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막 4:35-41)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그 날 저녁이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남겨 두고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갔다. 그런데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오므로 물이 배에 벌써 가득 찼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서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막 4:35–41)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면서 가장 힘들 때가 언제입니까? 삶에 어려움이 닥쳐올 때입니까? 아니면 시험이나 유혹이 닥쳐올 때입니까? 몸이 아플 때입니까? 제 생각에 그런 것보다 더 어려운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가장 큰 어려움은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가 아닌가 합니다. 나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어려움에서 건져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믿고 알아 왔던, …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지금, … 내가 어려울 때 어디 계시는 것입니까! 지금 나는 이토록 힘든데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셨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의 침묵을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주님,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원히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아픔을 견디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여야 합니까? 언제까지 내 앞에서 의기양양한 원수의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 (시 13:1–3)
시편에 이러한 고백이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며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이러한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없으면 우리가 성장할 수도 없고, 이러한 경험 없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더 큰 확신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훈련 과정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이러한 경험을 하여야 했습니다. 옛 성도의 기도와 잠을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는 제자들의 말이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막 4:38)
마가복음의 처음 독자는 풍랑 속의 제자들과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AD 65년 그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주님은 이제 육신으로는 제자들과 함께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이제는 눈으로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또, 곧 오리라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재림은 계속해서 지연되었습니다.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요? 더 나아가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초유의 재앙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네로의 대박해입니다. 예수님이 예언하신 종말적인 고난이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의 무례한 말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막 4:38)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은 무엇입니까?
불신앙의 유혹
제자들이 두려움 때문에 거의 주님을 꾸짖다시피 한 무례한 말을 내뱉은 것은 어쩌면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주무시는 것 같고, 하나님이 내가 처한 상황에 개입하지 않으실 것만 같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을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내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생각해보면 제자들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합니까?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목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목격한 기적들은 남의 일이었습니다. 정작 자기들이 죽게 생겼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 두려움에 떨며 주님께 무례하게 대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분명히 무례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같은 사건을 기록하면서 제자들의 반응을 순화할 정도로 마가복음의 제자들 말은 무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할 때 의심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서는 어떨까요? 이러한 우리의 반응에 대한 아버지 하나님의 입장은 어떠실까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에게 시험이자 유혹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당신의 자녀를 향한 시험이고, 마귀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우리를 향한 유혹의 기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서는 자연스러울 수도 있는 제자들의 이러한 태도를 불신앙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가 불신앙이라는 점을 우리 자신에게 명확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막 4:40)
믿음과 경험
최근에 제가 배운 성경 진리가 있습니다. 믿음의 성장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한 결과라는 진리입니다. 사랑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기 힘들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신자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할수록 믿음도 커지고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의 확신을 뛰어넘는 더 큰 확신은 경험으로 오는 것이 아닐까요? 더 큰 믿음, 더 큰 확신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믿음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또한 경험으로도 말미암습니다. 믿음이 하나님 사랑에 대한 신뢰를 낳고 하나님의 사랑이 또한 우리 삶의 경험으로 되며, 이러한 사랑의 경험이 나의 믿음에 믿음을 보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믿음은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부터 믿음과 경험을 나눌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과거에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하셨습니까?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오랫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여 이제는 아예 하나님의 침묵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기십니까?
성경에 많이 나오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말 중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신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실제로 베풀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리와 가르침 속에 있는 사랑과 은혜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과 은혜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복”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 (민 6:24–26) 아멘!
반면에 성경에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이런 표현도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향하시는 것이 아니라 숨기신다는 표현입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 13:1)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숨기신다는 표현도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숨기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숨기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에게 향하시는 상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는 상태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두 가지 상태이거나 그 사이에 있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상태를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신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함과 신앙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라고 고백하는 것은 작은 믿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막 4:38)라고 예수님을 깨우는 믿음은 무례하지만 작은 믿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무례한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의 실제성과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대가 있기에 불평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 전반에 나오는 이러한 기도가 많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는 무례한 이런 기도자를 크게 책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예를 구약성경에서 적지 않게 볼 수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경우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 (렘 20:7) 이 구절을 이전 개역개정은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 (렘 20:7) 얼마나 부드럽게 번역하였습니까? 오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속였다는 표현이 한국인의 예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부드럽게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야가 죽을 고생을 하였지만 하나님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일에 크게 쓰임 받은 축복받은 믿음의 선배임을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얼마나 정직한지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현재 경험을 하나님에 관한 교리에 꿰맞출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기의 마음을 아뢸 뿐입니다. 저는 이것이 신앙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예절 따위나 지키며 솔직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오히려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절바름 보다는 차라리 자녀의 솔직함을 바라십니다.
믿음의 선배, 욥은 이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내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내 죄악을 용서해 주지 않으십니까? 이제 내가 숨져 흙 속에 누우면 주님께서 아무리 저를 찾으신다 해도 나는 이미 없는 몸이 아닙니까?” (욥 7:21)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예절이 바른 사람에게는 욥의 이 말이 하나님을 겁박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더 심한 믿음의 선배도 있습니다.
“주님은 죽은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시렵니까? 혼백이 일어나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까? (셀라) 무덤에서 주님의 사랑을, 죽은 자의 세계에서 주님의 성실하심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흑암 속에서 주님의 기적을, 망각의 땅에서 주님의 정의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고 첫새벽에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은 나를 버리시고 주님의 얼굴을 감추십니까?” (시 88:10–14)
마치 “내가 죽으면 어쩌시렵니까!”라고 하나님을 협박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이러한 솔직한 기도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제3계명의 위반이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이미 많이 경험한 자의 솔직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이것은 영적으로 죽은 자의 불평일 뿐입니다. 우리가 만약 지옥을 볼 수가 있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마귀에게 속한 자들의 이런 냉소적인 말을 많이 들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과거에 경험한 자의 간청은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일 수록 하나님의 침묵이 더욱 힘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참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자신의 고난에 침묵하시니 어찌 하나님께 이런 간청을 드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무서움과 경외
그런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일갈하셨습니다. “…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막 4:40)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가 산상수훈 말씀에서 배운 대로 주님께서는 하나님 백성에 대한 당신의 기준을 절대로 낮추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이 당신과 연합하기를 바라십니다. 이전의 선지자들과 구약 시대의 믿음의 선배들보다 더 높은 기준을 세우시고 제자들을 훈련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간파한 귀신들을 지나쳐 가십니다. (3:11) 혹은 예수님의 놀라운 권세를 오해한 율법학자들은 성령훼방죄로 정죄하십니다. (3:22) 하지만 제자들은 다릅니다. 제자들은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제자들이 죽을 상황에 이른 것이 예수님께는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실제로 예수님이 바로 일어나실 수도 있지만 일부러 제자들을 좀 내버려두셨다고 상상해 봅니다. 물론 피곤해서 주무신 것도 사실이지만 제자들의 반응을 기다리신 것도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배워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무엇을 배워야 했습니까? 두려움을 배워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말씀으로 자연을 다스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다 두 마디의 아람어 “잠잠하라. 고요하라”라고 명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람이 그쳤습니다.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전에는 비밀에 부쳐졌던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는 사실을 배우기 전에 이 사건의 경험으로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배움의 핵심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두려움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로 그 “경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있다고 평가하신 40절의 두려움(δειλοί)과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이후, 41절의 두려움(φόβον)은 그 원어가 다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어떤 두려움입니까? 제자들의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폭풍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즉 하나님의 아들의 임재를 경험한 제자들의 두려움은 “경건한 두려움”, 즉 “경외”와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진정한 두려움이 현실적인 두려움을 이기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은 모든 믿음의 선배들의 경험입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볼까요?
마음공부를 많이 한 불교도는 웬만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도를 오랫동안 닦은 도인들도 현실을 뛰어넘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주식의 고수들은 시시각각 움직이는 주가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저는 보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소신이 옳다고 확신했기에 독배도 의연하게 마실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돌아가는 인간사를 인간의 지혜로 파악을 하고 있기에 불행에도 안달복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교리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교리를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삶의 작은 균열에도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안절부절못하며 안달복달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야단치지 않으시겠습니까? 믿음이란 그런 겁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힘들어할지언정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의 하한선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라고 고백하는 것은 작은 믿음이 아니지만 우리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이것은 믿음의 하한선이자 출발선입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막 4:38)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의 위기는 분명히 배움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런 것으로 생각합니다. 온갖 위기 속에서 의심의 질문들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경험을 준비하며 마음을 열고 더욱 하나님을 신뢰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모두 동의하는 바와 같이 믿음은 단순히 옳은 명제에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오늘 본문 말씀의 제자들처럼 “이분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에게서 오는 해답을 들어야 하고, 예수님은 더욱 확고한 우리의 주님이 되셔야 하고, 성령께서는 성경과 우리 경험을 통합시키는 보혜사가 되셔야만 합니다. 믿음과 경험을 분리하지 않을 때 우리는 “주님, 어디 계십니까?”라고 부르짖은 욥의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뵈었습니다. 욥이 이전에 알던 하나님보다 고난 이후에는 더욱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고난 중의 간청하는 기도는 이런 열매를 맺습니다. 이러한 은혜가 없다면 우리의 고난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죽음조차 이긴 사람들이라고 불렸습니다.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세상을 이긴다고 확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긴 승리의 비결은 곧 우리의 믿음이라서 선언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요일 5:4) 저는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하실 때 오늘 본문의 경험을 염두에 두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진정한 두려움이 거짓 두려움을 이기게 하였던 경험 말입니다.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고요해지는 경험, 인생의 광풍이 그치고 인생의 파도가 잔잔해지는 경험, 그러한 경험들이 예수님을 경외하여 더 큰 인생의 파도를 이길 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위기가 닥쳤을 때 그리스도인의 반응은 매우 다양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가장 정상적인 모습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하실 때도 부르짖고 간청하고 우리가 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하늘 아버지께 끝까지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녀가 할 수가 있는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며 믿음이 더욱 성장합니다. 어떤 경험입니까? 하나님의 침묵과 자기 안의 온갖 의심과 질문과 싸우는 경험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께 불평의 간청을 하는 제자들을 예수님은 믿음이 없다고 질책하셨습니다. 그런데, 크고 작은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어찌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연약한 사람들을 향해 믿음이 없다고 질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워하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늘 아버지께 간청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는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기도합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늘 기도합시다. 항상 기도하되 낙심하지 맙시다. 누가는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악한 재판관 비유를 예수님께서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잘 아시는 비유입니다.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어느 고을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그 고을에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그 재판관에게 줄곧 찾아가서,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그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얼마 뒤에 이렇게 혼자 말하였다. ‘내가 정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눅 18:2–8)
“악한 재판관도 계속되는 강청에 흔들리데,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너희는 기도하지도 않고, 또 기도하되 쉽게 낙심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못하느냐?”라는 것이 주님의 비유의 개요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기도하되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더라도 자녀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집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저는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느꼈습니다.
“내가 누구냐? 내가 너희와 함께하지 않느냐? 나는 하나님과 함께 달과 별을 창조한 창조주이며 모든 만물의 머리이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 너는 나의 권세로, 곧 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가 있다. 너는 내가 택한 자이며 내가 사랑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여라. 상황을 회피하지 말고 믿음으로 끝까지 상황에 직면하여라. 거짓 두려움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나만을 두려워하며 살아라! 나를 두려워하면 할 수록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신지요?
정직한 자가 하나님 얼굴을 뵙는다고 하셨습니다. (시 11:7)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집시다. 힘들면 “악”하고 비명을 지릅시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에게는 비명이 기도일 수가 있습니다. 힘들다고 사람에게 호소하지 말고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간청합시다.
모든 일에 기도하며 응답받음으로써 믿음이 자라고 더 큰 확신에 이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간청과 응답에 대한 간증이 넘쳐나는 하늘씨앗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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