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께서 백성에게 하신 말씀(마 5:1-2) / 산상수훈 1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왕께서 백성에게 하신 말씀(마 5:1-2) / 산상수훈 1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께서 입을 열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마 5:1–2)
오늘부터 산상수훈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아시는 대로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를 말합니다. 산상수훈(山上垂訓)의 뜻은 예수님이 산 위에서 베푸신 교훈입니다. 산 위에서 베푸신 설교라는 의미로 산상설교(山上說敎)라고도 하고 산 위에서 베푸신 귀한 교훈이라는 의미로 산상보훈( 山上寶訓)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산상수훈의 배경에 해당합니다.
교회 밖에서도 산상수훈을 높이 평가합니다. 20세기의 성자라고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는 산상수훈에 관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은 종교 중의 종교다. 모든 종교의 다이아몬드다”라고 말했습니다. 간디는 산상수훈에서 영감을 얻어서 무저항 비폭력 운동을 전개했다고 말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간디는 매일 산상수훈을 읽고 묵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간디가 산상수훈의 예수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간디는 산상수훈을 “모든 종교의 다이아몬드다”라고 했는데, 사실상 간디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조차 파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서, 저는 세상 사람 모두가 산상수훈의 예수님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기본 진리, 특히 진리 가운데 핵심에 해당하는 산상수훈은 오직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만 이해할 수 있고 순종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에 관해 이런저런 말들을 합니다. 각종 매체에서 기독교가 쟁점이 되기도 합니다. 최근에 저는 즐겨듣는 팟캐스트에서 불교의 승려, 가톨릭의 신부, 이슬람의 이맘과 함께 기독교의 목사가 종교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나름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주로 자기가 속해 있는 종교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가끔은, 슬쩍슬쩍 다른 종교의 문제점을 비꼬기도 하면서 자기가 믿는 종교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재미있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듣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기독교를 대변한 목사님은 제가 생각하기에 매우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목사가 그런 자리에 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는 모르지만, 최소한 제가 믿는 기독교는 웃으며 가볍게 이야기할 만한 소재가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가십거리가 되어서는 안 되며 토론의 대상도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다른 종교 지도자와 비교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이같이 주장해 왔고 오늘 본문 말씀도 저의 견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표현으로 말씀드리자면, 기독교는 전형적인 “답은 정해져 있으니, 대답만 해”식 종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아마 기독교의 이런 점을 세상 사람들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싫어할 것입니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정해진 답으로 대답만 해 스타일”의 근본주의 신앙에 신물이 나서 독단적이고 일방적인 진리를 거부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습니다. 현대인의 정서에 맞게 기독교를 변화하려는 시도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는 애초에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며 일방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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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께서 입을 열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마 5:1–2)
본문 말씀에서 “산에 올라가 … 가르치셨다”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이스라엘에 전해준 모세보다 더 위대한 교사이신 예수님을 암시합니다. “앉으시니 … 가르치셨다”라는 말씀은 모든 위대한 랍비보다 더 위대한 랍비이신 예수님을 암시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왔다”라는 표현은 예배와 관련된 표현으로 예수님의 정체성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일련의 말씀들은 누구에게 베푸셨습니까? 무리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천국의 비밀을 제자들에게만 은밀하게 전수하셨습니다. 같은 이유로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귀한 말씀을 제자들에게만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은밀하고 깊은 관계,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자 중요한 특성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특별한 소수에게만 진리를 계시하셨습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이런저런 논평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 말씀을 마치신 후에 보인 7장 28절과 29절에 나타난 무리의 반응처럼 예수님의 권위에 놀라거나 “저것이 진리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과 무리 사이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높은 장벽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 사이에 장벽이 있습니까? 교회와 세상의 장벽은 낮아지다 못해 그 경계조차 희미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에는 많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1세기에는 그리스도인이 곧 제자였고, 제자가 곧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교회로 넘어오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을 감수해야 했고, … 저쪽과 이쪽은 윤리와 도덕, 인격과 삶, 살아가는 방식과 죽음과 삶의 태도까지, … 모든 것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저쪽은 세상을 지배하는 마귀가 형성한 죽음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었고, 이쪽은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저쪽은 명백히 마귀가 지배하는 나라였고 반면에 이쪽은 곧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이 이룬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었습니다.
오늘날, 세상과 교회에서 제자라는 말은 거의 사라지거나 왜곡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산상수훈의 말씀도 사라지거나 왜곡되었습니다. 교회를 보면 세상 같고, 세상도 때로는 교회보다 더 교회다운 모습을 보입니다. 매 주일 모든 교회의 신앙고백에서 “나는 교회를 믿는다”라고 외치지만 과연 교회를 믿고 있는 신자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교회와 세상의 경계가 희미해져 가는 점을 크게 우려하였습니다. 17세기에 완성되었고, 오늘날도 많은 보수 교회에서 세례 교육의 교재로 삼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에 의하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말씀에 따라 세상과 교회의 뚜렷한 경계를 확고하게 세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교회를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나누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2문은 “보이는 교회”에 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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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문. 보이는 교회는 무엇입니까?
답. 보이는 교회는 모든 시대와 온 세상에서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가 보이는 교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늘씨앗교회도 보이는 교회입니다. 하늘씨앗교인으로 등록하고 출석하며 앞으로 만들어갈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교인의 권리와 의무를 다한다면 우리 모두 보이는 교회의 일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이는 교회를 지역교회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교회는 무엇입니까?
64문. 보이지 않는 교회는 무엇입니까?
답. 보이지 않는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하나로 모이는 모든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모든 진정한 하나님 백성의 총회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교회를 어떤 사람들은 우주적인 교회라고 하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진정한 성도의 집합입니다.
초대교회 성도의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는 “디다케” 문서를 여러 차례 소개하였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디다케 문서를 시리아 지역의 어떤 교회의 신앙생활 규범집으로 봅니다. 말하자면 “보이는 교회”의 신앙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보이는 교회”로서 모일 때마다 성만찬을 하며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한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졌습니다. “보이는 교회의 성도”들이 “보이지 않는 교회”를 소망하며 모일 때마다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아들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신 생명과 지식으로 인해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께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산꼭대기에 흩어져 있던 곡식이 추수되어 쪼개진 이 빵 안에서 하나가 된 것처럼, 당신의 교회도 땅끝에서 모으셔서 당신의 나라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능력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디다케 9:3-4/개인역)
이 땅위의 모든 교회는 “보이는 교회”입니다. 여러분, …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크든지 작든지, 초라하든지 화려하든지, 진보이든지 보수이든지, … 모든 교회가 영광스러운 주님의 교회이며 예수님의 거룩한 교회입니다. 각 교회에 주신 축복의 분량에 따라 속한 지체들은 그만큼 주님의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핍절하고 어떤 교회는 충만합니다. 그럼에도, 모든 교회가 주님의 교회입니다.
하지만 이 땅의 교회는 실체가 아닙니다. 실체는 저 하늘에 있으며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야 “보이지 않는 교회”가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날에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선택하신 자녀들을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계시가 되어 있으며 이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모든 민족과 종교와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날에, …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는 제자가 아닌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눈이 부신 빛 가운데 우리가 모두 서 있어야 합니다. 그 밖은 깊은 어둠이고 빛과 어둠 사이에는 누구도 건널 수 없는 깊은 계곡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모든 천사들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무궁 하도록 있습니다. 아멘!’ 하고 말하였습니다.” (계 7:9–1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1문은 무리와 제자의 경계선을 다음과 같이 선명하게 표현하였습니다.
61문. 복음을 듣고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다 구원 받습니까?
답. 복음을 듣고 보이는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라고 모두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의 참된 지체들만 구원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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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과 서신서를 보면 초대교회 때는 교회와 세상의 경계선이 매우 뚜렷했다는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빠르게 훑어보겠습니다. “제자”라는 단어에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처음 교회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을 사도라고 부릅니다. 특별한 사명을 위해 주님께서 특별하게 선택하신 제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시간을 빌려 최초의 열두 명 이후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사도의 직분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아무튼, …사도 요한은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 (요일 1:1)
예수님이 부활하신 당시에는 제자들이 많이 늘어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 모두에게 나타나셔서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고전 15:6)
오순절 성령께서 임재하시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의 예언대로 성령의 임재로 부활의 증인이 될 예수님의 제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초대교회는 열두 제자와 오백여 명의 제자들에 덧붙여진 수많은 제자로 초대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과정이 사도행전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행 6:7)
“믿음에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제자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요? 다음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믿음은 “진리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예수님이 유일한 주님이시라는 고백”과 “오직 주님께만 순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바울은 회심하기 전에 제자가 아니었고, 무리도 아니었고, 예수님의 대적자였습니다. 명확하게 교회 밖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후에 바울이 예수님께 굴복하였고 믿음에 순종하는 제자가 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처음에 사도 바울이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이르러서, 거기에 있는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사울이 제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모두들 그를 두려워하였다.” (행 9:26)
결국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그리스도인, 즉 기독교인이라는 말이 초대교회 때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제자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 11:25–26)
우리는 신약 성경 전체에서 제자와 기독교인 사이에 어떤 간극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우리는 교회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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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께서 입을 열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마 5:1–2)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무엇입니까?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 가까이에 제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둘레에 무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 그룹을 둘러싼 무리들은 세상과의 경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무리들은 제자 그룹에 편성될 수도 있고 세상으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깥쪽에 세상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그리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동심원이 형성되어 있고 각각의 그룹 사이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교회의 모습을 싫어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구분하는 것도 싫어하고, 교회 내에서 무리와 제자를 구별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인류 역사에 면면히 내려온 차별과 혐오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에 싫어합니다. 교회 내에서 비성경적인 갈라치기가 너무나 큰 상처를 남겼기 때문에 싫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독재나 전체주의라면 너무나 지긋지긋하기에 교회에 전체주의의 그림자만 보아도 질겁을 하며 도망을 갑니다. 저 같은 사람은 본성적으로 권위에 굴복하는 것을 못 견뎌 하기 때문에 싫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떠올리기만 해도 너무나 힘들기에 아버지의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에 겹쳐 보여서 견딜 수 없이 싫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과 제자들과 무리를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인간끼리, 우리끼리 구분하고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구분하고 구별하는 것입니다. 사람끼리 갈라치기 하고, 사람끼리 서로 판단하고 구분하는 것은 성경이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판단하고 구분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엄히 명하셨습니다.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1–3/공동번역개정)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다른 지체를 판단하는 일을 그쳐야 합니다. 우리 중 누구에게 하나님께서 남을 판단할 권한을 주셨습니까? 사람에게 남을 판단하는 권한을 주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최소한 성경을 오해하였거나, 아니면 자기가 예수님이 보내신 모든 사도보다 뛰어난 자라고 스스로 착각하여 교만해진 사람입니다.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1–3/공동번역개정)
앞으로 산상수훈의 말씀을 들을 터인데 성경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제자로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지금, … 무엇을 말씀드리는 것입니까?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조차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떠올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에베소서 5장에서 하나님은 아내에게 남편을 순종하라고 명하십니다. 아내에게 말씀하시니 아내가 그 말씀을 받아야 마땅한데도 오히려 남편들이 더 은혜를 받습니다. 또, 하나님이 남편에서 아내를 죽기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남편이 은혜를 받고 순종해야 마땅할 텐데 아내가 은혜를 받아서 남편을 닦달합니다. 이 어쩐 일입니까!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3)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서의 갈라치기를 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강하든 약하든 구원의 여정에 있는 한 지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의 권면 대로 믿음이 강한 지체들은 믿음이 약한 지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빗거리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롬 14:1)
하나님은 이처럼 남을 비판하는 일에 대해서 매우 엄격하게 경고하십니다. 이 경고는 종말론적인 경고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대는 형제나 자매를 비판합니까? 어찌하여 그대는 형제나 자매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살아 있으니, 모든 무릎이 내 앞에 꿇을 것이요, 모든 입이 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롬 14:10–12)
아멘!
우리 각자를 구원하시는 권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내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롬 14:4/개역개정)
아멘!
우리는 교회는 민주주의도 아니고 전체주의도 아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민주주의의 폐해로 전체주의로 가서도 안 되고 전체주의의 폐해 때문에 민주주의로 가서도 안 됩니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를 섞어 놓아도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께서 입을 열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마 5:1–2)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로 전체주의 혹은 독재의 피해자입니다. 교회 역사는 지도자에게 너무 과도한 권한이 주어지면 큰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지도자가 자칫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게 되고, 그러면 교회가 주인이신 예수님의 인도를 받기보다는 인간이 지배하는 곳이 되고, 예수님을 닮은 제자들이 교회를 이루기보다는 인간 지도자를 닮은 복제품, 소위 “미니미”들이 교회를 이끌게 됩니다.
그때문에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의 전체주의적인 성격에 반대하여 그 대안으로 민주주의를 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안전하게 권한과 책임을 모든 성도에게 분산하는 것이지요. 어떤 면에서 한국에만 많은 장로교회가 그런 시스템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장로교회에서 목사가 성숙하더라도 미성숙한 장로들이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폐해를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폐해로 인해 전체주의가 대안이 될 수가 없듯이 전체주의의 폐해로 민주주의가 대안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오직 주님만이 왕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께만 순종하지 않으면 세상의 대안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중심에는 오직 우리 주님만이 앉아 계셔야 합니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 교회는 왕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왕정 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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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님은 우리가 충성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엡 1:20–22)
우리 왕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마 3:13-17) 세례를 받으신 후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나님이 임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비둘기같이 당신에게 임하시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때, 하늘에서부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마 3:17) 하나님이 하늘을 여시고 직접 인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모든 공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한번의 특별한 계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라고 한 베드로의 고백한 직후에 주어졌습니다. 우리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마 17:1-8) 그 산에서 하나님은 율법과 선지자가 계시한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계시하셨습니다. 이 장면 또한 모든 공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 같이 빛났고 옷은 세상에서 볼 수 없는 흰 색으로 밝게 빛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빛난 구름이 제자들을 덮었습니다. 구름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마 17:5) 예수를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모든 신자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마 17:5) 제자들은 땅에 납작 업드려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말씀이 들리십니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여러분의 마음에 비춰주셨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 경배하며 왕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여러분 마음에 울려 퍼질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기 이전과 이후에 우리는 같은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이전에는 무리였지만 이후에는 제자가 됩니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경배와 순종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께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은 최초의 제자들에게 이같이 명하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 28:18–20)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내 마음속에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아닙니다. 내 마음속에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온 맘을 다해 사랑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내 삶을 변화시키시고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받은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고후 3:6)
우리가 기독교의 진리만을 따르면 우리는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는 반드시 삽니다. 여러분! 이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간디가 보지못한 산상수훈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다”(요 6:63)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며 주님께만 충성해야할 이유입니다.
우리가 모두 주님의 제자가 되어 이 교회가 속히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이 땅에 두신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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