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씨앗교회

자비한 사람들 (마 5:7) / 산상수훈 6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자비한 사람들 (마 5:7) / 산상수훈 6

 

팔복의 다섯 번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팔복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의 가난함”, “슬픔”,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 … 그리고 오늘 말씀인 “자비함”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팔복 말씀은 일종의 시금석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천국 백성과 세상 사람을 분별하는 시금석 말입니다. 우리가 팔복 말씀을 살펴보면서 스스로 이렇게 물을 수가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런 그리스도인의 특성이 있는가?”


또한, 팔복 말씀은 우리를 비춰주는 일종의 거울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팔복 말씀은 하나님의 표준으로 우리를 비춰보는 거울입니다. 이 거울에 비춰보면 우리의 모자란 부분을 정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거울은 하나님 백성의 본질적인 모습,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결국은 영화롭게 하실, … 하나님 백성의 궁극, … 마지막 날에 완성될 궁극의 표준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 백성의 표준 중에 “자비함”이라는 표준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 5:7)


자비란 무엇인가?


우리말 사전을 찾아보니 자비는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 또는 그렇게 여겨서 베푸는 혜택”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또, “그렇게 여겨서 베푸는 혜택”은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말에서 자비는 사람의 마음 자세와 행동, 둘 다와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자비도 우리말과 비슷합니다. 마음 자세와 행동 둘 다를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만 하는 것은 온전한 자비가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온전한 자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로 모였습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자비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자비가 이곳에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에 대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비로운 마음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자비한 마음은 자비의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유명한 비유가 이 점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의롭게 보이기를 원하는 율법 교사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눅 10:25-37)를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이 강도 만난 불쌍한 사람을 피해서 지나쳐 갔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대표인 레위 사람도 불쌍한 사람을 피해서 지나쳐 갔습니다. 이들 종교인에게 강도를 만나서 쓰러져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었겠습니까? 분명히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 마음의 자세, 감정,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공감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자비에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우리의 마음은, … 그 동기가 아무리 거룩하고 순수하다고 해도, 그 마음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자비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요일 3:17)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 사마리아인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른다고 여겨지는 사마리아 사람만 강도 만난 불쌍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종교인이 가질 수 있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어떤 위험입니까? 행동하지 않을 위험입니다. 변화된 마음을 자랑하면서도 변화된 행동을 보이지 않을 위험입니다. 위선의 위험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마음은 무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면에서 무익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무익합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데 무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 때, 우리의 마음이 아니라 행위로 심판하신다고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율법 교사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물으셨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대답했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우리도 서로에게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자비를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형제자매의 고통이 보이면 외면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영적인 도움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덧붙여서, 육적인 도움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지체의 고통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머물겠습니까? 


도와줄 마음이 있어도, 내게 도울 힘이나 방안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내게는 힘이 없더라도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지체가 어떠한 지경에 놓여 있더라도 하나님은 능히 구하실 수가 있습니다.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강력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자녀의 기도를 당신의 사랑과 자비의 통로로 삼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저도, … 깊은 어둠에 빠져 있을 때 지체의 기도로 어둠에서 벗어난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기도함과 동시에, 가능하면 즉시 교회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 전체에 알리지는 않더라도, 몇몇 지체가 지혜와 힘을 모을 수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 4:12)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도우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공동체에 개인적인 일들이 불필요하게 알려져서 고통을 당하는 지체가 2차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일을 만드는 공동체는 미성숙한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체의 고통을 공동체가 알지도 못하고, 돕지 못하고, … 고통을 당하는 지체가 혼자 외롭게 견디게 둔다면 그러한 공동체는 참으로 주님께 불충한 공동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데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조건 도와주는 것이 자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거룩한 자비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고자 할때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약 1:5)


때로는 너무 황망해서, …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난을 겪는 지체도 기도할 수 없을 만큼 낙망해 있고, 자비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나도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도마저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로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도 우리는 자비의 손길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롬 12:15) 이것이 사도의 교훈입니다. 할 수 있는 한 우리는 고통받는 지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자비가 이 교회에 머물 것입니다. 


타고난 자비가 아니다


사이코패스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사이코패스 비율이 1%라는 연구가 있었습니다. 100명 중에 한 명꼴로 사이코패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작은 교회라 사이코패스가 한 명도 없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이 논문에 직장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공감하실만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일반인의 경우는 사이코패스가 1%인데 경영인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보면 비율이 4%로 급증한다고 합니다. 사회생활을 할 때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오히려 성공할 수 있는 요건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아무튼, 세상이든지 교회든지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는 공감 능력이 필수적입니다. 현대 과학은 공감 능력이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훈련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해서 논쟁이 분분합니다. 타고난 것이든 학습으로 된 것이든 사람마다 공감 능력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공감 능력의 차이가 자비를 베푸는 일에 대한 핑계는 될 수가 없습니다. 본래부터 친절하고 자비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기질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비한 사람이 되기에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팔복 말씀을 통해 계속 알게 되는 바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성들은 태생적인 것, 생래적인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요인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감 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세상의 고통을 감당하고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공감을 차단하는 기재를 발달시켜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공감이 너무 힘들어서 처음부터 차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있을 테니까요!


어쩌면, 현대 사회의 고통이 너무 많아서 흘러넘치기에 자비가 줄어드는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옛 어른들은 멀리 떨어진 가자 지구의 고통을 알지 못했기에 공감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전 세계의 고통을 실시간으로 알고, 보고, 느끼고 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자연히 공감 능력을 차단하는 기재를 발달시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 멀리 팔레스타인의 대학살을 뉴스로 보면서 맛있게 식사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타고난 공감 능력이 부족할 수도 있고, 자라난 환경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게으름이나 이기심 같은 기질의 문제일 수도 있고 과거의 상처나 트라우마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수 많은 핑계거리와 이유가 있을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오늘 예수님 말씀은 우리 모두를 향한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는 것처럼 하나님 백성의 특성은 태생적인 것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의 특성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비는 유전이나 기질이나 환경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자비를 행함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라.”라고 하지 않으셨고 “하나님 나라 백성은 자비한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자비라는 성품을 분명히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아주 작은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 놀라운 일을 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17:20) 그 믿음이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있는 작은 자비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비는 혈통으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않았고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요 1:13) 하나님 백성이 가진 모든 선한 것들은 세상의 것과 비슷해 보일지라도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더욱 뛰어난 자비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 모두에게 자비의 씨를 심어 놓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타락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세상 사람이 신자들보다 더 자비로운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 (마 5:45)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으면 세상은 벌써 지옥이 되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선한 것들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약 1:17)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비한 사람을 보면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이든지, 그리스도인이든지 고귀하게 보입니다. 자비한 그 사람이 자기 행위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하지만,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을 보면 멋져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고,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모든 자비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한 동료 인간으로서 그분이 비록 멸망에 빠져 지옥에 갈 불쌍한 인생이지만 그 안에서, … 때로는, 오히려 위선적인 종교인들보다, …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더 많이 발견합니다. 알지만 행동하지 않는 위선적인 종교인보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이 더 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자비라고 무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육적인 자비와 영적인 자비를 나누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 버리고 말았습니다. 감정을 차단하고 이성을 내세우는 것이 마치 더 영적인 것처럼 가르치다가 지체를 향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오히려 막아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전인적이며 이성과 감정을 모두 포함합니다. 복음의 우수성은 인간성을 버림으로써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특성이 나타남으로써 증명됩니다.


모든 종교가 자비를 말합니다. 다른 종교의 자비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자비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비가 더 뛰어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해질 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우수성은 증명됩니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선한가 더 선한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하나님 백성의 표준으로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


제가 가진 성경신학사전은 “자비가 하나님의 고유한 특성”(“IVP성경신학사전”, 1017P)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자비라는 특성은, 곧 하나님의 특성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하나님 고유의 특성을 찾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들은 어린 자녀의 어떤 특성이 부모와 닮았을 때 참으로 기쁩니다. 자녀가 더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서 자비함을 발견하시면 더욱 풍성한 자비를 자녀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엡 2:4–5)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벧전 2:10)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골 3:1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패턴이 보이십니까?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패턴,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요일 4:19–20)


이러한 패턴은 팔복 말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본질이 행동보다 중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비한 행동을 하라고 명령하시기 이전에 자비한 특성, 자비라는 본질, 자비한 마음의 자세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존재가 행위보다 중요하다는 흔한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지극히 복음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하기 이전에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Being이 Doing에 앞섭니다. 이러한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사도들도 먼저 하나님이 행하신 일, 즉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해 먼저 말한 다음에 “그러므로, 너희는 이러저러하게 행동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의 패턴입니다. 본질이 먼저 있고 행위가 그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교훈은 예수님의 교훈을 따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 증명


예수님은 산상수훈 말씀 중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잘못 해석하면 행위를 본질보다 앞에 두고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행위를 본질보다 앞에 두고 해석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용서해야만 하나님도 용서하신다”라고 해석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됩니다.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용서를 받은 자는 당연히 이웃의 잘못을 용서한다”라는 뜻입니다. 이 본문에 관해서는 산상수훈 설교를 계속해 나가며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산상수훈이 기록된 마태복음에 용서에 관한 중요한 교훈이 또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 18:21-35)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를 얼마나 용서해야 하는지를 여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산상수훈의 용서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을 이야기로 만드셨습니다. 거액을 탕감 받는 종이 몇 푼 되지 않는 친구를 감옥에 보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교훈의 말미에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 18:35)라고 하신 것은 우리의 용서를 조건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우리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이해할 수가 없는 복음의 역설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존재에서 우리의 행위가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 했기 때문에 우리도 지체에게 자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여러분, 정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과 우리의 말과 행동이 우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 매 순간, … 우리는 하나님과 천사들과 믿음의 선진들과 세상 사람 앞에서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인가! 나는 진실로 큰 용서를 받았는가? 우리의 존재는 우리의 행동으로 검증받고 있습니다.


심판의 기준


나의 말과 행동의 중요성을 지금은 크게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증명하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할까?”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최후 심판의 날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님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우리 몸으로 행한 모든 행실을 주님께 직고할 것입니다. 그때 나의 온 존재가 하나님의 자비만을 갈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노력했다고 하더라도 그날에 우리에게는 부족한 구석이 아주 많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주 많을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한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만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지를 점검하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지를…. (롬 8:9)


우리가 하나님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판단하시는지 감히 짐작하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거대한 CCTV와 인공지능을 가지고 계신 것일까요? 하지만 우리는 성경으로 감히 하나님의 심판하는 방식을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힌트를 성경에 남겨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로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로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행위구원론은 이단이지만 행위심판론은 지극히 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본질을 증명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웃을 대하는 태도와 행동, 우리의 자비, 우리의 용서, 우리의 자선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하나님 자녀임을 증명합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맞닥뜨릴 영적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 5:7) 이 말씀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합니까!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계속해서 자비롭게 대하시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답게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가 우리 하늘씨앗교회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믿음을 굳게 세우고, 우리 안에 있는 작은 자비의 씨앗들에 물을 주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하늘씨앗교회 지체 여러분, 하나님 반드시 완성하실 하나님 나라에는 어떤 사람들이 존재할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이 모인 곳이 우리가 기대하는 천국이겠습니까? 거기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만 있을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만 있을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만 존재할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대로 지체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들만 영원히 하나님의 자비를 누리며 영생할 것입니다. 


지금, … 내가 자비한 사람이 아니라면 오직 한가지 답만 있을 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아직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직 그리스도 밖에 있으며 최후의 심판 때에 하나님의 자비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 모두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자비의 때입니다. 아직은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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