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씨앗교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마 5:6) / 산상수훈 5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마 5:6) / 산상수훈 5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마 5:6)


참된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팔복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팔복의 말씀은 단순하면서도 심오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외칩니다. 그래야만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자기만의 방법으로 행복을 추구합니다. 예수님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세상은 의가 아닌 다른 것에 주리고 목말라합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세상


예수님은 행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습니까만, 예수님은 행복을 추구해서는 행복을 얻을 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행복이 아니라 의를 추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선순위를 바꾼 것이 세상의 문제입니다. 세상은 의로움이 아니라 행복을 최고의 우선순위로 놓았습니다. 고통을 잊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려고 합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고통을 잊고 행복하게 해 주는 수백 가지도 넘는 방법이 있습니다. 비용도 많이 들지 않습니다. 인스타그램 릴스나 유튜브 쇼츠를 반복해서 보면 행복 호르몬이라고 하는 도파민이 실제로 분비된다고 합니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비슷한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 넷플릭스나 유튜브나 드라마 같은 것을 보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을 위해서 다이어트나 운동을 하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술이나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거나 죄가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가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주리고 목말라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가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20년도 더 된 일입니다. 직장에서 2억에 달하는 비싼 장비를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운용 책임자였기 때문에 수입업체 영업사원 한 명과 엔지니어 한 명과 함께 교육받으러 독일에 가게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해외여행이 많지는 않던 때라 남자 셋이 낯선 곳에 떨어지자, 마음이 많이 설레고 자유로워졌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영업 사원이 주동하여 소위 ‘밤 문화’를 체험하러 나가자고 하였고 저는 밤거리가 위험하다는 핑계를 대고 거절하였습니다.


새벽에 두 사람이 돌아왔고 저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비난하였습니다. 비난한 이유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어리석게도 저는 그분의 아내와 딸을 들먹이면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분과 저는 이후에 원수가 되었습니다. 제가 좀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정말로 가정적인 사람이었거든요. 아내와 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그렇게 성실한 사람이 순간의 쾌락을 위해 신의를 저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당시 저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세상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분명합니다! 공동체의 행복과 자기 행복이 상치될 때 많은 사람이 자기 행복을 선택합니다. 가정의 행복과 자기 행복이 충돌하면 항상 자기 행복을 우선시합니다. 정치가들은 다수의 행복을 핑계로 소수를 희생하는 결정을 아무런 가책 없이 하곤 합니다. 어느덧 사랑하는 친구가 바람피우는 것을 격려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럴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표현이 “네가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의를 추구합니까? 아니면 행복을 추구합니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본문을 설교하면서 본문이 우리 신앙의 시금석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수많은 선택을 하고 수많은 행동을 할 때 그 기준은 과연 의인가요? 아니면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인가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내가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 이것이 나의 판단 기준은 아닙니까?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가 아니라 “이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가 판단 기준이 된 것은 아닐까요?


우리 기독교인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도록 운명지어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모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을 향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행복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면 이미 행복은 우리의 우상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행복을 추구해서는 결코 행복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행복이 아니라 의를 추구해야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


지금부터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말 사전을 찾아보니 “의”는 “사람으로서 지키고 행하여야 할 바른 도리”라고 뜻풀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말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영어도 “의”는 도덕이나 법과 관련해서 쓰입니다. “옳다, 그르다” 혹은 “유죄, 무죄”와 같은 개념으로 “의”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의는 우리말이나 영어와는 결이 다릅니다. 성경에서 “의”는 항상 두 인격체 사이의 “의로운” 관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 관계가 하나님과 사람일 수도 있고, 사람과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즉, 성경에서는 두 당사자 관계가 이상적인 상태이면 의로운 것이고, 이상적인 상태가 깨지면 의롭지 않은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관계에서 의라는 것은 좀 더 뚜렷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은 언약 관계로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에 따라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지키시고 영원히 보존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하나님 백성이 의롭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선하고 하나님 백성이 선하고 바른 일을 행하면, … 하나님 백성은 의롭게 됩니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실하시고 신실하십니다. (시7:17; 22:31; 111:3; 단9:16)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지키십니다. (시11:7; 사45:19) 어떻게 하시든 당신의 백성을 위해 개입하시고 건지시고 구원을 베푸십니다. (삿5:11; 사41:10; 45:8; 51:6)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는 하나님 백성의 평화와 번영과 행복입니다. (시48:10; 사48:18; 61:11; 호10:12)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입니다.


그럼, 우리의 의로움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교훈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신9:4; 사1:21)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하고 바른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욥35:8; 겔3:20; 엡6:14; 빌1:11)


요약하자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는 일에 성실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의롭습니다. 하나님 백성 또한 언약에 성실하면 의롭게 됩니다. 이것이 신구약 성경 전체에 나타난 “의”에 관한 전체적인 묘사입니다. 


칭의와 성화


신약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세우시고 선택하신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백성이 됩니다. 이 부분에서 한국 교회 안에 혼란이 있어서 좀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에 관해서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롬 1:16–17)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을 제한 없이 부르셔서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구원의 조건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제한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이것이 신약 성도의 출발점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준수 여부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1)


새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도움 없이 주어지는 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율법을 잘 지키기 때문에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지점에서 혼란과 오해가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는데 다시 의에 주리고 목마를 필요가 있습니까? 율법을 지켜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이렇게 주장하고 이렇게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오해와 혼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삶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 그것을 칭의라고 하지요. 이것은 우리 구원의 출발이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것에만 머무르고, 칭의라는 안경을 쓰고 전체 성경을 본다면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왜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까? (마 5:17; 7:12) 왜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강조하십니까? (마 7:21-23)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일, 즉 칭의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자와도 싸웠고 반 율법주의자와도 싸워야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의 논증의 많은 부분은 사람의 공로나 율법이 아니라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의롭다하심, 즉 칭의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구원은 칭의(稱義)로 시작됩니다. 그 다음은 성화(聖化)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마지막은 우리가 영광스럽게 되는 것, 즉 영화(靈化)로 끝납니다. 제가 인용한 사도 바울의 말에 나오는 의는 주로 칭의에 관한 말씀이고 우리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의는 칭의 뿐만아니라 성화와 영화까지 관련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이 구원받는 지점에서 머무르고 더는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중에 실족하고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마귀의 꼬임에 빠져버렸습니다. 출발은 잘하였지만, 도중에 실족하고 뒤로 물러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나쁜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구원을 받았으나 성장하지 못하고 말라 죽어버립니다. (마 13:1-9) 성장이 없으면 죽는다는 것은 생명의 법칙이며 영적 원리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누구입니까? 이미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미 천국이 주어진 하나님 백성입니다. 팔복 말씀 전체가 기독교인을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이 모든 팔복 말씀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특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까지 이어지는 이전 말씀들의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백성은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가난합니다. 슬픕니다. 온유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백성의 일종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과 슬퍼하는 것과 교만하지 않고 온유하고 겸손한 하나님 백성의 특성들은 모두 하나님 백성이 가지는 자기 인식과 관련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 백성은 구원을 받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 하면 할수록 자기 내부의 죄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하고 슬프고 온유해지게 됩니다. 오늘 말씀,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부터는 결이 달라집니다. 이것은 하나님 백성의 상태라기 보다는 하나님 백성의 갈망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성장을 향한 몸부림입니다. 뒤로 물러나지 않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聖化에 대한 갈망


한 유명한 신학자가 말했습니다. “인간이 배가 고프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빵을 얻게 될 것이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대서양 한 가운데서 뗏목을 타고 표류하다가 결국 굶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배가 고프다는 사실은 적어도 그 사람이 식사로 배울 채워야 사는 종족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C.S. 루이스, “영광의 무게”)


이처럼 의에 대한 갈망은 기독교인이 천국 백성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이미 구원받았고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 할지라도 선택하신 하나님 백성에게는 더 갈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의를 향한 길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온전해지고 싶은 갈망입니다. (마 5:48) 성화의 욕구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나도 거룩해지고 싶은 욕구입니다. (벧전 1:16)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어둠을 인식하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해지고, 슬퍼지고, 하나님께 사람에게 온유하고 겸손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직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 2:2)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합니다. 우리는 구원 받았으나 아직도 이 세상의 신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온전히 보지 못합니다. (고후 4:4) 그러므로 이 모든 악의 영향력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어 온전히 자유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갈 5:1) 


이것이 선택받은 하나님 백성,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모든 천국 백성의 갈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갈망을 이같이 표현하였습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롬 7:22–25)


사랑하는 여러분, 위대한 사도의 말을 잘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면에서 위대한 사도라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첫째로, 우리도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진정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백성이 아닐 것입니다.


둘째로, 내 속에는 또 다른 법이 있어서 나를 포로로 만듭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내 마음은 가난합니다. 슬픕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하나님 자녀라면 절망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은 절망에서 즉시 기쁨으로 변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땅과 하늘의 차이입니다. 철저한 절망으로부터 무한한 소망까지 우리 마음은 놀이동산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날마다, … 절망과 희망으로, 또다시 희망에서 절망으로 오갑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삶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지 못했다면 오히려 이러한 고통이 없었을 것입니다. 더 거룩한 것, 더 위대한 것, 더 큰 은혜, 더 큰 기쁨이 존재하는 것도 모른 채, 벨기에 동화에 나오는 파랑새를 좇다가 그렇게 인생을 허비하고 그렇게 죽어갔을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 보다는 행복에 주리고 목말라 하다가 한 번도 영원한 행복을 맛보지 못한 채 절망 속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죽을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행복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하루는 절망하고 하루는 기쁨에 넘치는 그런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靈化에 대한 갈망


하지만 기독교인의 삶은 이러한 것이 모두가 아닙니다. 아직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절망과 희망을 오가는 이런 상태, 곧 로마서 7장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미약해져서 해낼 수 없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죄를 없애시려고 그 육신에다 죄의 선고를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롬 8:1–6)


먼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이미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말씀의 다른 표현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믿는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누구도 예수님을 주라 할 수가 없고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누구도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 육신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미약해져서 해낼 수 없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해결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다른 말씀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계속 말씀을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죄 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죄를 없애시려고 그 육신에다 죄의 선고를 (이미) 내리셨습니다.”


아직까지, 칭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이루신 일에 대한 사도의 묘사를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무슨 목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일을 행하셨습니까?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화입니다. 우리는 칭의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칭의를 딛고 성화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최종 목적은 칭의가 아닙니다. 우리를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만드시고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를 굳게 잡고 영화를 갈망하며 성화의 단계로 힘차게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만약에 우리의 목표가 단지 구원이라면 우리는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선포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로 나아갈 운명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천국 백성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성령이 계십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그것을 성령께서는 하실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믿으셔야 합니다. 로마서를 계속 보면 사도 바울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복음의 에베레스트라고 하는 로마서 8장의 일부입니다. 칭의에 머무는 것은 우리 구원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우리 구원에는 성화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앞길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의 영광입니다. 계속해서 로마서 8장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롬 8:23–30)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마음이 가난하고, 슬프고, 주리고 목마른 데 머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반드시 배부를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제정하신 영적인 법칙입니다. 약속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의 뜻과 의도를 이같이 요약하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마 5:6) 


주리고 목마른 자의 행복


이제 우리는 오늘 말씀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어떤 것입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예수님처럼 성결해 지기를, … 예수님처럼 거룩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는 거룩한 욕망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산상수훈의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자 투쟁하는 사람입니다.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사람입니다. (히 12:4) 이러한 갈망은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오르락내리락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순종은 마치 아침 구름이나 쉽게 없어지는 이슬처럼 일시적이었습니다. (호 6:4) 순종은 얕고 짧았고, 불순종은 깊고 길었습니다. 소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구원하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마음이 가난하고 슬프고 온유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가운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남은 자들을 향해 외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호 6:3)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갈망입니다. 이러한 갈망에 하나님의 약속이 뒤따릅니다. 이 말씀이 보이십니까? 이 말씀이 여러분 마음에 와닿았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의 주리고 목마른 상태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배부르게 하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 백성의 깊은 욕망은 하나님에 의해서 반드시 채워질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참으로 목마른 사람은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십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그 배고픔은, … 그 목마름은 얼마나 커야 합니까? 여러분의 하나님을 향한 갈증과 목마름의 정도는 어떠합니까? 


시편 기자는 천국 백성의 목마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니, 내가 언제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 얼굴을 뵈올 수 있을까!” (시 42:1–2)


예수님은 이른바 “돌아온 탕자” 비유를 통해서 구원받는 사람의 배고픔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눅 15:1-32) 아버지 집을 떠난 아들은 살기 위해서 유대인이 가장 더럽게 여기는 돼지를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기를 원했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그 아들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아들에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 먹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굶어 죽게 되어서야 비로소 아들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아버지 집으로 향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아버지 집을 떠난 아들의 배고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리는 것(hungry)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 정말로 주려서 죽을 지경(starving)이 되어야 한다.” (J.N. Darby) 


hungry한 정도로는 안 됩니다. starving한 지경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 집에서 풍성한 잔치를 누리는 돌아온 모은 아버지의 자녀들은 공통으로 경험하는 일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배가 고팠을 때는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분들이 배고파 죽게 되었을 때, 그때야 비로소 그분들은 머물던 곳을 버리고 아버지의 집을 향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칭의에만 머무시겠습니까? 아니면 성화의 단계로 힘 있게 나가시겠습니까?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하나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칭의를 딛고 영화를 위해 힘차게 나가는 모든 지체에게 우리 믿음의 선배들과 동일한 마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빌 3: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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