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과 간음 (마 5:30-31) / 산상수훈 17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혼과 간음 (마 5:31-32)
오늘은 이혼에 관한 주님의 교훈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는 사람은 그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어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을 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사람은 그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요, 또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간음하는 것이다.” (마 5:31–32)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율법에 관한 여섯 개의 교훈을 베풀고 계십니다. 첫 번째는 살인에 관한 교훈이었고 두 번째는 간음에 관한 교훈이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로 이혼에 관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주님은 간음을 이혼과 연관시켜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점이 특별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내가 간음하지 않았는데도 아내를 버리면 이는 아내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러한 이유로 이혼당한 여자와 결혼하면 그 남자도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순종하기 위해서 세 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구약 시대의 율법은 이혼에 관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둘째, 시대가 흘러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떻게 해석했으며 이혼에 관해서 무엇을 가르쳤는가? 셋째, 예수님은 이혼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이렇게 역사적인 정황의 순서대로 오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구약 시대의 상황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는 사람은 그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어라.” 이 말씀은 신명기 24장 1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잘못 배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신 24:1)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약성경에서 간음이 이혼과 관련된 사례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 구약 시대에는 간음이 이혼과 관련될 수가 없었을까요? 간음은 곧 사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규정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간음한 사람은 이혼으로써 인생이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 사형을 당함으로써 끝장이 났습니다.
그렇다면 신명기 24장 1절에서 모세는 왜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주고 이혼할 수가 있다고 하였을까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19장에서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여 준 것이지 본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마 19:8)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당시 사람들은 여자를 매우 하찮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모든 것이 바뀌었죠. 세상 사람들은 절대 이해할 수가 없을 텐데, …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도 덩달아 높아집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을 높이자, 종과 여성의 인권도 함께 높아졌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진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도는 이후에 다음과 같이 진술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갈 3:28)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애초에 인류에게 의도하신 평등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구약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싸움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남편이 아내를 버릴 권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내들은 별것 아닌 이유로 버림을 받았습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남자들은 아내를 여럿 거느리는 선택을 하였지만 많은 평범한 사람이 아내를 버리고 새로운 아내를 맞았습니다. 물론,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이혼의 동기 중 많은 경우가 음욕(색욕)이었습니다. (산상수훈 말씀에서 주님께서 음욕에 관한 말씀에 이어 오늘 말씀을 하신 것은 흥미롭습니다. 실제로 어떤 학자들은 간음에 관한 앞 본문과 오늘 본문을 하나의 문단으로 취급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은 당시의 상황을 크게 호전하였습니다. 여성과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인권을 부여하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고통을 경감하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크게 다음 세 가지의 효과를 낳았습니다.
첫째로, 모세의 율법은 이혼을 크게 제한하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이후로 남편들은 사소한 이유로는 아내를 버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모세의 율법은 여성을 보호하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율법 이후로는 말만으로 이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간음으로 이혼 당했을 것이라는 헛 소문으로부터 아내들은 보호를 받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혼 증서는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들이 서명을 해야 했습니다. 이후로 이혼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법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모세의 율법은 결혼의 신성한 가치를 높이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이혼한 여자와는 다시 결혼할 수가 없었기에 결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공동체의 가치로 남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은, (모세의 율법뿐만 아니라 구약의 모든 율법은) 오늘날의 관점이 아니라 당시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에게 행하신 일종의 타협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율법은 시대에 따라 변경되기도 하였고 어떤 율법은 폐지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시대 상황과 하나님 백성의 상황에 따라 그 요구가 적절하게 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율법을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여 자기의 죄악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 (출 2:23-27)와 같은 율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복수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씀은 복수에 관한 율법이 아니라 과도한 처벌을 방지하라는 율법입니다. “눈은 눈으로만 그쳐야 한다. 이는 이로만 그쳐야 한다. 너희에게는 서로의 잘못에 대하여 과도한 처벌을 할 권리가 없다”라는 것이 율법의 본래 정신이었습니다.
이혼에 관한 율법도 사람들은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여 자기의 죄악을 합리화하였습니다. 신명기 율법의 목적은 이혼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과도한 이혼을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혼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의 법을 이용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의 사회 상황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좀 더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상황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특정한 조건에 부합하는 경우에 모세의 율법이 이혼을 명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모세의 율법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이혼을 명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혼을 억제하기 위해 “이런 조건에서만 이혼이 가능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든지 이혼을 쉽게 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신학적인 논의는 이혼이 가능하다는 것을 당연한 전제로 놓고, 이런저런 이혼의 조건에 관해서만 논했습니다.
오히려 이혼이 훨씬 더 쉬워졌습니다. 당시에 이혼하려는 남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혼 증서를 써 주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은 이혼에 관한 조건에 관해 서로 싸우고 있었지만, 일반 대중은 언제나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입장에 맞는 주장만을 쉽게 받아들이고 자기 뜻에 맞게 적용하였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이혼하라는 것도 아니고 이혼을 극도로 신중하게 결정하라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은 이혼 증서에 기록하는 이혼 사유가 어떠하든지, 단지 이혼 증서를 줌으로써 자신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은 여자들은 고통을 받았고 수많은 아이가 상처를 입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당시에 독신 여성이 먹고 살길은 매춘 밖에는 없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이런 형편이었기에, … 남자들이 신학적인 이유로 서로 싸우고 있는 사이에 수많은 여인과 아이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음행을 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사람은 그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요, 또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간음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자세한 내용이 마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됩니까?”라고 바리새인들이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바리새인들을 놀라게 했던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침 중에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한 까닭이 아닌데도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 드는 사람은, 누구나 간음하는 것이다.” (마 19:9) 그러자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제자들은 깜짝 놀라서 다음과 같이 반응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가 그러하다면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 19:10) 예수님의 이혼에 관한 견해는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놀라게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주님께서 강조하신 첫째 원칙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여시는 새로운 시대에는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원론 이전에 창조론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세상의 견해를 따라서는 안 됩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모든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논의를 창조의 원리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우리의 성향이 보수주의자든지, 진보주의자든지, 좌든지, 우든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일정한 경향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성향과 맞는 견해를 보고 들으며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성향이 어떠하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따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믿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사도는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롬 12:2)
예수님께서는 결혼과 이혼과 같은 인간사 훨씬 이전의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의 민법이나 국가법이나 유대 신학자들의 이런 저런 법적인 해석을 완전히 무시하시고 하나님이 애초에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도록 하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을 먼저 생각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는 것과, 그리고 그가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서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것을 너희는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마 19:4–5)
그리고 예수님은 이혼에 관한 바리새인의 질문에 당시의 모든 바리새인, 힐렐학파에 속하였든, 샴마이 학파에 속하였던, 모든 율법학자와 바리새인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도 깜짝 놀랄만한 결론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 말씀과 완전히 부합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 19:6)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이혼이나 간음이나 기타 결혼과 관련된 인간사의 모든 문제점을 소환하여 하나님의 법정에 세우셨습니다. 보수주의자들은 어떻게 하면 원칙을 지켜서 공동체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지를 고민합니다. 진보주의자들은 어떻게 하면 인권과 자유를 신장시켜서 개인의 행복을 증진할 수 있는지를 고민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항상 인간사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법의 관점에서 바라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돕는 배필로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남녀가 한 몸이 되어서 부모를 떠나 독립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행복과 하나님의 기쁨을 만족시키는 창조의 원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인간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적인 견해들을 소환하여 하나님의 뜻이라는 관점으로 판결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견해는 항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기쁨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에게 당신의 관점을 가지도록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혼 사유 가운데서 오직 음행만이 이혼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사유가 되는 것입니다. 음행이라는 용어가 성경에서 다양한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결혼한 부부 한쪽의 일방적인 부정을 의미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한 까닭이 아닌데도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 드는 사람은, 누구나 간음하는 것이다.” (마 19:9)
오늘 본문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을 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사람은 그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요, 또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간음하는 것이다.” (마 5:32)
이 말씀은 상대방이 혼외정사를 하면 무조건 이혼하라고 명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혼증서를 주고 이혼하라고 명하셨다고 오해한 바리새인들과 같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한 죄인을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배우자가 회개한다면 마땅히 용서해야 합니다. (마 6:14-15) 이 말씀은 음행하면 무조건 이혼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음행은 결혼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일방적으로 깨뜨린 것이기 때문에 결혼의 언약이 무효화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결혼과 관련된 모든 것은 한 몸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 연관 지어야 합니다. 간음한 사람은 한 몸 되게 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결합을 깨뜨리고 다른 몸과 새로운 결합을 이룬 것입니다. 성격이 맞지 않다거나, 너무 자주 싸운다거나, 결혼 생활이 스트레스가 너무 크고 전혀 행복하지 않다거나, 사랑이 완전히 식어버렸는데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거나, …. 이런 것들은 이혼의 사유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과 간음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간음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신성한 결합을 자신의 의지로 깨뜨린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이혼의 명령이 아닙니다. 하지만 간음은 이혼의 유일한 근거가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면 신약성경의 많은 교훈들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음행과 간음은 확실히 사소한 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간음은 부부간의 연합뿐만 아니라 주님과의 연합을 깨뜨리는 영적인 죄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사도들의 교훈에 따르면 혼인이나 성교나 섹스나 정사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다가 창녀의 지체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창녀와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영이 됩니다.” (고전 6:15–17)
교훈
오늘 말씀은 교훈을 몇 가지로 정리하겠습니다. 먼저 당시에 명백한 것부터 시대순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우리 주님께서는 간음하면 돌로 쳐 죽이는 임시적인 율법을 완전히 폐지하셨습니다. 이후로 하나님 백성이 간음으로 사형을 당하는 일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여 주신 것처럼 하나님 백성이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용서하여 주십니다.
둘째로, 우리 주님께서는 간음이 합법적인 이혼 사유가 됨을 확실히 하셨습니다. 이혼을 권장하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이후로 하나님 백성 중에 음행이나 간음은 하나님 나라에서, 교회 공동체에서, 한몸된 언약의 축복에게 확실하게 배제해야 함이 더욱 확실해 졌습니다. (계 2:22; 21:8)
더 나아가서 우리 주님께서는 율법을 해석하는 중요한 원칙을 말씀하심으로써 우리 삶의 다양한 측면에 하나님의 법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에 관한 중요한 원칙들을 가르쳐 주신 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로 돌아갈 운명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에덴의 동쪽을 뒤로하고 다시 에덴 동산으로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복잡다단한 현대인의 삶에서도 결혼은 여전히 중대한 문제들의 뿌리가 되고 있습니다. 작게 잡아도, 결혼, 별거, 이혼, 혼외정사, 자녀 문제, 등이 있으며, … 크게 잡으면 혼전 성교, 성중독, 포르노, 자위행위, 노년의 이성 교제 등 수없이 많은 인간 생활의 다양한 측면에 우리 그리스도인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의지해서 형제 자매 여러분께 몇 가지를 권면드릴까 합니다.
첫째, 앞으로는 결단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서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의 빛으로 여러분이 고치거나 바꾸거나 바로잡아야 할 일을 보여 주시면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즉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요일 1:7) 아멘!
남들이 다 어떻게 생각한다거나 남들은 다 이렇게 살고 있다는 등은 주님 앞에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비겁한 변명일 뿐입니다. 세상의 말도 듣지 마시고 심지어 목회자의 말들도 참고는 하시되, … 듣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존경하고 따르는 설교자들의 말도 무시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저의 지나친 이런 말은 단지 이 말씀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비치시는 말씀의 빛에만 순종하십시오. 회개케 하시면 회개하시고 즉시 죄에서 떠나서 새로운 삶을 사십시오. 주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용서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요 8:11)
둘째,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죄인지 아닌지, … 애매한 점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죄의 문제는 애매하다고 해서 대충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여쭈어보아야 합니다. 이 말 저 말에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스스로 확정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나아와서 당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묻는 자에게 반드시 지혜를 내려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하나님의 백성은 흰 두루마리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양심으로 확정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성경의 많은 사도들의 교훈에서 애매한 문제에 대한 말씀은 매우 분명합니다. 각자의 마음으로 확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대가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간직하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의심을 하면서 먹는 사람은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 근거해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다 죄입니다.” (롬 14:22–23)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죄입니다. 다른 사람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모든 일을 나와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셔야 합니다. 각자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비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지 넘어지든지, 그것은 그 주인이 상관할 일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할 수 있으시니,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날이 저 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이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롬 14:4–5)
마지막 권면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오신 후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기준도 달라졌습니다. 다시 한번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여섯 가지의 사례를 마치시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강조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을 마치시면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마 5:48)라고 하셨습니다.
옛 시대에는 용납하셨던 것들도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열린 하나님 나라에서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혼에 관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이혼에 관한 모세의 율법을 적용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적용하셨습니다. 모세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에게 적용하셨던 법은 하나님께서 일종의 양보를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여신 새로운 시대에서 하나님께서는 본래의 절대적인 율법을 인류에게 적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에게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고 성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우리가 죄에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최초의 인류에게는 절대적인 하나의 율법만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이 최초의 인류에 주신 율법은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창 2:16-17) 최초의 인류에게는 무한한 자유와 풍족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첫 사람 아담은 무한한 자유와 풍족함을 뒤로하고 하나님이 금지하신 그곳에 진정한 자유와 풍족함이 있다고 확신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법 안에 있는 무한한 자유와 풍족함을 무시하고 금지하신 곳에서 행복과 만족을 찾습니다. 하지만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 안에만 무한한 자유와 풍족함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아브라함 이후에 시작된 하나님 백성의 긴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이제 하나님 백성의 역사는 우리 세대를 거쳐서 마지막 심판 때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크고 두려운 그날에 하나님은 선택하신 모든 백성을 불러 모으실 것이고 이후의 역사는 영원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어디로 불러 모으십니까? 하나님 보좌와 어린 양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불러 모으십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보았던 환상을 함께 보고 있습니다.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계 7:9–10)
우리 주변에서 거룩한 주의 백성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날에 우리는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과 함께 할 것입니다.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선택하신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천국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예수님의 신부들은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3:2–3)
아멘!
아버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소망하며 완전함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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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맹세 (마 5:33-37) / 산상수훈 18 (0) | 2024.09.15 |
계명과 욕심 (마 5:27-30) / 산상수훈 16 (0) | 2024.0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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