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사람들 (마 5:5) / 산상수훈 4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마 5:5) / 산상수훈 4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마 5:5)
오늘은 팔복 중 세 번째 복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리고 온유한 사람이 차지할 땅은 무엇일까요?
먼저,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것인데 … 하나님 나라가 돌아가는 방식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과 완전히 반대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칙은 세상의 법칙과 정반대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누가 땅을 차지 합니까? 세상에서는 온유한 사람이 아니라 힘이 있는 사람이 땅을 차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힘이 있는 사람이 더 많은 돈을 가지게 됩니다.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 더 큰 힘을 가지게 됩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는 권력과 소유입니다. 권력을 가지면 가질 수록 더 많이 소유하게 되고 많이 소유한 사람은 더 큰 권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힘을 추구하고 최대한 힘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과 정반대의 원리가 작동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힘을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힘이 없는 사람이 땅을 차지합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유함의 품성을 가진 하나님 백성은 세상 사람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존재입니다. 이해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온유한 사람들에 의해서 확장되어 왔습니다. 결국은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며 온유한 자들만이 남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온유함의 근원
예수님 당시의 대부분 유대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꿈꾸던 하나님 나라는 메시아가 힘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그런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유대인들이 소망했던 하나님 나라는 힘을 숭상하던 로마 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빨리 와서 군사력으로 로마를 몰아내고 온 세상을 다스릴 것을 고대하였습니다. 그런 형편이니 당시 대다수 유대인의 눈에 예수님이 어떻게 비쳤겠습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마 11:29)
우리 주님이 당신에 관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온유한 분이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온유함은 이미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소리 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할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사 42:2–3)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이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그대로 성취된 것을 보았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자비를 베푸는 것보다 안식일 준수를 목숨같이 여기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마 12:9-14)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유대인이 기대했던 메시아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조용히 거기를 떠나셨습니다. (마 12:15) 그리고 회복한 환자에게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습니다. 마태가 이것을 기록할 때는 이미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였습니다. 마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당신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향해 온유하고 겸손하게 행하시는 모습을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믿었습니다.
“…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 (마 12:18–21)
이 말씀에서 “상한 갈대를 꺾는 것”과 “꺼져 가는 심지를 끄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은유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면 죄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을 심판하시면 죄인에게는 영영 기회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최종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에 모든 소망이 끊어지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꺾으시거나 끄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을 이끌어 내셔서 오히려 세상의 빛이 되게 하십니다. (사 42:6-7) 우리가 믿고 충성해야 할 예수님이 이런 분이셔서 우리에게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이 온유한 분이 아니셨다면 이 자리에 이렇게 있지 못했을 사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방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른뺨을 때리는 자에게 왼뺨도 돌려대는 것입니다. 비폭력입니다. 복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울타리를 치지 않는 것입니다. 방어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힘이 있지만 힘을 사용하지 않고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자세, … 이것이 온유함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 …. 겸손한 자세입니다. 성경에서 온유와 겸손은 항상 같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칼과 몽둥이를 든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이 칼을 빼어서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서 귀를 잘랐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를 저지하시고 종의 귀를 고쳐주셨습니다. (눅 22:49-51)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 너희는 내가 나의 아버지께,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시기를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마 26:52–54)
이것이 예수님의 온유입니다. 힘을 사용하지 않고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자세, … 이처럼 하나님 백성의 온유는 하나님의 뜻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온유함의 극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타났습니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 (눅 22:42)
사람에게 온유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더욱 온유하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온유하지 않으면 타협하거나 절충하거나 해서 “윈윈”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유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은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온유의 반대말은 교만이고, 목이 곧은 것이고, 고집이 센 것이며,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신 9:6/개역개정)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이 좋은 땅을 당신들에게 주어 유산으로 차지하게 하신 것이 당신들이 착하기 때문이 아님을 당신들은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당신들은 고집이 센 백성입니다.” (신 9:6)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예수님을 닮아서 세상에 대해 온유하였습니다. 요즘 일부 기독교인들처럼 힘과 세력으로 뭔가 해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비폭력으로, … 온유함으로 적대적인 세상을 대하고 이웃을 대했습니다. 심지어 지체들이 핍박을 당하고 순교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원수를 심판하지 않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의 힘으로 실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요즘 교회가 종종 그렇게 하는 것처럼 숫자에 의지하지 않았고 권력에 의지하지 않았고 세력을 키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분명히 예수님을 닮아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모든 천국 백성들은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온유함을 이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완벽한 주석입니다. 예수님이 온유하셨으니, 너희도 그렇게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빌 2:5–9)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신 것이지요. 권리 주장을 포기하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종이 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온유함이며 모든 하나님 백성의 온유함의 근거입니다. 예수님의 온유하심으로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는, 예수님과는 달리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우리는, … 더욱 겸손해지고 더욱 온유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은 초대 교회의 찬송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에 관한 이 말씀을 왜 하셨습니까? 빌립보 교회 안에 온유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 구절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빌 2:3–4)
이 말씀은 온유에 관한 좋은 해설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남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충성할 뿐입니다. 또 온유한 사람은 교만으로 자만하지 않습니다. 겸손합니다. 다른 지체에 대해서 까다롭지 않습니다. 자기가 아니라 다른 지체의 입장을 깊이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온유함의 기원은 예수님의 온유함입니다. 어떤 온유함입니까? 동등하지만 동동함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닮은 온유한 사람은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더 낫게 여기셨듯이 우리도 서로 다른 지체를 나보다 더 낫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사람은 사람에게도 온유하다고 굳게 믿습니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체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더 낫게 여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자신도 다른 지체도 하나님 앞에서는 가난하며 슬프며 온유할 수밖에 없는 자임을 분명히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객관화가 분명히 이루어져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시각으로 냉철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온유한 사람은 경쟁심을 극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지 않습니다. 다른 지체에게 기쁜 일이 있으면 진정으로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자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자존심의 근거는 자기도 아니고, 남도 아니고, 오직 나를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 내 자존심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온유
온유한 품성이 육적 품성이 아니라 영적 품성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영적입니까? 하나님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관련이 있는 것은 모두 영적입니다. 팔복 말씀에 나타난 기독교인의 품성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관여하셔야만 형성됩니다. 우리의 중생도 그렇듯이 우리의 성화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팔복에 나타난 기독교인의 품성은 인간의 유전자가 아닌 하나님의 유전자에 의해 발현됩니다.
우리 중, 태어날 때부터 온유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온유한 사람으로 거듭나고 온유한 사람으로 자라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본래 온유한 사람이었습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롯에게 모든 선택권을 맡겼을 때 저는 아브라함이 온유라는 하나님 백성의 특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마땅한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 그 태도가 하나님께서 복을 가득 부어주시되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주실 수 있는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어떠했습니까? 신명기 12장 3절에 의하면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본래는 자만심으로 가득 찬 이집트의 왕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낮추셔서 오랜 세월에 걸쳐서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로 만드셨습니다. 그 오랜 세월 온유한 자가 되기 위해서 모세가 했던 고생과 하나님께서 가지셨던 열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비록 그가 생애 마지막에 온유함의 시험에서 실패하였지만(민 20:11-12), 세상에서 가장 온유했던 모세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위대한 사역에 참여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했던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힘으로 원수를 갚았습니까? 자기의 힘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에 온유하고 겸손하게 맡겼습니다. 본래 다윗이 온유한 사람이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온유함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때에 당신의 뜻을 이루실 수가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어땠습니까? 모든 이스라엘이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이스라엘의 살길을 전했습니다. 스데반은 어떻습니까? 또 바울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바울의 본래 성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동물은 타고난 품성이 있습니다. 순한 개도 있고 사나운 개도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품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절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온유함이 나에게서 먼 것 같고 온유함은 나에게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순종하기로 결단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백성은 반드시 온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온유해야 천국에서 땅을 차지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믿음의 선진들 가운데 날 때부터 온유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돌같이 딱딱한 마음을 부드럽게 합시다.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순종과 감사로 나 자신을 맡겨 드립시다. 돌같이 딱딱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빚으시겠습니까? 우리 마음의 가장 딱딱한 부분은 아마 “나는 변하지 않을 거야!” 혹은 “내가 변하는 것은 불가능할 거야!”라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사랑하시면 정을 맞아 깎여 나가는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변할 수가 있다면 그 고통은 오히려 은혜입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고 만약 우리를 이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신다면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채찍은 오히려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신다면 정말 우리에게 큰일이 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온유한 사람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으로 만드셔서 약속하신 땅의 축복을 받은 것이 모든 기독교인의 운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천국 백성을 반드시 그렇게 만드십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년에 기록한 글들을 읽어보십시오. 베드로도 온유한 사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에게 바울은 굴러들어온 돌일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바울에 관해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이 천국 백성의 품성입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온유해진 베드로의 이 말씀은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으로 아무 탈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 자기가 받은 지혜를 따라서 여러분에게 편지한 바와 같습니다. 바울은 모든 편지에서 이런 것을 두고 말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어서 무식하거나 믿음이 굳세지 못한 사람은 다른 성경을 잘못 해석하듯이 그것을 잘못 해석해서 마침내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불의한 자들의 유혹에 휩쓸려서 자기의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과 그의 은혜 안에서 자라십시오. 이제도 영원한 날까지도 영광이 주님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벧후 3:13–18)
온유한 사람의 복
마지막으로 온유한 사람이 받는 복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세상 사람과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고후 5:17) 기독교인은 모두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요 3:5) 기독교인은 모두 마귀의 나라에서 하나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골 1:13)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잠시 살다 가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벧전 1:17) 예수님을 믿으며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모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이러한 정체성이 확고합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놀라운 변화들은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인이 앞으로 받아 누려야 할 복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복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미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남아 있는 축복이 훨씬 더 많다고 증언합니다. 땅을 차지한다는 본문 말씀의 표현이 천국 백성이 앞으로 받을 축복에 관한 것입니다. “좀 더 원합니다. 좀 더 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들의 마음입니다. 다음번에 설교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 관한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하나님, 아직 배가 고픕니다. 아직 목마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에게 앞으로 성도가 받을 축복은 지금 에베소교회 성도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엡 1:17–18)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사랑하는 하늘씨앗교회 지체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믿으셔야 합니다. 사도가 왜 날마다 간절하게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했겠습니까? 모든 성도가 더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그리고 얼마나 풍성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이며 이것이 기독교인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롬 8:32)
지체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천국에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날마다 날마다 누리는 축복이 더욱 놀랍지 않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 주신 분이 당신이 가지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선물로 주셨습니다. 복음을 믿으십시오. 사도들의 증언을 믿으십시오. 신약성경에 쓰인 모든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묻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각 문장, 각 단어에 예수님의 피가 묻은 도장을 찍어 놓으셨습니다. 믿는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무게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실 하나님의 모든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상속”이며 “기업”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온유한 자들에게 약속하신 땅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성도가 미래에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현재의 삶을 다르게 살아갑니다. 다르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약속에 대한 믿음은 우리 현재의 삶을 충분히 변화시키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의 자랑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뿐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권리는 이 세상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더라도 아깝지 않을 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 까다롭거나 민감하지 않습니다. 남의 시선에 대해 방어적 자세를 취할 필요도 없고 남의 평판을 높이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고, 남들이 나에 관해 어떻게 이야기할지 염려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품 안의 어린아이처럼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 품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만족합니다. 결국 온유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방어하지 않습니다. 방어한 만큼 가치 있는 것이 자기 속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국 백성과 세상 사람들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존재의 근거가 나에게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께 있느냐입니다.
현재의 삶의 변화가 없다면 사실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대적하고 무시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망하십니까? 자기 안에 아무런 선한 것이 없다고 느끼십니까? 그래서 슬픕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슬픈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엡 1: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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