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씨앗교회

슬퍼하는 사람들 (마 5:4) / 산상수훈 3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마 5:4) / 산상수훈 3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마 5:4)


오늘 말씀은 팔복 중 두 번째 말씀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마 5:4)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팔복 말씀과 마찬가지로 이 말씀도 하나님 나라 백성의 품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슬퍼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주요한 품성 중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깁니다. 특별히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라는 말씀을 우습게 여깁니다. 이해를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세상에 넘쳐나는 취미, 오락, 문화, 등등 일하는 시간 외에 돈과 에너지를 쓰는 모든 활동이 슬픔을 극복하거나 슬픔을 잊기 위해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인 직업과 일조차 슬픔을 잊기 위해 몰두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교회도 세상 사람들의 필요를 알기에 “슬픔”에 주목하기보다는 “기쁨”을 만들어 내는 활동을 하려고 애를 쓰기가 쉽습니다. 전도의 명목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슬퍼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슬퍼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우울증에 걸려서 늘 슬픈 눈을 하고 언제라도 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런 건 아닐 겁니다.


예수님의 품성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종종 듣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선생님이신 예수님을 당연히 닮을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선생님으로 부르면서도 예수님을 전혀 닮지 않았다면, 혹은 닮아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아직 멀다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산상수훈과 팔복 말씀에는 이러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님의 성품이 산상수훈과 팔복 말씀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가 산상수훈과 팔복 말씀들은 모두 예수님의 품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여러분이 우리 선생님이시요 주님이신 예수님(요 13:13)을 바라보신다면 무엇이 보이십니까? 우리 예수님은 슬퍼하는 사람이었습니까? 슬픔이 예수님의 품성인가요? 그래서 오늘 말씀대로 진정으로 행복한 분이셨습니까? 


육신의 슬픔과 영의 슬픔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분명한 묘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웃으셨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번도 웃지 않으셨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상합니다. 하지만,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웃음을 전혀 묘사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사야서 53장은 예수님에 관한 구약성경의 예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예언입니다. 우리는 이 예언에서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웃음을 기록하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 예언에 의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전혀 없어야 했습니다. (사 53:2) 또한, 예수님은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어야 할 분이셨습니다. (사 53:4) 예수님의 슬픔은 이미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주신 예언이 예수님의 삶을 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은 예언을 문자 그대로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슬픔의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반면에 우셨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시는 모습을 봅니다. (요 11:35) 예수님이 우신 까닭은 사랑하는 친구가 죽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일부러 기다리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자 비로소 장례식장으로 출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 후에 당신이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이 우신 것은 육신의 슬픔 때문이 아니라 다른 슬픔 때문이었습니다.


또,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셨다는 기록을 봅니다. (눅 19:41-44) 왜 우셨습니까? 당신이 당하실 고난을 생각하시면서 당신을 위해 우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50년 후에 일어날 예루살렘 멸망을 내다보시면서 죽임을 당할 예루살렘 주민들이 불쌍해서 우셨습니까? 당연히 그런 마음을 가지셨겠지만, … 정답은 …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한 때 하나님 백성이었던 자들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고 계셨습니다. 이 순간 예수님의 감정은 하나님의 감정과 같았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눅 13:34)


이것이 영적 슬픔입니다. 근본적으로 육신의 슬픔과 매우 다른 슬픔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해진 예수님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셨고(마 3:14-17) 성령으로 가득 찬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이 멸망할 것을 아시고 어찌 슬퍼하지 않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나사로가 죄악이 가져온 죽음을 경험하는 것을 보시고, 사랑하는 자녀들이 죽음으로 인해 우는 것을 보시고 어찌 가슴 아파하지 않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슬픔은 바로 하나님의 슬픔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슬픔을 공유하게 됩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마 5:4)


자기로 인한 슬픔


예수님의 경우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다른 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당신 자신에 대한 슬픔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모습을 슬퍼할 까닭이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 사이에는 어떠한 벽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경우에는 큰 벽이 있습니다. 그 벽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죄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 7:24)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부르짖을 것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중 누구라도 이렇게 부르짖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기독교인의 기본적인 정서입니다. 


기독교인의 슬픔은 “내가 원하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의 넓은 간극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나와 실제의 나의 차이가 너무 크기에 기독교인은 기본적으로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롬 7:18) 사도 바울은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이것이 모든 기독교인의 공통의 자기 객관화입니다. 누가 사도 바울의 이 말에 반론을 제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롬 7:15)


이 또한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우리 모두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자기 객관화


저는 기독교인은 근본적으로 육과 영의 깊은 갈등 속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주님이 다시 오셔서 하나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를 온전히 이루실 때까지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갈등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이러한 갈등으로 인한 깊은 슬픔이 내 마음속에 없다면 복음에서 벗어나 이단의 길로 접어든 상태이거나 혹은 내가 하나님 백성이 아닐 것입니다. 마음속의 갈등이 기독교인의 시금석입니다. 내 마음속의 육과 영의 치열한 싸움이 하나님 백성의 시금석입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순간 갈등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믿기 전보다 오히려 더 슬픈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에서 이미 놓여났다고 스스로 생각한 사람들이 역사상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경지를 넘어서서 거의 예수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스스로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선한 열매를 거둘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과 달리 참 인간이시며 동시에 참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자의식에는 죄책감으로 인한 슬픔 따위는 전혀 없었습니다. 있을 수가 없었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100% 아버지께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히 4:15)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소망 가운데 있습니다. 종말에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우리는 현재의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 객관화해서 보아야 합니다. 사도의 교훈에서 떠나서는 안 됩니다. 종말에 성취될 일을 현재로 가져와서는 안 됩니다. 육과 영의 갈등을 축소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사도의 교훈을 떠난 이단 사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처럼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하나님 백성이 경험하는 깊은 슬픔을 날마다 경험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로마교회 성도에게,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이같이 말합니다.


“…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롬 8:23)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이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갈망하면서, 이 장막집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이 장막에서 살면서, 무거운 짐에 눌려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막을 벗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를 바랍니다. …” (고후 5:2–4)


하나님 나라 백성의 영적 정체성이 아직은 이러하기 때문에 하나님 백성은 필연적으로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몇몇 구절만 찾아보아도 이는 명백해 보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의 글을 읽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마찬가지 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퍼하는 것입니다.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성찰의 권면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세상에 살아가면서 때때로 멈추어 서서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일기를 쓰기도 하고 정기적인 묵상과 기도를 통해 골방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여 자기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자기 성찰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같이 자기 성찰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과만 홀로 있을 때만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의 골방에서만 정확한 “자기 객관화”가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만 우리는 슬퍼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영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에는 너무 무능하고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너무 더럽습니다.


여러분이 하루 일을 끝내고 기도할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십니까? 오늘 하루의 삶을 뒤돌아보고 오늘 내가 했던 일과, 했던 말과, 사람들에게 했던 행동을 뒤돌아보지 않습니까? 그때의 내 마음과 그때의 내 감정을 들여다보지 않겠습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슬플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를 살펴보다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거나 마땅히 하지 않아야 했던 일이 떠오른다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그때의 생각과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면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겠습니까? 하나님 자녀인 우리는 큰 충격과 함께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슬픕니다. 괴롭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쉽게 슬픔(롬 7:23)을 뛰어넘어 기쁨(롬 7:25)으로 넘어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슬픔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슬픔을 직시해야 합니다. “내가 왜 그렇게 했을까? 내 속에 있는 어떤 것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고 주님께 불순종하게 했을까? 다음에 똑같은 상황에 놓일 때 그런 악한 마음을 품지 않으려면 어떤 부분을 회개하고 고쳐야 할까?” 우리가 천국 백성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합니다. 정확한 자기 객관화와 철저한 성찰! 그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이러한 슬픔은 하나님 백성에게 불가피한 것이며, 오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 백성으로서 필수적인 품성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슬픔이 하나님 백성의 시금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내가 슬픔이 싫어서 이를 거부한다면, 슬픔이 무서워서 잊어버리고 덮어버리려고 애를 쓴다면, 슬픔으로 인해 우울증에 빠져서 영원히 행복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온 힘을 다해 기쁨만을 추구하려고 한다면, 영원히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믿음의 선진들의 권면을 잊고 이러한 교훈을 싫어하고 무시하고 거부하고 반대한다면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하나님 백성이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기독교인일지라도 여전히 세상에 속해 있고 사도들과 믿음의 선진들과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진영에 서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내 속에 여전히 작동하는 죄 때문에 슬퍼하고 계신다면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복이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하실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


예수님은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놀라운 역설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은 기쁨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슬픔을 추구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진정한 기쁨을 영원히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진정한 위로와 기쁨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버지께 받는 복은 어떤 복입니까? 어떤 기쁨입니까? 


진정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슬퍼하고 있다면 사실 그 사람은 이미 회개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영적인 슬픔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적인 슬픔을 경험하고 있다면 저는 그 사람에 관해 참으로 확실하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성령께서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을 훼방하지 마십시오! 


자기 죄와 절망으로 인해 구주를 찾는 상태,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슬픔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임재하셔서 구세주에게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영광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을 믿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롬 7:25)라고 할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구원의 확신과 감격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진정한 위로를 경험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 7:24)라고 말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슬픔으로 인해 뒹굴며 울부짖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위로는 즉각적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깊은 슬픔으로 밀어 넣으실 때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극한 슬픔으로 밀어 넣으시면서, 동시에 우리 죄를 대신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밝게 비추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구원과 참된 죄사함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깊은 슬픔으로 인도하실 때만 주어집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하게 됩니다. 즉각적인 기쁨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인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고된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울 때는 마치 죽을 것만 같습니다. 내 몸과 마음이 끝없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서 잠자리가 나의 무덤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어떻습니까? 다시 세상이 살만하게 느껴집니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깊은 어둠도 다시 떠오르는 태양으로 인해 물러가듯이 끝없는 어둠에 갇혀 있을 것만 같았던 내 몸과 마음은 다시 살아갈 작은 희망으로 인해 하루를 시작하게 됩니다. 육체적 위로입니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육체의 위로가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허락하시는 영적인 위로는 어떠하겠습니까!


슬픔이 없이는 기쁨이 없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인의 삶은 슬픔과 기쁨, 고통과 환희가 교차하는 삶입니다. 매일이 그렇습니다. 자기 성찰로 인해 슬퍼하고 믿음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영원한 기쁨


하나님 아버지께서 슬퍼하는 자녀들에게 허락하시는 복은 즉각적인 복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허락하시는 복은 영원한 복이며 우리가 현세에서 경험하는 복보다 더욱 크고 놀라운 복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받은 우리도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우리의 구원은 아직 불완전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완전한 구원을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는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가 경험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롬 8:23–25)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롬 8:18)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진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단지 슬픔에서 벗어나고 잠시의 기쁨을 누리는 것에 불과한 사람에게 이 복음이 귀하게 느껴지겠습니까? 하지만 더 영광스러운 삶을 기대하고 더 높은 삶이 있다는 것을 믿고 그러한 영광스러운 삶을 하나님께 기대하는 영혼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무슨 희망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희망을 거는 모든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고 평생 써도 다 못 쓸 만큼의 돈을 번다고 하더라도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영생을 허락하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사랑과 정의로 이 세상을 바로 세우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마 5:4)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참된 말씀입니까? 이것을 알고 이것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용서받은 기쁨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던 때 먼저 사랑하셨던 그 사랑을 압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작정했던 나에게 찾아오셔서 이 세상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말씀해 주신 그 은혜를 압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 있다가 빛이신 예수님에 의해 발견된 기쁨을 우리는 압니다. 나의 슬픔을 모두 거둬가시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크고 영원한 기쁨에 대한 소망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을 모든 기독교인은 압니다.


슬퍼하는 사람


예수님이 말씀하여 주신 복이 있는 사람을 묘사해 봅시다. 복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슬픈 마음을 품고 있으나, 그 슬픔은 우울증 환자의 슬픔이 아닙니다. 슬픈 사람이지만, 비참한 사람은 아닙니다. 인생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루지만, 종교적으로 자기와 남을 억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생의 부정적인 면을 깊이 인식하는 사람이지만, 매사에 부정적이거나 냉소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인생의 선택에 있어서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람이지만, 우물쭈물하는 우유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두고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던지는 용감한 사람입니다.


참된 기독교인은 전도를 위해 행복한 모습을 가장하지 않습니다. 가면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세상에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에 다른 동료 죄인에 대해서 교만하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슬퍼하지만, 은혜로 인해 기뻐합니다. 피상적인 기쁨이 아니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신비한 기쁨으로 인해 얼굴은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벧전 1:8)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기쁨은 거룩한 기쁨입니다. 곧 없어질 일시적인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입니다. 질병이나 죽음으로 인해 즉시 사라질 연약한 기쁨이 아니라 병과 죽음조차 이길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을 닮아서 슬퍼하며 울지만,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십자가를 참습니다. (히 12:2)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음에서 살리셨듯이 그리스도와 함께 저 하늘에 앉히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그 밖에 어떤 열도 그들 위에 괴롭게 내리쬐지 않을 것입니다.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계 7:14–17) 아멘!하나님 아버지께서 슬퍼하는 모든 자녀들에게 영원한 기쁨을 허락하실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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