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에 맞서지 말라 (마 5:38-42) / 산상수훈 19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마 5:38–42)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라는 것은 유명한 율법입니다. 성경 이전에 쓰인 함무라비 법전(BC 1700년경)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이 율법을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하게도, 하나님의 율법은 고대 근동의 비슷한 어떤 법보다도 평등과 인권의 측면에서 뛰어났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다른 율법과 마찬가지로 이 율법도 잘못 해석되고 잘못 가르쳐지고 있었습니다. 애초 하나님의 율법은 복수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복수를 자제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눈에 해당하는 피해에 대해서 눈 이상으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 이를 부러뜨린 피해에 대해서는 이 이상으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 율법의 본래 의도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애초의 하나님 뜻을 무시하고 이 율법을 자의적으로 적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니, 내가 갚는다. …” (신 32:35)라고 하셨고, … 출애굽기, 신명기, 레위기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출 21:24–27; 레 24:20–22; 신 19:21)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명백하게 사적 복수를 금지하셨습니다. 이제, 모든 정의는 법정에서 실현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개인이 개인에게 가족이 가족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당시에는 사적인 복수가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복수를 통제하시고 과도한 사적 복수를 금지하시려던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복수하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변질되고 왜곡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으시고 하나님 백성이 가야할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예수님이 왜 이러한 말씀을 여기서 하셨는지 대충 읽어서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여기서 악한 사람이라고 번역한 것은 마태복음이나 요한일서의 “악한 자”, 곧 사탄과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많은 성경학자가 “악한 사람”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악”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지신 성경의 난외주를 보면 단지 “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에 맞서지 말아라!”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악에 맞서지 않는 구체적인 사례로 네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무저항
먼저 예수님은 “…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 5:39)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정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잘못하면 주님의 교훈이 우습게 되어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은 당시 문화에서 어떤 극한의 모욕을 강조해서 표현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뺨 맞는 것과 당시의 문화에서 뺨을 맞는 것은 매우 달랐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오른쪽 뺨을 맞는 것은 신체적인 가해 이상의 심각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때리는 사람이 오른손잡이인 경우에 오른쪽 뺨을 때리려면 손등으로 때릴 수밖에 없고 이것은 오늘날로 치면 명예 훼손 가운데서 가장 심한 명예 훼손에 해당합니다. 오늘날에는 폭력이 문제가 되겠지만 당시에는 명예 훼손이 크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유대법과 로마법 모두에서 이러한 모독 행위에 대한 징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왼쪽 뺨마저 돌려 대라”는 예수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왼쪽 뺨을 돌려 대라는 표현은 아예 보복하려는 생각을 버리라는 의미입니다. 극심한 모욕을 당하더라도 아예 보복하려는 생각조차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말씀은 상대방이 원하면 심한 모욕을 지속할 수가 있도록, 완전히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이 말씀은 우리가 심한 모욕을 당하더라도 복수하지 말아야 할 것을 더 넘어서서, 우리 마음의 복수심을 완전히 버리는 것을 넘어서서, 상대방의 모욕에 저항하지 말 것을 요구하십니다.
순종하기가 너무 힘든 요구라고 생각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실제로 이러한 모욕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넘겨지시기 전에 대제사장과 무리들에게 극심한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때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뒤에서 손바닥으로 예수님을 때렸습니다. “그리스도야! 메시아야! 누가 너를 때렸는지 알아맞추어 보아라!” (마 26:67-68)
그다음 날,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끌려가셨습니다. 총독의 모든 병사가 모여들어서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주홍색 옷을 걸치고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서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고, 예수님의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하였습니다. 병사들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을 하였습니다. 이어서 병사들은 예수님께 침을 뱉고, 다시 갈대를 빼앗아서 예수님의 머리를 쳤습니다. (마 27:27-30)
성경은 말합니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 53:7) 600년 전의 예수님에 관한 예언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명하신 무저항의 교훈은 악에 대한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저항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셨습니다. 핍박을 당하는 성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벧전 2:23) 사도 바울은 “…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9–21)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무저항과 예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명하신 무저항 정신의 근저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의 교훈대로, 복수는 하나님의 백성의 권한이 아닙니다. 복수는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신 32:35)에 보면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니, 내가 갚는다. …”(신 32:35)라고 하셨습니다. 유명한 영화 제목처럼 “복수는 나의 것”이 아닙니다. 복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당연히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AD 100년 경에 기록된 “디다케”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육적 신체적 정욕들을 멀리하시오. 누가 오른쪽 빰을 때리거든 그에게 다른 쪽도 돌려 대시오. 그러면 당신은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디다케 1:4)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 말씀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우리 마음의 복수심을 육적인 정욕과 결부시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하나님 백성의 궁극의 목표인 하늘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완전하게 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주정뱅이에게 이유 없이 뺨을 얻어맞고는 “더 때리시오”라고 하는 바보 같은 괴짜가 되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땅히 주정뱅이를 제압하여 자기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고 경찰에게 신고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은 국가 권력이 시민의 인권을 침탈하는 것을 보고도 저항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사적인 복수를 철저하게 금하시고 우리의 마음 안에서 복수심을 완전히 버릴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다음 주의 말씀 “원수 사랑”을 듣기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의 마음이 변하여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 복수심마저도 완전히 극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백성에게는 복수의 행동뿐만 아니라 복수의 마음마저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수는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권리보다 평화가 소중하다
예수님께서 들어주신 두 번째 예를 보겠습니다. 여기에서는 법정이라는 배경을 상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마 5:40)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일단 우리는 고대의 옷은 오늘날에는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로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의 속옷을 제비 뽑아 가지려 한 요한복음의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요 19:24), 로마 제국 내의 가난한 사람들은 보통 속옷과 겉옷 한 벌씩만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옷을 훔치는 행위는 고소당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법에 의하면 빼앗긴 겉옷을 되찾는 소송은 거의 승소가 확실하였습니다. 그만큼 겉옷은 삶의 필수 요소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유대법에 의하면 속옷을 요구하며 고발하는 것은 가능해도 겉옷을 요구하며 고발할 수는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너를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문제 삼으시는 것은 자기의 법적 권리를 절대로 잃지 않으려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항상 자기 권리를 먼저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자기 권리를 지킬 뿐 아니라 확장하고 싶어 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은 참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권리라도 말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며 이 시대의 정신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당연한 법적 권리까지도 기꺼이 포기할 수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술주정뱅이에게 뺨을 맞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잘 살펴보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게 됩니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 겉옷까지도 내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장에서는 형제라 하더라도 잘못을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내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 18:15-17) 그러므로 우리는 겉옷과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 공동체 내의 규율과는 상관없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의 법적 권리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8장을 봅시다. 예수님을 심문하던 예수님 곁에 서 있던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을 때린 일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을 화나게 하는 대답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경비병에게 항의하셨습니다. “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증거를 대라. 그런데 내가 한 말이 옳다면 왜 나를 때리느냐!” (요 18:22-23) 분명히 예수님은 경비병의 옳지 않은 행위에 항의하셨습니다. 경비병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도 법적인 항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갇혀있던 감옥에 지진이 났습니다. 관리들이 자신들이 잘못한 것을 알고 바울과 실라를 석방하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항의하였습니다. 관리들이 로마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치안관들이 로마 시민인 우리를 유죄 판결도 내리지 않은 채 공공연히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다가, 이제 와서, 슬그머니 우리를 내놓겠다는 겁니까? 안 됩니다. 그들이 직접 와서 우리를 석방해야 합니다.” (행 16:37)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속옷과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법이나 율법이나 국가법에 호소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법이나 율법이나 국가법에 호소할 수가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예수님의 경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경비병에게 항의하셨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로마법에 호소하며 항의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 뿐만 아니라 교회헌법이나 국가법을 존중하고 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의 권세가 담긴 율법과 교회헌법이나 국가법에 우리의 권리를 호소할 수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권리를 앞세우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권리보다 평화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의 오늘 말씀을 기꺼이 소송에서 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였습니다. (크레이그 키너)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개인과 개인에 관해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국가와 국가는 다릅니다. 국가와 국가는 모세의 율법의 규정을 받는 것이 필요하고 또 중요합니다. 호혜의 원칙, 공평성의 원칙, 주고받기의 원칙은 외교의 기본 중 기본입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높이고 국가의 법률을 높여야 합니다. 국민의 권리를 위해 싸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교회 안의 형제자매와의 관계에서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이익보다는 화평을 챙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서로서로 자기의 권리보다 형제자매의 이익을 우선하여 챙겨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정신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책망하였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신도 사이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여 줄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까? 그래서 신도가 신도와 맞서 소송을 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 한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벌써 여러분의 실패를 뜻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 (고전 6:5–7)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자기 권리보다는 평화가 낫습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의 권리를 잃어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그리고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보다는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국가법에 기꺼이 복종하라
다음은 오 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을 위해 십 리를 함께 가 주는 문제입니다.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마 5:4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계산해 보니 신약성경의 오 리는 7.5km 정도가 되고 십 리는 15km 정도가 됩니다. 예수님은 로마법을 상정하고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로마법은 식민지 주민의 노동을 명령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의 병사들은 길 가던 아무나 붙잡고 7.5km까지는 짐을 지우고 갈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식민지 주민의 정서를 가지고 보아야 하며 지배자의 요구보다 기꺼이 더 해 주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국가가 국민에게 요구하는 것은 성실하게 응할 뿐 아니라 넉넉하게 응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저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너도나도 권리를 주장하고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정부는 일제와 같은 식민 정부도 아니고 헌법에 근거하여 수립된 합법적인 정부입니다. 하지만 진보당이건 보수당이건 어떤 정부가 집권하든지 국민들은 법이 요구하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국가가 나를 지켜주기를 원하면서도 징병은 싫어합니다. 국민연금과 의료보험이 자기를 위해 어떻게 쓰이고 가난한 사람에게 어떻게 도움을 주는지 잘 알면서도 매달 내는 보험료를 좋아하는 사람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세금은 어떻습니까? 세금 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현대 사회는 위에 있는 권세를 싫어하고 개인의 권세를 존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의 교훈과 동떨어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주요 구성원 중 하나인 종들에게 권면합니다. “하인으로 있는 여러분, 극히 두려운 마음으로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선량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만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리하십시오.” (벧전 2:18)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주권자인 국민이 정한 헌법과 법률에 복종해야 하며 소위 “늘공”이든 “어공”이든지, 선출직이든지 임명직이든지, … 헌법으로 권위를 부여한 사람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합니다. 특히 로마제국과 같은, 이른바 “나쁜 정부”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들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입니다.” (롬 13:1)
합법적으로 정부를 개혁하거나 바꾸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의로운 정권이 들어서도록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어떤 특정한 법이 공의롭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공의의 이름으로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대통령이 불법한 경우에는 헌법에 따라서 탄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민족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는 사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상적으로 완전한 비기독교 국가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가 그런 면에서는 우리보다 잘하였습니다. 일제에 항거하고 일제의 입장에서 혁명을 수행했던 많은 분이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국가 권력에 복종하라고 명하셨던 사도 바울도 유대민족을 사랑하는, 이른바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우리도 그런 상황에 놓이면 그분들의 뒤를 따라야 하겠습니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는 더 의로운 방향으로 합법적인 개혁을 노력하되 국가 체제에 대해 저항하기보다는 악으로 선을 이기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법을 철저히 준수하되 기꺼이 그렇게 합시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좋은 시민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교통법규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맙시다. 이것이 오늘 말씀하시는 우리 주님의 깊은 뜻이라고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교훈을 따릅시다.
이기심을 버리라
끝으로 주님께서는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마 5:42)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소유의 양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말씀은 도와줘도 가망없는 사람을 도와주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일하기를 싫어하여 생계로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와야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꾸어주거나 도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러한 결정에 우리의 이기심이 작동하지 않을 뿐입니다.
많이 소개하였고, 아까도 인용한 디다케에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줄 것인가 알아낼 때까지 당신 자선금이 당신 손에서 땀나게 하시오.” (디다케 1:6) 재미있지 않습니까? 주는 것도 당연하고 누구에게 줄 것인지 말 것인지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당연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이기심과 자기 중심성 때문에 가난한 사람을 돕지 않으려는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악한 본성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너그럽게 자선을 베푸는 일에 있어서는 우리의 명예도 우리의 이기심도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이 돈이 나에게 필요하게 되면 어쩌지?”하는 미래에 대한 걱정도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주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해석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요일 3:17–18)
직업적인 거지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 조용히 일해서 자기가 먹을 것을 자기가 벌어서 먹으라”(살후 3:10-12)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들에게는 한 푼이라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머니에서 우리 자선금이 땀나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 궁핍한 형제나 자매가 보이고 우리에게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어서 형제자매를 도울 수 있다면 우리는 내 마음의 금고 문을 닫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더 가난하게 되더라도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죽음으로 가던 우리를 도와 다시 일어설 수가 있도록 자기 자신을 주신 사랑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결론
주님께서는 살인, 간음, 이혼, 맹세, 오늘 말씀인 복수, 원수 사랑에 관한 여섯 사례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드신 여섯 사례는 예수님 당시에는 논쟁거리였고 초대교회 때는 공동체를 깨뜨리는 가장 주요한 요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당시에도 충격적이었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네 가지 실례를 들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들고 계시는 여섯 가지 사례와 오늘 말씀하신 네 가지 실례들을 우리가 문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영을 말씀하시며, 정신을 말씀하시며, 원칙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율법주의는 한 줄의 문장으로 예, 아니오를 요구하지만, 율법의 수여자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율법의 정신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의 말과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주님의 영을 가지고 사는 것이며 주님의 정신으로 행동하는 것이며 주님의 마음과 뜻으로 선택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단지 문자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여정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악한 사람을, 혹은 악을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악한 자 마귀는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지만 악한 사람이나 악은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나의 견해가 옳은 것도 없고 전적으로 타인의 견해가 옳은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은 남과 나를 나누는 경계선이 아닙니다. 악은 저들과 우리의 경계가 아닙니다. 악은 우리 모두의 가슴을 꿰뚫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지금 나타나셔서 심판으로 당신의 공의를 온전히 이루신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확실합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과 똑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단지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율법주의자들처럼 저들과 우리를 나누고 다른 지체와 나를 구분하기가 쉽습니다. 나는 의롭고 저들은 악하다고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처럼 나를 남보다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서는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산상수훈 전체를 통해서 분명하게, …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지금까지 주님께서 하신 산상수훈 말씀을 단 한 문장으로 완벽하게 해석하셨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히 12:14)
아멘!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를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의 이익이 아니라 주님의 평화를 추구하여야 하겠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아들들이라고 부르실 것이다.”(마 5:9)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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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하여라-1(마 5:43-48) / 산상수훈20 (0) | 2024.09.29 |
그리스도인과 맹세 (마 5:33-37) / 산상수훈 18 (0) | 2024.09.15 |
이혼과 간음 (마 5:30-31) / 산상수훈 17 (0) | 2024.09.08 |
계명과 욕심 (마 5:27-30) / 산상수훈 16 (0) | 2024.0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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