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과 욕심 (마 5:27-30) / 산상수훈 16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계명과 욕심 (마 5:27-30)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천천히 눈으로 따라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간음하지 말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 네 오른 눈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빼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찍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마 5:27–30)
다시 산상수훈 말씀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법, 곧 율법에 관한 여섯 가지의 사례를 들고 계십니다. 지난번에는 살인에 관해 말씀하셨고 오늘은 두 번째로 간음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참된 의미를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살인에 관해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살인하는 행동이 아니라 살인하는 마음이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살인하는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마음의 분노나 미움이 살인을 낳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행동도 조심해야하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형제자매에게 성을 내거나 욕하거나 형제자매를 무시하는 것은 살인과 다름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도 비슷한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하심으로써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의 참된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간음이라는 행동은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특별히 간음이라는 행동의 뿌리에 욕심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
이로서 우리는 우리 죄의 뿌리에 우리의 욕심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어서 하신 말씀은, 아마도 우리 그리스도인이 죄를 다루는 방식과 관련된 말씀 같습니다. “눈을 빼서 내버려라. 손을 찍어서 내버려라.”라고 하셨습니다. 극단적으로 보이는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죄를 “극단적으로” 다루어야 함을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선 이 말씀이 결혼 관계에서의 간음의 문제를 다루고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할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간음”은 결혼 관계에서의 간음 뿐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영적 간음”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영적 간음이 매우 중요한 주제이기는 해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간음은 결혼 관계 내에서 발생한 간음입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이 교훈이 결혼 관계 내에서 발생한 간음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또 하나 더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남자의 경우만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대부분 신약성경의 교훈을 적용할 때와 같이 간음에 관한 교훈도 남자여자 구별 없이 적용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들 동의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자, 그럼, … 하나하나 주님께서 주시는 간음에 관한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죄의 통로를 막아라
먼저, 주님은 죄의 통로를 틀어막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할 가능성을 차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죄를 지을 가능성을 차단하되 극단적인 조처를 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라고 하셨습니다. 지옥을 언급하시는 것으로 보아서 예수님은 간음이 그리스도인의 구원과 관련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쉽지 않은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환경을 바꾸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해야 할 가능성까지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 힘으로는 이성을 보고 욕심을 품는 것이 불가능하니 아예 그 가능성을 차단해 버려라.”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러한 말씀에 순종하기 전에 물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주님은 명백하게 대답하십니다. “간음은 너희를 영적 죽음으로 인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남녀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 된 것과 같은 영적 신비를 품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엡 5:31-32) 만약에 결혼이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 되는 영적 신비를 품고 있다면 결혼 관계를 깨뜨리는 간음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깨뜨리는 영적 간음과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분명한 것은 성경은 결혼 관계를 깨뜨리는 간음을 죽을죄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돌이켜보면 성경 전반에서 하나님은 간음 문제를 특별하게 다루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주변 세계에 비해 하나님의 왕국에서 간음죄는 남녀를 불문하고 돌러 쳐 죽여야만 하는 중죄로 취급되었습니다.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 곧 자기의 이웃집 아내와 간통하면, 간음한 두 남녀는 함께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레 20:10)
왜 이렇게까지 하실까요?
죄의 뿌리
우리는 죄만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의 뿌리까지도 보십니다. 우리는 죄를 피상적으로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의 뿌리를 알고 계십니다. 인간 죄의 뿌리에는 욕심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으로 돌아가 봅시다. 마귀의 말을 들은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았습니다. 보았더니 나무의 열매가 갑자기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하고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도 보였습니다.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 순간 하와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열매를 따 먹고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만약에 그 순간에 하와의 마음속에 뿌려진 욕심이 더는 자라지 않도록 꺾어버렸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하지만 하와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 순간 하와의 욕심은 영적 간음이 되었습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 3:5) 아멘!
에덴동산 이야기처럼 죄의 근원에는 항상 인간의 욕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늘 말씀에서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여자, 혹은 남자를 보는 것이 문제겠습니까? “참 아름답다”라고 하며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피조물을 마음으로 감탄하는 것이 문제겠습니까? 물론 배우자나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드러내어 말하면 또다른 문제가 되기는 하겠지요!
놀람과 감탄, 아름다운 것을 보고 기뻐하는 그 마음이 부러움으로 발전하거나 욕심으로 발전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을 의도로 발전하는 데서 죄의 문제가 시작됩니다. 그 단계가 되면 그 어떤 인간도 자기 욕심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고로 믿음의 선배들의 지혜는 초전에 박살을 내라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새들이 머리 위로 나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권면입니다. 머리에 스쳐지나가는 죄를 막을 수는 없지만 내 머리에 둥지를 틀지 않토록 초전에 박살 내는 것은 가능합니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논의를 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야 하지요?”
요셉 이야기가 많은 교훈을 주지만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 직면한 혈기 왕성한 젊은이의 대처는 참으로 본받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윗 왕이 요셉을 본받을 수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요셉은 여자 때문에 낭패를 당했습니다. 몸이 달아서 젊은이의 몸뚱이를 탐하려는 여자의 손길을 뿌리치다가 그만 겉옷이 벗겨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시원한 이집트 궁전을 가득 채웠을 아름다운 여인의 향취를 생각합니다. 동시에 권력을 가진 사악한 여자의 말을 듣지 않을 때 따를 수 있는 현실적인 위험을 생각합니다. 요셉의 젊은 몸이 갈망하는 채워지지 않은 건강한 욕구를 생각합니다. 이제는 어려움에서 벗어나서 수면욕과 식욕은 충족되었으나 그런 경우에 성욕이 어떤 힘을 가지고 요셉의 마음을 휘몰아갔을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누가 악의 손길을 뿌리치고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계속되는 아름다운 여자의 유혹 가운데서 요셉이 한 말은 오늘 본문 말씀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요셉은 거듭되는 유혹을 거절하며 보디발의 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인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맡겨 관리하게 하시고는 집안 일에는 아무 간섭도 하지 않으십니다. 주인께서는 가지신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기셨으므로 이 집안에서는 나의 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의 주인께서 나의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마님입니다. 마님은 주인 어른의 부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런 나쁜 일을 저질러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창 39:8–9)
“그런데 내가 어찌 이런 나쁜 일을 저질러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요셉이 죄를 뿌리칠 수가 있었던 것은 사회적인 불이익에 대한 걱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육체의 욕망이 남보다 적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욕망을 제어하는 의지가 남보다 커서도 아니었습니다. 자기에게 잘해 준 보디발에게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집트의 도덕보다 우월한 하나님 백성의 도덕성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가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요셉의 뛰어난 점은 죄의 본질이 사람과의 관계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찌 이런 나쁜 일을 저질러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께 짓는 죄입니다.
반면에 다윗 왕의 경우에는 실패한 경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을 경외했던 다윗의 초심은 그때 어디에 어디에 둔 것입니까? 그 일 때문에 다윗은 영적으로 죽을뻔 하였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문자 그대로 지옥에 던져질뻔 하였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군대가 멀리서 암몬 족속과 싸우고 있는데 다윗은 마땅히 깨어서 기도했어야만 했습니다! 영적으로 긴장하고 바짝 깨어서 기도해야 할 그 시간에 왕은 한가로이 왕궁 옥상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야릇한 밤의 향취를 즐기다가 우연히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하는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눈으로 보았을 때, 그 욕망이 미쳐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 전에 그 싹을 싹둑 잘라버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욕망의 씨앗에 스스로 물을 주고, 키우고, 욕망이 열매를 맺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요셉은 시험이 다가올 때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시험이 다가올 때 하나님 경외를 잊어버렸습니다. 이전에 얼마나 계명을 잘 지키고 얼마나 하나님을 두려워했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도 간음이라는 시험 앞에 한 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신할 수가 없습니다. 간음의 경우 자신감이 있는 사람일 수록 더 위험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라고 하셨습니다.
현대인의 두려움 가운데 행복하지 못할 두려움이 가장 크다고 하겠습니다. 특별히 성적인 행복에 대한 집착과 기대는 굉장한 것 같습니다. 가장 본능에 가까운 수면욕과 식욕이 충족된 현대인은 성욕을 과대 평가하고 높이며 우상으로 삼는 경향이 분명히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기에 자신의 성욕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올바로 평가하고 정당하게 다루어서 빛 가운데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성욕은 과대평가해서도 안되며 과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성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은혜임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정당하게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크면 클 수록 은혜가 주는 위험도 크다고 하겠습니다. 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이기에 성을 잘못 다룬다면 가장 위험도 크다고 하겠습니다. 미혼 청년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고 하겠습니다. 오죽하면 결혼도 안한 사도께서 이같이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낫습니다.” (고전 7:9)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드리는 권면은 성경에 나오는 것은 아니며 개인적인 권면입니다.
가능하면 주어진 대로 사십시오. 주님의 축복 가운데서 성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여건을 주셨다면 마음껏 누리고 기뻐하며 즐기십시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온유한 마음으로 순복하시고 하나님이 주실 은혜를 기대하고 이미 주신 은혜를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성에 대한 욕구가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라면 하나님께서 방안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며 항상 빛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로서 올바른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죄의 뿌리에 우리의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욕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골 3:5)
야고보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약 1:14–16)
야고보 선생님의 이 교훈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말씀의 전후 문맥을 통해 야고보 선생님은 사람이 죄를 짓는 일에 하나님의 책임은 전혀 없음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우리의 선택입니다. 무엇이라고 핑계를 대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 내가 죽을 죄를 지을 그 때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느냐고 항변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와가 열매를 먹을 그때, 다윗이 범죄하는 그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크고 작은 죄를 지을 그때, 분명히 성령께서는 우리를 경고하십니다. 다만 그때, 우리는 때로 우리의 연약함을 핑계 대기가 쉽습니다. 요셉은 악을 뿌리치고 빛으로 달려갔지만 죄인은 성령의 권고를 뿌리치고 죽는 줄도 모르고 어둠으로 달려갑니다. 요셉은 세상의 궁전에 옷을 남겨 두었지만 죄인은 사랑으로 붙잡는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죽음을 향해서 전진하여 갑니다. 죽는 길인 줄도 모르고 어리석은 길로 갑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속지 맙시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교훈 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죄를 멀리하는 좁은 길을 택해야 합니다.
결론
우선 비교적 젊은 지체들에게 권면합니다. 이 말씀을 명심하고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 넣으십시오. 이것이 거룩한 하나님 자녀의 마땅한 일입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대는 젊음의 정욕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좇으십시오.” (딤후 2:22)
모든 지체들께 권합니다. 혹시 과거에 간음과 관련된 죄를 지으셨다면, 그 흔적이 아직 여러분의 양심에 남아 있다면 회개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하십시오. 간음은 죽을 수도 있는 죄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간음보다 큽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간음으로 죽게 된 여인을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죽을 죄가 있고 죽음에 이르지 않을 죄가 있지만 간음은 용서받을 수 있는 죄임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주님의 사죄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요 8:11) 아멘!
모든 지체들께 권합니다. 간음의 죄를 특히 조심합시다. 하나님의 계명을 가볍게 생각하고 자신이 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교회가 파괴될 뻔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고전 10:12) 누구나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사도는 “나이가 많은 여자는 어머니를 대하듯이 권면하고 젊은 여자는 자매를 대하듯이 오로지 순결한 마음으로 권면하십시오.” (딤전 5:2) 선을 지킵시다. 우리는 가족입니다. 여동생의 몸과 마음은 오조지 여동생 미래의 배우자의 소유입니다. 어머니의 몸과 마음은 오로지 아버지의 소유입니다. 우리는 형제자매를 뜨겁게 사랑하되 가족으로서 사랑합시다!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제10계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만지지 맙시다! 보지도 말고 탐내지 맙시다. 거룩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다른 형제자매에게 주신 것은 보지도 말고 탐내도 맙시다. 탐심이나 질투는 교회의 적입니다. 형제자매에게 주신 은혜로 기뻐하고 동시에 나에게 주신 은혜로 감사합시다. 남의 것은 남의 것이고 나의 것은 주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니 더욱 소중히 여기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마음껏 즐깁시다.
“나는 내가 받은 은혜를 힘입어서, 여러분 각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 (롬 12:3) 아멘!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우리도 자녀이기에 죄를 미워해야 마땅합니다. 주님을 만나기를 소망하는 자마다 그렇게 합니다. 정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거룩을 멸시하지만 좁은 길을 걸었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구름떼와 같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3:2–3) 아멘!
우리의 생명은 천하보다도 귀합니다. 우리의 목숨은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무엇을 잃어버리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죄를 가볍게 여긴다면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멸시하고 사랑하는 주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입니다. 우리 눈이든지 우리 손이든지 우리에게 속한 그 무엇도 우리 생명보다 귀하지 않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막 8:34–38)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욕망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의 더러운 욕망은 거룩한 욕망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좇아서 행합시다. 날마다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되도록 준비합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저와 여러분 모두가 흰 옷을 입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도록 단장하고, 그 무엇보다도 거룩한 기름을 준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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