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과 맹세 (마 5:33-37) / 산상수훈 18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그리스도인과 맹세 (마 5:33-37) / 산상수훈 18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옛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고 네가 맹세한 것은 그대로 주님께 지켜야 한다.’ 한 것을, 너희는 또한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발을 놓으시는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크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요.’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 5:33–37)
오늘 말씀은 맹세에 관한 말씀입니다. 살인, 간음, 이혼에 이어 주님께서 네 번째 교훈을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 다음에는 이어서, 보복과 원수 사람에 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가르침을 비판하시고 참된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너희는 이런저런 말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맹세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을 폭로하시고 맹세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우리의 말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고 명하시면서,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요.’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맹세
본문 첫 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옛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고 네가 맹세한 것은 그대로 주님께 지켜야 한다.’ 한 것을, 너희는 또한 들었다.”(마 5:33)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맹세에 관한 당시의 가르침을 요약하신 것입니다.
구약성경 (민 30:2)에 보면 모세는 맹세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자가 나 주에게 서원하였거나 맹세하여 스스로를 자제하기로 서약하였으면, 그는 자기가 한 말을 어겨서는 안 된다. 그는 입으로 한 말을 다 지켜야 한다.” (민 30:2) 너무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나 어떤 일을 자제하기로 서약하였다면 우리 입에서 나온 말을 낱낱이 지켜야 합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권의 도덕은 맹세를 지키라고 말합니다!
또 (신 23:21)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 맹세하여서 서원한 것은 미루지 말고 지켜야 합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반드시 그것을 당신들에게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미루는 것은 당신들에게 죄가 됩니다.” (신 23:21) 이 말씀도 너무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맹세한 것을 미루어야 하겠습니까! “지금은 안 되지만 언젠가는 지키겠다!”라고 하는 태도는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상황
예수님은 너무나 당연한 율법을 문제 삼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백성에게 율법을 잘못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비판하신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히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였습니다. “…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신 5:11)라고 하신 십계명의 제3계명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두려워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감추었습니다. 꼭 불러야 할 때는 “하늘”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쓰거나 “주”라는 포괄적인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을 아예 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지키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레 19:12) 등에 보면 다음과 같은 명령이 있습니다.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여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 (레 19:12) 결국 맹세와 관련해서 어떤 우스꽝스런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우리는 마태복음 23장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눈 먼 인도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성전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래도 좋으나 누구든지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 고 한다. 어리석고 눈 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마 23:16–17)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고 성전을 성전 곳곳과 성전 기물에 덮여 있는 많은 금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효력이 크다고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눈먼 인도자들아!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저같은 설교자에게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리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수님은 본질에 더 가까운지를 물으셨습니다. “성전이 본질에 가까우냐? 아니면 거룩한 성전을 꾸미는 성전의 금이 본질에 더 가까우냐?” 예수님은 본질과 비본질(현상)을 뒤집은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을 조롱하시고 힐난하셨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제단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래도 좋으나 누구든지 그 제단 위에 놓여 있는 제물을 두고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 고 한다. 눈 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제물이냐? 그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마 23:18–19)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은 제단으로 맹세하는 것보다 제단 위에 놓인 예물로 맹세하는 것이 더 효력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이 본질이며 무엇이 더 효력이 있는 맹세인지를 도전하셨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는 첫째로 본질을 생각하라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성전이든지 성전의 금이든지, 제단이든지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이든지 모든 맹세가 똑같이 유효하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요,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성전과 그 안에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마 23:20–22)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관심사는 무엇을 걸고 맹세하는 것이 더 권위와 효력이 있는지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가르치시는바,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모든 맹세가 효력이 동일하며 결국 모든 맹세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맹세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맹세와 관련된 모든 율법의 본질은 모든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리석고 눈먼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조롱하시고 율법의 본질을 설파하셨습니다.
율법주의를 반대함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행태는 오늘날도 계속됩니다. 이러한 행태를 율법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피상적인 비본질(현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주의는 당시의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에도 깊이 침투하였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특정 율법을 지킬 수가 있게 만듭니다. 맹세에 관한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크고 작은 맹세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라는 엄중한 사실을 왜곡하고 축소하였습니다. 구약 율법의 근본 정신은 맹세뿐만 아니라 하나님 백성이 내 뱉는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 이 말씀이 구약 율법의 정신을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율법주의자들은 정신을 잃어버리고 문자에 집착합니다. 살인이나 간음이나 이혼을 생각해 보십시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의 정신을 왜곡하고 축소하여 지키기가 가능하도록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영을 문자로 축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무서운 점입니다.
오늘날의 율법주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술 마시는 것이 죄다. 아니다!” “이것은 죄다, 저것은 죄일 수가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큰 죄가 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이기 때문에 마음껏 즐겨도 된다. 저 무식한 것들은 그것도 모르고 바들바들 떨고 있다!” 많은 사람이 죄의 경중에 관심을 둡니다.
술 하나를 두고도 일치된 견해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율법주의자들이 성전이냐 성전의 금이냐를 두고 싸운 것처럼 오늘날의 율법주의자들도 본질을 외면하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취하고, 각자의 소견대로 행하며,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담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의 맹세나 서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맹세나 서원이 아니라면 약속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약속,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어떻게 생각하시고 어떻게 지키십니까? 어떤 경우는 가벼운 죄이고 어떤 경우는 무거운 죄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악의가 없는 소위 “하얀 거짓말”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추석 명절에 많은 사람을 만나시게 될텐데 사람을 만나서 하게되는 이런 저런 우리의 말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말의 효력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행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죄다. 죄가 아니다. 큰 죄다. 작은 죄다”하는 모든 생각은 율법주의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율법주의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말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결국은 하나님께 하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명예를 위하여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산상수훈을 통해서 계속 가르쳐주시는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 5:48)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교훈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은 동터온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예수님은 친히 율법의 본질을 설파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발을 놓으시는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크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 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 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 5:34–37)
이 말씀이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영이 아닌 문자로만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퀘이커 교도들은 “맹세하지 말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법정 등에서 행하는 증인 선서도 거부합니다. 우리도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주님의 본래 의도를 잃어버리고 문자적으로, 형식적으로만 지키는 셈이 됩니다. 주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삭의 배우자를 찾으라는 임무를 주고 종 한 사람을 보냈습니다. 아브라함은 종에게 맹세하게 하였습니다. 야곱도 요셉에게 맹세하게 하였고, 우리는 구약 성경 곳곳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엄숙하게 맹세하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예수님을 겁박하였습니다. (마 26:63) 이때 예수님은 대제사장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인 것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대제사장의 엄숙한 고소를 합법적으로 간주하시고 신중하게 답변하셨습니다. (마 26:64)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도 맹세를 자주 하였습니다. (롬 9:1)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을 힘입어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롬 9:1)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맹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고후 1:23)에서는 “내 목숨을 걸고서, 나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모시렵니다. 내가 아직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여러분을 아끼기 때문입니다.”(고후 1:23)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하는 맹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작고 명백한 것부터 크고 깊은 것까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만물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므로 어떤 피조물로 맹세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맹세가 하나님을 두고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부모를 두고 맹세하든지 자식을 두고 맹세하든지 우리가 귀중하게 생각하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발을 놓으시는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크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마 5:34–35)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여신 새 시대는 새로운 윤리가 요구됩니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하나님 백성에게는 새로운 율법이 요구됩니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친히 율법을 그 마음에 쓰신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마음의 변화를 받아서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어버린 사람입니다. 오직 자기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만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제는 인생에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고 오직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예,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뿐입니다. 날마다 주님이 가르치는 그런 기도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비단 우리의 맹세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의 말은 천금보다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말은 천금보다 무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니 사실상 모든 맹세는 하나님을 두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맹세가 필요 없다. 내가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에 대한 지극히 높은 진실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고도의 자각을 지녀야 한다. 너희의 말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말이 되어야 한다.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너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말씀과 행위에 진실하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어야 한다. 너희의 말은 하나님 말씀처럼 책임성과 신실함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 사이에 맹세를 통한 보증은 이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맹세와 관련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하고 단순하게 말하라고 명하십니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요.’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 5:36–37)
우리가 맹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미래가 우리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맹세를 못 지키는 경우도 있고, 상황 때문에 맹세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원한다고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가 있습니까! 오늘 제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어떤 중요한 약속을 하고 길을 나서다가 교통사고로 죽게 되지 않을지 누가 보증할 수가 있습니까? … 우리는 우리의 맹세를 보증할 수 있는 존재가 못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신실함을 증명할 필요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의 대화든지 설교든지 연설이든지 회의 상의 의사소통이든지 단순하게 내가 알고 있는 진실만을 말해야 합니다. 맹세하거나 과장하거나 호언장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훗날에 우리의 말을 지키고 난 후에야 나의 신실성을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말할 때 긍정인지 부정인지 명확한 의사 표명 외에는 모두 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선생님은 오늘 본문을 이처럼 해석하셔서 성도를 권면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야고보 선생님의 이 말씀을 깊이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이나 땅이나 그밖에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다만, ‘예’ 해야 할 경우에는 오직 ‘예’라고만 하고, ‘아니오’ 해야 할 경우에는 오직 ‘아니오’라고만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여러분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약 5:12)
결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과 사도들의 교훈을 따릅시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 모두 그래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실하신 것처럼 우리도 진실해야 합니다. 사도는 에베소교회에 속한 종들과 상전들에게 “사람에게가 아니라 주님께 하듯이 기쁜 마음으로 섬기십시오.”(엡 6:5-9)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우리는 말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 주님께 하듯이 … 기쁜 마음으로 …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 주님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가진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도는 다음과 같이 권면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엡 4:15) 우리는 교회 안에서 사랑으로 진실한 말을 하여야 합니다. “예”인지 “아니오”인지 분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얀 거짓말”이라도 조심해야 합니다. 크고 작은 죄를 구별하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이 허풍이나 과장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허풍이나 과장은 공동체에 거짓을 심고 진실을 억압하는 마귀의 도구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되 사실에서 벗어나서 말하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설교를 하는 저도 조심하겠습니다. 영혼을 보살필 때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인정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케 하는 율법의 본질입니다. (약 2:12) 그래야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선한 일을 할 수가 있고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 나 자신의 신실성을 증명하려고 무의미한 노력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면 정직할수록 나를 오해하고 거짓된 말로 나를 공격하는 사람도 늘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온갖 장치로 자신의 신실성을 증명해 내야 살아남을 수가 있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의 신실성은 하나님만 증명해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성도는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나를 인정하시고 내 마음을 알아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편히 잠들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저의 간증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구주 예수님께는 거짓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입에도 거짓이 전혀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른 무엇으로 우리에게 맹세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모두 “아멘”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마음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녀 된 우리들은, … 예수님의 충성된 종된 우리들은, … 주님을 닮으려고 노력합시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처럼 보이게 합시다. 말을 천금보다 무겁게 합시다. 그래야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신뢰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 여러분에게 선포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 도 되셨다가 동시에 ‘아니오’ 도 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예’ 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 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고후 1:19–20) 아멘!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예”가 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아멘”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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