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확신 (요일 3:18-20)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진리에서 났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신 분이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일 3:18–20)
저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최근에 저에게 주신 더 큰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더 큰 믿음의 확신입니다. 더 큰 확신을 주시자, … 제 인생을 가로막고 있던 큰 산 몇 개가 바다로 던져졌습니다. 저는 확신이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큰 은혜 중의 하나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확신 없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가 없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롬 8:37)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미안함과 죄책감이 아니라 믿음의 확신과 담대함으로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서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 예배할 수가 있었습니다. (엡 3:9; 히 10:19-22)
오늘 사도는 성도의 확신, 그리스도인의 확신과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에 대한 담대함과 확신이 사라지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삶의 기쁨도 함께 사라집니다. 기쁨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기쁨이 없이 어두운 얼굴을 하고, … 어깨가 축 처진 모습으로, … 자기 인생의 무게조차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듯한, … 그런 모습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버지의 사랑과 확신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면 우리가 진리에서 났음을 알게 되고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진실함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리에서 났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진리”라는 말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 참고서 “용어 해설”의 “진리”를 참조하세요.)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와 우리말 사전에 있는 진리가 아주 다릅니다. 우리말에서 진리는 (영어도 마찬가지입니다만 … ) “참된 이치, 즉 모든 사람이 옳다고 인정할 수가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을 의미합니다. 도덕적 법칙이든지 자연의 법칙이든지, 철학적 법칙이든지 … 그 법칙이 항상 작동하고 모두가 인정할 수가 있는 법칙이라면 그것을 우리는 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진리는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강남호라는 존재가 약속을 잘 지키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 강남호는 진리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진리”보다는 “진실하다”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하나의 예입니다.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진실함이 원어 상으로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행동과 “진리 안에서; in truth”(ESV)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상황에 따라 “진리”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진실”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혹은 “성실”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또, 여기서 “진실함”은 18절에서 나오는 “진리”라는 단어와 같습니다.
계속 설명하겠습니다. 강남호라는 사람 안에 약속이라는 속성이 있다면 진리를 품고 있다. 혹은 진실하다, 혹은 성실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말이나 영어에서 진리 혹은 truth라고 말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지요. 그래서 어떤 존재가 진리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면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속성이 없으면 신뢰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어휘에서 진리는 믿음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믿음의 중요한 요소는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진실한 벗, 진실한 말, 진실한 약속, 진실한 친구, 참된 증인 등의 표현이 많이 나오고, 이 모든 것이 원어 상에는 “진리”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물이나 존재 중에서 가장 진실하고 참된, 진리로 온통 가득 차 있는 존재가 누구일까요? (하나님!) 그래서 성경은 항상 완전한 진리, 곧 가장 믿음직한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확실하게 이해가 되시지요?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은 진리이다.” 식의 표현이 많이 나오게 되고, 이런 경우에는 오해를 피하고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언약에) 성실하시다.” 혹은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에게) 진실하시다”라고 번역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시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많은 말씀들의 의미가 더욱 선명하게 살아납니다.
성경에서 영적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과 관련된 말이지 않습니까! 영원한 것은 하나님에게만 존재하는 속성이며 하나님과 관련된 것만이 영적입니다. 진리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도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된 말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설명이 길어졌습니다. 진리의 의미를 알고 본문 말씀을 다시 보면 더욱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곧, 진실함으로 사랑한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여기서 진실함은 19절에 나오는 “진리”라는 말과 똑 같은 단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 우리가 사랑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실하신 것처럼 또는 진실하신 것처럼 형제자매를 사랑하기를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진리 안에서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19절에 나오는 “우리가 진리에서 났음을 알게 된다”라는 말씀도 이제는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이 말씀은 곧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다는 말씀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확신의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제 중요한 성경 어휘 하나를 이해하였으니 본문 말씀을 다시 봅시다. 18절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바입니다.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하는 동시에 어떻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진실함으로! 진리 안에서!)
사도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형제자매를 그렇게 사랑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왜 요구하십니까? 그래야만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가 있고(18),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19-20)
이것이 주님의 계명이며 사도의 교훈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는 예수님의 이 계명 안에 성경 전체에 있는 하나님의 온 계명이 있음을 믿고 주님의 이 계명을 실천하였고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세상에 빛으로 드러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하였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에 따라 서로서로 형제자매에게 믿음직한 존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신 것처럼 우리도 말과 약속에 신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변함없이 성실한 것처럼 우리도 형제자매에게 성실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구주 예수님은 말이나 혀가 아니라 행동과 진실함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형제자매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계명이며 사도의 교훈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는 예수님의 이 계명 안에 성경 전체에 있는 하나님의 온 계명이 있음을 믿고 주님의 이 계명을 실천하였고 주님의 말씀대로 세상에 빛으로 드러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하였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오늘 본문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보느냐를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면 우리 스스로 우리가 진리, 곧 하나님으로부터 났음을 알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임을 스스로 알고 확신하고 기뻐할 수가 있습니까?
사도의 교훈은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형제자매를 사랑하면 알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세상이 보기에 그리고 우리 스스로 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의 증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증거가 됩니다. 어떤 증거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다.”라는 증거가 됩니다.
완전한 용서와 확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계명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요 15:12) 그런데 우리 중 누가 이 계명을 행동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선한 열망이 있으면 어느 정도는 지킬 수는 있겠지요.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만지셔서 주님의 형상으로 빚어가시면 빚어 가실수록 점점 더 잘하게 되겠지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되어가면 될수록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지킴으로써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더욱 기쁘게 해 드릴 수 있겠지요!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바보이거나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면 이 땅에서 내가 주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켰다고 그 누가 자신 있게 아버지 앞에서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주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또 노력하더라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한 양심(히 9:14)은 우리를 끊임없이 우리를 고발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상태였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사도 바울의 상태였습니다.
이 지점에 우리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계명의 기준을 낮출 생각이 전혀 없으시고, 우리는 계명을 온전히 지킬 길이 전혀 없습니다. 행동하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행동 이전의 진실함을 먼저 보십니다. 우리가 바리새인처럼 행동으로 계명을 지킬 수가 있어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진실한 마음마저 요구하십니다. 우리 중 그 누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온 힘을 다해 계명을 지키더라도 우리 마음의 죄책감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딜레마였고 사도들의 딜레마였고 우리의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이 딜레마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확신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확신이 아니라 혼란스러우시다면, …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뭔가 우울하고 활기가 없다면, 여러분이 영적 침체라고 이름 붙여진 질병을 앓고 계신다면 오늘 말씀은 그 질병의 원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신 분이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0)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싶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우리에게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20a)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가책은 해소될 수가 없습니다. 아직 우리는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도는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확신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자녀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자녀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 속의 선함만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 속의 악함도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은 우리에게 선함만 있다거나 우리의 선함이 악함보다 절대적으로 우세하다거나 앞으로 온전히 우리가 완전해질 것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거나, …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 자녀를 바라보시는 시선에는 부정적인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바라보실 때 완전한 긍정의 시선으로 바라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자녀의 모든 것을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으로 과거에 부르셨고, 지금도 부르시고, 앞으로도 부르신 모든 자녀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절정이며 하나님 은혜의 근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불완전함에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하며 가장 든든한 토대입니다. 하나님 은혜, 하나님 사랑만이 우리 삶의 기초가 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내 힘으로 이루었다고 착각하는 뻔뻔한 확신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더욱 감사로 충만한 겸손한 확신입니다. 제자 훈련 과정의 소위 “구원의 확신”과는 다릅니다. 몇 문장을 억지로 믿음으로써 얻는 값싼 구원의 확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기도 응답(21-22)과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자녀에게 베푸시는 큰 확신입니다. (23-24)
이러한 확신은 모든 하나님 자녀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축복입니다. 이러한 축복없이 어떻게 어둠의 세상을 살아가며 주님 오실 그때까지 끝까지 인내할 수가 있겠습니까!
양심의 깨끗함과 아버지의 용서
우리가 아무리 오래 믿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래에는 우리 모두가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엡 4:13)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행하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됩니다. (마 5:3, 4, 6) 이러한 것이 하나님 백성의 특성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성으로써 마음이 깨끗한 사람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것입니다. (마 5:8)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끊임없이 사람의 양심을 하나님 앞에서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계명을 지키면 비록 우리가 온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항상 마음이 청결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의 양심을 떳떳하고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의 양심은 떳떳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끊임없이 우리 양심을 두드리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큰 확신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처럼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음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까? 2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이 있습니까? 담대하게 하나님께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간구드릴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양심이 깨끗합니까?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죄라는 벽이 아직까지 있습니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의 피로 영원히 당신의 자녀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을 하나님 자녀로 입양하시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골 1:13)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모르는데 어찌 확신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은혜 안에 머물지 않는데 어떻게 확신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는데 어찌 그 확신이 진짜일 수가 있겠으며, 은혜를 모르는 자가 어찌 그리스도인일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사해 주셨다고 해서 우리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빌미삼아서 죄를 짓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롬 6:15)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해방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자유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되 깨끗한 양심으로 지키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면 우리의 삶에 확신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받을 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알 수록 더욱더 죄를 미워하고 우리를 건져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의 계명을 행하기를 기뻐하며, 주님의 기쁨께서 기뻐하시면 그것이 바로 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바로 이러한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주님이 원하시는 일, 곧 계명을 행하는 일을 하기에 아버지께 담대하게 간구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기쁨으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살고 싶어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마귀가 아니면 누가 이 진리의 말씀을 부정하겠습니까?
결론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날마다 죄를 씻으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주님의 계명을 행하십시오. 두 가지 모두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에게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확신은 우리가 잘하고 있다는 바리새인의 교만한 확신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의 피를 믿고 있으니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값싼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의 확신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대한 응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더러운 양심을 깨끗하게 하신 사랑하는 자녀에게 주시는 은혜의 응답입니다. 그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고, 담대하게 기도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이러한 확신의 은혜를 저와 여러분은 꼭 누려야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본문 말씀에 이어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요,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요일 3:21–22)
이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의 계명을 행해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죄를 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떠난 어둠을 버리고 항상 밝은 빛 가운데서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다 함께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다음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요일 1:7–9)
하나님은 날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인생을 리셋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전히 밝은 빛 가운데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도를 닦는 인생이 아니라 날마다 빛 가운데 걸어가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빛 가운데 길을 걸어가는 자가 됩니다. 빛 가운데 걷는 길의 끝은 생명입니다. 하지만 그 길에서 벗어나면 그 길의 끝은 죽음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씀하신 이 “빛의 길”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좁은 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절대로 불확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연약하여 갈대처럼 흔들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더욱 크시고 위대하십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사랑의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영원히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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