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마 5:3) / 산상수훈 2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마 5:3) / 산상수훈 2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 5:3)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 전체를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그중 5장 3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을 팔복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덟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팔복이라고 합니다.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팔복 중 첫 번째 말씀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 5:3)
서론
이 말씀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산상수훈 전체의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산상수훈이라는 크고 화려한 건물로 들어가는 현관입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집안에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친구 집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 집은 현관부터가 다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오늘 말씀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의 열쇠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나름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와 힌두교, 이슬람도 궁극의 종교적인 목표로 들어갈 나름의 열쇠를 제시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 곧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를 말씀하셨습니다.
천국 백성의 특성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 5:3)
어떤 사람들은 미래의 천국, 미래의 하늘나라만을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죽고 나서의 하늘나라, 혹은 이 세상이 끝장난 이후의 하늘나라만을 논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늘나라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늘나라는 예수님 때 시작되어 지금도 자라고 있으며, 미래에 완성될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눅 11:20)라고 2,000여 년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우리에게 현재 진행형입니다. 겨자씨 하나가 매우 작지만 자라서 큰 나무가 되듯이, 다가올 미래에 예수님은 수많은 하나님 백성을 천국으로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그때 천국은 비로소 완성됩니다.
천국은 우리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천국이 언제 완성될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막 13:32) 분명한 것은 반드시 천국이 완성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모든 천국 백성이 하나님의 주권과 권세에 기쁨으로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권세를 받은 모든 천국 백성은 마치 왕처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계 22:5) 그곳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백성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속한 모든 권세를 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 21:4)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 5:3)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이것저것을 추구하거나 이런저런 것을 소유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소유하는 동물입니다. 물건을 사기는 쉽고, 물건을 버리기는 어려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 우리 인생에서 하늘나라를 소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소유하고 계십니까? 하늘나라가 여러분의 것입니까?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만 천국을 가진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천국에 있다고 해 봅시다. 죽었다가 눈을 떠보니 하늘나라에 와 있다고 해 봅시다. “아, 여기가 천국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주위를 둘러보니,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고 해 봅시다. 우리는 무지개 색보다도 더 다양한 사람 가운데 공통된 하나의 특성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천국을 소유한 다양한 사람들 가운데 단 하나의 유일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천국 백성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가 “마음의 가난”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마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 5:3)
개역개정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개역개정)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저는 개역개정의 번역이 오히려 오해를 피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새번역 성경이 “마음”으로 번역한 헬라어 원형은 “성령”, 혹은 “영”으로 번역하는 “프뉴마”(πνεῦμ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영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번역해도 좋습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틀린 번역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마음은 현대인이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 인격의 가장 깊은 부분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현대인들은 마음이라고 하면 감정을 떠올리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이 아프다”라는 표현을 들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마음은 우리 인격의 가장 깊은 부분, 하나님의 영과 소통하는 가장 깊은 곳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어디에 거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우리와 교제하시는 장소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자기의 것이라는 표로 인을 치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고후 1:22)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너는 내 것이다”라는 보증으로 증거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성령께서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갈 4:6)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아들의 영을 보내 주셔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어디에 보내주십니까? 마음에 보내주십니다.
우리 마음은 단지 우리의 지성이나 감정이나 의지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입니다.
우리가 믿을 때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에 거하십니다. (엡 3:17) 또한, 우리 마음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고전 3:16)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하시면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이 됩니다. (롬 8:9)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하셔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비로소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가 있습니다. (롬 8:15) 우리가 연약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우리 마음속에 계신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해 주십니다. (롬 8:26)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실 때 우리는 예수님의 동생 유다가 말씀하신 “성령으로 기도하라”(유 20)의 참된 의미를 알고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우리 마음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잠 4:23)라는 잠언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증거로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말씀을 오늘 말씀과 연결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을 다스리셔야만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성령이 그 마음을 다스리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나라에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 5:3)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늘나라를 가질 수가 있습니까? 마음이 가난해야만,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야만, 우리의 영이 가난해야만, … 하나님께서 우리를 채우시고, 다스리시고, 왕이 되셔서 우리 마음을 통치하기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의 빈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시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십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며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눅 17:21)라고 하신 진정한 의미입니다. 깨끗하게 비워진 우리의 마음,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복으로 가득 채우시고 주님 뜻대로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이며 이것이 “가난한 마음”의 의미입니다.
술병에 담겨 있는 오래 묵은 술을 비워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포도주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복음에는 항상 두 가지 면이 동시에 있습니다. 채우기 위해 먼저 비워야 합니다. 먼저 허물어버리고 난 후에 새로 세우는 것입니다. 절망이 먼저 오고 그다음에야 희망이 떠오릅니다. 회개가 먼저 있어야 구원이 그다음에 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 이처럼 단순합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됩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선택하신 백성은 필연적으로 가난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텅 빈 마음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셔야만 텅 빈 그 마음을 채울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마음에 당신의 복을 가득 채우시는 데, …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시편 16편, 특히 2절 참조)
가난의 의미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 5:3)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지 않고 “가난한 사람은 심령에 복이 있다”라고 꼬아서 읽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단지 “가난한 사람”(눅 6:20)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누가복음을 근거로 “가난한 사람은 심령에 복이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가난을 높이면서 동시에 “물질의 복”보다 “마음의 복”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지 않고 부분적으로만 읽은 결과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단 한마디로 배격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 어디에도 가난을 권장하거나 가난 자체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가난을 이상화하고 가난 자체를 추구하는 영성은 잘못된 영성이며,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경험으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가난한데도 부유함을 추구하고 부유함에 자신의 인생을 기대려고 하는 가난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반면에 부자인데도 부유함을 추구하지도 않고 부유함에 의지하지 않는 부자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일 것입니다. 물론, 소수이지만 성경의 인물이나 역사적인 인물 가운데서도 자신의 부유함에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한 부자들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부자인 가난한 사람도 있을 수가 있고, 마음이 가난한 부자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물질적으로 부자인 사람도,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불쌍한 죄인일 뿐입니다.
영적 가난
우리 주님의 강조점은 물질에 있지 않고 영에 있습니다. 천국의 문제는 물질의 소유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의 가난함, 심령의 가난함, 프뉴마, 즉 우리 영의 가난함을 강조하십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요. …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철저하게 무력하다는 것을 아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인식하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마주 대할 때 느끼는 절망과 무력감입니다. 사람과 비교해서 느끼는 열등감이나 절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느끼는 엄청난 무력감이며 철저한 절망입니다.
아까, 함께 불렀던 388장 찬송가는 요한 웨슬리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가 작사하였습니다. 우리말 찬송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3절 하반부의 가사 원문은 이와 같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의롭고 거룩하오나 나는 온통 불의뿐이오며, 나에게는 죄악이 충만하지만 예수께는 진리와 은혜 충만하도다” - 찰스 웨슬리
이렇게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선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 영적으로 얼마나 비루한 거지에 불과한지,… 그리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 사람은 진리와 은혜가 충만한 예수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나에게는 죄악이 충만하지만, 예수님께는 진리와 은혜가 충만합니다” 이러한 고백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가톨릭이 추구하는 영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청빈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승려와 목사와는 달리 가톨릭 신부들은 구조적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신부들이 대체로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청빈한 삶을 평범한 중산층의 삶보다 더 고귀한 삶으로 보는 견해의 강력한 후원자가 바로 성 프란치스코일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목사가 청빈하면 존경을 받습니다. 대형 교회 목사가 경차를 타고 다니거나 부 교역자와 같은 사례금을 받으면 크게 존경을 받습니다. “아 저분은 하나님의 사람이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야”라고 하며 우리들은 그분의 설교에 대해서 더욱 깊은 신뢰를 보냅니다. 교회와 교회의 자원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아낌없이 베푸는 방향으로 목회한다면 더욱 존경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이 천국을 가질 만한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사역이 건전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사실은 건전한 사역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사역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목회적인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 특히 은퇴, 배우자, 자녀의 문제 앞에서 올바르게 처신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아뢰는 기도,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성도의 순종, … 이러한 것은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영역입니다. 마음의 영역이며 영의 영역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이 진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삶
만약 우리 마음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다면 필연적으로 사회생활이나 교회 생활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생활이나 교회 생활이 진정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의 생활인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종종 “가난한 마음”이라는 것을 잘못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면접 볼 때, 기독교인 청년이 가난한 마음을 가진 모습을 보인다면 취업할 수가 있겠습니까? 직장 생활에서 소위 겸손하다 못해 자기 능력을 증명해 보이지도 못한다면 직장인으로 생존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의 가난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직장에서 실패하고 신학 대학원에 들어가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게 보이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단지 소심하거나 용기가 부족하거나, 교제에 익숙하지 않거나, 수줍음이 많은 경우가 많습니다. 본래 태어나기를 주제넘게 앞에 나서기를 불편해하고, 항상 뒤에 숨어 있기를 좋아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고 나서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겸손한 모습으로 예의 바른 말을 하고 늘 양보하고, 모든 일에 앞장서기보다는 뒤에 숨어서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높이고 “저 사람이야말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다”라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를 수가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가난한 마음”이 아니라 “병든 마음”인 경우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기질적으로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자신의 기질을 억압하여 엄청난 노력으로 자신을 착한 기독교인으로 만들며 스스로 자기 기질을 억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교회에서 참 기독교인으로 평가받기도 하고 우리는 이런 권사님, 집사님들을 “천국에 갈만한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들이 갑자기 우울증에 걸려 자살하더라도 저는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너무 극단적인 이야기라고 나무라시겠지만, 이것이 현대 기독교의 현실이며 저의 경험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기질이 억압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질이 하나님에 의해서 긍정적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질을 억압하시는 분이 아니라 기질을 선하게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성정과 기질을 만드신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녀를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사용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마음을 다스리시는 과정에서 마음의 모든 질병을 치유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우리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모든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다스림을 받다가 저 하늘에서도 영원히 하나님과 동행하며 다스림을 받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진들
우리는 성경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신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기드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기드온을 부르셨을 때 기드온은 이같이 고백하였습니다.
“… 감히 여쭙습니다만,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습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나의 가문은 므낫세 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약하고, 또 나는 아버지의 집에서도 가장 어린 사람입니다.” (삿 6:15)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 중에,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모세부터 사도 바울까지 하나님이 만나주신 축복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할 사람들을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왕이 되어 주셨습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은 자기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였기에 적들에 둘러싸여서도 다음의 고백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 (시 27:1)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바울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기질이 변했습니까? 아닙니다. 이전에는 혈통이나 가문, 지식이나 학문,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그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자기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사역에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는 약하였으며, 두려워하였으며, 무척 떨었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고전 2:3–5)
마지막으로 베드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괄괄한 사람이었고 공격적인 사람이었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었고 자신감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가 현대인이었다면 세상에서도 크게 성공한 사람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자신감 충만했던 베드로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베드로는 주님 앞에 납작 엎드려서 “…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눅 5:8)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베드로는 이전에도 베드로였고 이후에도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의 기질은 여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다스리시고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시고 천국 백성의 모습으로 빚어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눅 22:31-32 참조) “…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눅 5:8) 이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베드로후서 마지막 부분에서 베드로가 동료 사역자인 바울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십시오. 여전히 괄괄한 베드로였지만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의 품성이 베드로 안에 나타났습니다. (벧후 3:15-16 참조)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도 여전히 베드로는 담대한 사람이었고 전혀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점점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 갔습니다.
결론
가난한 마음과 관련해서 우리 주님을 빠뜨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초대교회의 찬송가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 5:3)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의 완벽한 해석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 2:6–11)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입니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 이것이 복음입니다. “낮추시고 … 높이시고”
이 땅에 계실 때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 (요 5:30)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 14:10)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전적으로, … 절대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의존한다.”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기도를 살펴보십시오. “…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마 26:39) 이것이 바로 가난한 마음의 정수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증명이 됩니다. 여러분과 저의 깊은 기도 가운데서만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도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의지와 열망을 하나님께 숨김없이 아뢰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기대와 걱정 모두를 하나님께 아뢰고 계십니까? 세상의 전문가들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십니까? 여러분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계십니까? 살아계시고 참되시며 당신의 자녀들을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고 계십니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팔더라도 천국을 살 수가 있다면, 평생 거지 나사로처럼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늘나라가 여러분의 유일무이한 희망이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복이 있습니다. (마 13:44 참조)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 5: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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