사랑하시며 당신을 친히 나타내십니다. 이것이 계명을 주신 참되고 궁극적인 주님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읽습니까? 우리는 중요한 구절이라고 생각되는 문장에는 줄을 쳐서 표시 합니다.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친히 계명을 쓰셨다고 말씀하신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문장들이 적혀 있습니까? 살인과 분노, 간음과 성적 욕망, 이혼, 맹세, 보복, 사랑과 증오에 관한 계명의 목록이 적혀 있습니까? 물론 그런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 계명의 목록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의 빛으로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계명이 아니라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시각으로 우리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이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우리 마음에의 벽에는 구체적인 계명이 아니라 아래와 같은 목록이 적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였는가? 오늘 나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고 우선 순위가 되셨는가? 오늘 나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 살았는가? 오늘 하루, 나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며 살았는가? 아니면 이것 저것 걱정하다가 시간을 보냈는가! 내 속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날로 더한가? 아니면 헛된 욕망이 스믈스믈 자라가는가!”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하나님 법과 예수님의 계명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참되고 살아 있는 사랑의 관계로 이끌어지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율법에 주목하기 보다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영이지 율법 조문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몇가지 권면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경건의 훈련은 매우 중요합니다. 훈련 없이 성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을 훈련시키셨고, 사도들도 훈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딤전 4:8)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경건의 훈련도 우리가 앞에서 말씀드린 계명과 관련된 주님의 원칙대로 하지 않으면 오히려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를들어 금식과 기도는 유익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훈련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위험성이 있습니다. 만일 금식과 기도가 우리를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로 이끌어 주지 않으면 절대 무익하며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 원칙에 따라 정렬되지 않으면 우리에게 모든 것이 절대 무익합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제가 설교를 열심히 준비하여 주일에 여러분 앞에 서서 불을 뿜는 설교를 한다고 해 봅시다. 만약에 설교를 행하는 저와 설교를 듣는 여러분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이른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이 시간”에 임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종교적인 행위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하나님이 절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날마다 성경을 읽으십시오. 날마다 기도하십시오. 때로는 금식하며 온 힘을 다해 예배 하십시오. 하지만, 이 모든 종교적 행위를 문자가 아니라 영에 따라 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의 권면이며 사도들의 권면입니다.

 

결론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을 문자가 아니라 영이요 생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시각은 율법 조문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에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말씀 자체가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을 때 우리는 바리새인이 됩니다.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돌들을 솎아 내시고 생명의 씨앗을 뿌리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날마다 그렇게 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이 원칙을 지켜서 저와 여러분이 주님께서 심판하실 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자녀로 발견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엡 4:13)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에게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을 만나는 축복이 날마다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https://youtu.be/LB8UHoaTK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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