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씨앗교회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 (마 7:24-29) / 산상수훈 40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 7:24–29)

산상수훈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산상수훈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왜 산상수훈의 주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입니까? 왜 산상수훈의 주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주님께서는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닥치는 상황을 예상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닥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집을 짓습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비  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닥치는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고 집을 짓습니다. 집의 기초를 놓기 전에 설계 단계부터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닥치는 상황을 예상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주님께서 염려하신 대로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닥쳤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이 지은 집은 끄떡없습니다. 바위 위에 지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이 지은 집은 무너졌습니다.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모래 위에 세웠기 때문입니다. 차이는 그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이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설계사이십니다. “너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것이 산상수훈 마지막 설교의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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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주님께서는 7장 13절부터 산상수훈 끝까지 동일한 설교를 하셨습니다.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7장 마지막 부분 전체가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으신 우리 주님이 하신 완벽한 한 편의 설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제는 명백히 “속지 말라”입니다. 

몇 주 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하나의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걷는 일은 매우 어렵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을 보여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을 걸으면서도 생명으로 향하여 가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고 강하게 권면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두 번째 그림이 무엇이었습니까? “양의 옷을 입은 이리 그림”이었습니다. 겉모습에 속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겉으로만 보아서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속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쁜 나무는 결국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저 설교자는 좋은 나무인가? 나쁜 나무인가? 겉모습에 속지 말아라.”라는 것입니다. 또, “너는 좋은 나무인가? 나쁜 나무인가? 스스로 속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양의 옷을 입은 이리 그림의 교훈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세 번째 그림이 무엇이었습니까? 운명에 절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주여, 주여”라고 외치며 멸망할 자기 운명에 당혹해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원망하며 항변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그림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같은 교훈입니다.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의 고백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열심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봉사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기적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판주이신 주님은 그런 것들에 절대로 속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설교의 결론으로 오늘 그림을 보여 주십니다. 이 그림을 보여주시는 주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속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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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최후의 심판을 믿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믿고 있다고 스스로 속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 대다수의 사람이 최후의 심판을 믿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많은 사람이 사실상 믿지 않으면서도 믿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전체에 최후의 심판에 관한 수많은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 때 모든 사람이 영생의 판결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최후의 심판에 관한 명백한 말씀들을 친필로 적어서 박아 두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배운 대로 심판은 복음의 한 축입니다. 그래서 복음에는 반드시 심판이 언급됩니다. 세례 요한이 전한 복음도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에도 심판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역사상 전해져온, 그리고 오늘날에 선포되는 참된 복음 메시지에는 반드시 심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멸망이 정해진 저주받은 사람들은 심판의 메시지를 싫어합니다. 만약에 사람들에게 심판을 제외한 복음을 전한다면 많은 사람이 복음을 수용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오늘날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전한 복음이 전해지면 대다수가 복음을 거절합니다. 온전한 복음이 전해지는 순간 선택받은 영혼과 버림받은 영혼이 심판의 예리한 칼날에 양쪽으로 완전히 쫙 갈립니다. 

사도 바울이 총독 벨릭스에게 복음을 전하자 벨릭스가 보인 반응은 구원을 얻지 못할 자들의 전형적인 반응입니다. 바울이 어떤 복음을 전했습니까? 바울이 정의와 절제와 장차 다가올 심판에 관해서 설명하자 벨릭스는 두려운 생각이 들어 ‘이제 그만하고 가보아라. 기회가 있으면 다시 부르겠다.’ 하고 말했습니다. (행 24:25/공동번역개정)

심판 메시지는 불신자에게나 신자에게나 통하는 좋은 테스트입니다. 최후의 심판 전에도 복음은 생명과 멸망으로 사람들을 완전히 갈라놓습니다. 같은 메시지를 듣고 슬기로운 사람은  오늘 주님의 말씀대로 최후의 심판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최후의 심판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마 25:1-13) 슬기로운 다섯은 기름을 준비하였습니다. 어리석은 다섯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채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신랑이 오신 후에는 이같은 상황을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또, 여러분은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명을 받은 종에 관한 비유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눅 12:35-40) 어떤 종들은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는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종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비유의 결론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매 주일 신앙 고백을 하는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심판을 믿고 있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때가 되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사실을 믿고 계십니까? 슬기로운 사람은 기름을 준비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깨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의 테스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로 살고 계십니까? 성경의 모든 계시를 증언하시는 분이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라고 명백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성경 곳곳에 박혀 있는 이러한 계시의 증언에 대한 여러분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계 22:20-21) 이것이 여러분의 자세입니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일입니다. 필연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뒤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 9:27) 저와 여러분은 믿음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천여 년 전에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번에 당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은혜를 이미 받았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만 우리 믿음의 비밀이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 또한 우리 믿음의 비밀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일은 선택하신 자녀들에게만 계시되었습니다. 그때에야 우리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죄 없는 주님께서 당신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온전한 구원이 되실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 9:27–28/개역개정) 아멘!

히브리서 9장에 나오는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죽은 뒤에 맞이할 심판입니다. 그날에 주님께서는 이 땅에 두 번째 임재하셔서 죽은 자와 산자 모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비밀입니다. 선택하신 자녀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두렵고 떨림으로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갈 것이고, 버림받은 자녀들은 이러한 말씀들을 애써 외면하며 준비 없이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에다 심는 사람은 육체에서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에다 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갈 6:7–8)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우리 현재의 삶은 우리의 미래의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우리 운명은 우리가 중생할 때 결정된 과거에만 속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선택들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구원은 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삶의 방향성입니다. 우리의 온전한 구원은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이것이 산상수훈 마지막 부분, 주님의 말씀입니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폭풍이 몰아칠 때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다면 이미 늦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호흡은 오직 하늘 아버지께 달려 있습니다. 오늘 잠든 침실에서 내일 아침에도 깨어날 것이라고 누가 보장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 늦기 전에 심판의 말씀들을 염두에 두고, 삶의 방향성과 초점을 생명이신 주님과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주님의 말씀에 분명히 맞추고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우리의 삶은 완전함이 아니라 방향성입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통해 계속해서 배워온 대로 완전함은 오직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지만 방향성은 저와 여러분의 몫입니다. 

여러분은 어디를 향해 가고 계십니까? 슬기로운 성도는 주님의 심판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슬기로운 성도에게 주님의 심판은 저주가 아니라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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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주님께서는 사실은 주님 말씀을 듣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도 듣고 싶어 한다고 스스로 착각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는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주님의 말씀 듣기를 좋아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실행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미워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왜 모를까요? 왜 많은 사람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주님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위선의 죄를 범할까요? 왜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면서도 자기의 영혼이 안전하다고 믿을까요? 자기가 천국에 간다고 믿을까요? 시험과 환난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주님의 심판을 통과할 수 있다고 착각할까요? 성경에 명백하게 적어 두신 주님의 말씀들을 생각할 때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모호한 점이 있습니까? 이러한 명백한 주님의 말씀들에 대해서 이견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어떻게 주님의 계명을 실행하지 않으면서 그토록 뻔뻔하게 주님의 사랑과 축복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말씀들을 나열하면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믿음과 실천을 분리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실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만이 유일하게 실천 항목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누구나 실천할 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만이 유일하게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계명을  그대로 실행할 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믿는 기독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본질입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 15:9–10)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여러분은 뵙지는 못했지만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지금도 뵙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분을 믿으며 기뻐 뜁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벧전 1:8/새한글) 

여러분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뻐 뛰는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의지, 우리의 전인격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인격적 사랑에 의지의 순종이 빠진 것을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사랑은 이성과 감정을 빼앗고 의지를 발동시킵니다. 남녀의 사랑이든지 아기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든지 친구간의 사랑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의지가 발동되지 않는 사랑이란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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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적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적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

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행할 수가 없습니까? 왜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복하지 못합니까? 

어떤 사람은 환경에 핑계를 대고, 어떤 사람은 생계에 핑계를 대고, 어떤 사람은 설교자의 능력 없는 설교에 핑계를 대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자기 나이에 핑계를 댑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 지혜와 지식의 한계를 푸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있는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 8:7–8)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이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가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마 7:7-8; 눅 11:9-10) 오직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는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우리 육신의 생각을 굴복시키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육신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옛 예언자들의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겔 36:26-27)

여러분,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선택하신 자녀의 유일한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요 14:15–16)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결국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3–14)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갈 5:16–26) 

## 결론

이제 말씀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 말씀에 따라 인생의 안정성을 점검할 수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시험과 환난을 통과할 수가 있는지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안전할지 지금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간단한 테스트입니다.

산상수훈의 주님의 말씀을 싫어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산상수훈 주님의 말씀들이 너무 지키기 힘들기 때문에 포기하셨습니까? 높은 기준에 짜증이 납니까? 불편합니까? 듣고 나서 금방 잊어버립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심판을 준비하고 있지 않는 상태기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수면제처럼 여기지 않습니다. 설교를 단지 듣기만 하지 않습니다. 설교 말씀이 나에게 말을 걸어 오도록 허용합니다. 설교 말씀이 자기 속을 헤집어 자기 죄를 들추어내고 자기의 무가치함과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는 것을 기뻐합니다. 단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진부한 말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말 그대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도록 허용합니다. 이것이 참 신자와 거짓 신자의 미묘하고도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입니다. 참으로 미묘하지만 참으로 큰 차이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심판을 준비합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심판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믿기에 실제로 심판을 준비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슬기로운 사람은 성경의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에 대해서 자기를 낮추고 복종합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낮춤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했던 사도 바울이나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제자들이나 교회 역사상에 빛처럼 우리 길을 비추어주는 믿음의 선배들이 걸었던 길을 걸어갑니다. “나도 저 사람들처럼 살 수가 있다면 …” 이것이 심판을 준비하는 슬기로운 사람의 삶의 자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40번에 걸친 산상수훈 설교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배운 주님의 교훈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께서 묘사하신 모습만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특성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특성입니다. 이 길, 좁은 길, 주님의 길을 걷는 자만이 심판을 이기고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사이비 기독교인이 많은 시대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힘입어서 여러분께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사이비 기독교인은 자기가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기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 오늘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정작 믿음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그 믿음은 사이비 기독교인을 버릴 것입니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닥칠 때, 가장 도움이 필요한 그 순간에 사이비 기독교인들은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평생 믿어 왔던 그 믿음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이런 허약한 가짜 믿음이, … 인생의 작은 환난조차도 이기게 해 주지 못하는 데 크고 두려운 그날에 우리 주님의 엄중한 심판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날의 주님 판결은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두 번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령의 음성을 여러분이 들으셨다면 광야에서 반역했던 옛 이스라엘처럼 여러분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십시오. 다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1-2)

좁은 길을 걸었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따라서 결국은 심판을 이기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두렵고 떨림으로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나가다가 주님의 심판을 맞이하는 슬기로운 주님의 종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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