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씨앗교회

거짓 확신 (마 7:21-23) / 산상수훈 39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 (마 7:21–23)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말씀이 지난 말씀들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한 구절, 한 문단이 따로 뚝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말씀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전체적인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도 성경 전체의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마태복음과 관련이 있으며, 산상수훈 말씀과 관련이 있으며, 더 작게는 몇 주 전부터 저와 여러분이 함께 살펴보던 말씀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4주 전으로 돌아가 봅시다.

주님께서는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넓은 문, 넓은 길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주님께서 안타까워하시는 많은 사람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버리실 사람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주님을 원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착각입니다. 오해입니다. 거짓 확신입니다. 많은 사람이 넓은 문, 넓은 길로 가면서도 자기가 좁은 문, 좁은 길로 간다고, … 생명의 길을 가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런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 거짓 확신에 사로잡혀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결국은 주님께 버림받을 사람은 많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 하지만, 이 많은 사람이 모두 주님께 버림받게 됩니다. “그때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한 달 전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말씀들을 이런 식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카메라가 넓은 문과 넓은 길로 들어가는 많은 사람을 비춥니다. 이어서 주님의 카메라는 많은 사람을 넓은 문과 넓은 길로 인도하는 거짓 예언자들을 비춥니다. 지난 두 주일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카메라는 모든 성도의 여정을 훑어서 한 지점에 고정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카메라는 지금, 우리에게 최후의 심판 날에 벌어질 일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큰 화면에 비친 최후의 심판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그날에 우리 눈앞의 거대한 화면에서 어떤 장면이 펼쳐지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당황해하고 있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주님의 황당한 판결에 대해서 항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판결은 단호합니다.

만약에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 이런 말을 한다면 비난받기 십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으며 온 인류의 심판 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착각과 오해와 거짓 확신을 깨뜨리고 우리 눈을 열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서기를 원하시고, 거짓 선지자들의 공격을 이겨내고, 마침내 참된 확신으로 담대하게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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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주님께서는 올바른 믿음이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올바른 믿음이 우리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말할 것입니다. “나는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심판을 이기고 서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아니다. 절대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잘못된 신앙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주님, 주님”이라고 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초대교회때부터 성도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해 왔습니다. (행 9:14, 21; 22:16)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쓰시며 성도에게 이렇게 인사하셨습니다. “…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2–3) 또 사도 바울은 확언하셨습니다.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조심스럽게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올바른 믿음은 필수입니다. 하지만 올바른 믿음이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지난 주일 말씀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나쁜 나무도 좋은 신앙 고백은 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나쁜 나무임은 최후의 심판 때가 돼서야 밝혀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때까지 나쁜 나무는 자기를 좋은 나무라고 확신하며 살아가는 일이 많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도 얼마든지 진리를 믿고, 고백하고, 가르칠 수가 있다” 이것이 좋은 나무, 나쁜 나무에 관한 우리 주님의 견해입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올바른 믿음만 자랑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런 믿음은 귀신들도 가지고 있다고 비꼬아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잘 아시는 말씀이지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 2:19) 이것이 올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에 대한 사도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신약성경의 도처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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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거짓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주님,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개역개정은 “주여 주여”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분명히 주님은 지옥에 갈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묘사하고 계십니다. 

진리를 믿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열정도 가지고 있다면 아마도 모든 사람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칭찬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진정한 믿음도 필요하고 믿음의 열정도 중요하지만, 이런 것들은 구원의 증거가 절대로 될 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의 열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영적 열정이 있고 육적 열정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똑같아 보이기에 분별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신앙 감정론”이라는 두꺼운 책을 저술하신 바가 있습니다. 

영적 열정과 육적 열정의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전에 설교자로서 너무나 고민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때로 설교할 때 제가 과도하게 흥분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목소리도 커지고 흥분하여서, … 제가 느끼기에는, … 제가 말씀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말씀이라는 몽둥이로 회중을 후려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설교가 끝나면 제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허탈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제가 중간에 개입해서 스스로 흥분하였던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들은 모두 제가 무엇을 말씀드리고 있는지 잘 알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할 때, 홀로 성경을 읽을 때나, … 특히 대표 기도를 맡거나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을 때도 간혹 감정이 뜨거워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뜨거운 감정이 반드시 참된 영적 감정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이 이런 것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질적으로 종교적 감정에 아주 민감합니다. 그래서 기도하거나 말씀을 읽을 때나 말씀을 나눌 때, 울게 됩니다. 하지만, 매번 운다고 해서, … 자기도 모르게 공중 기도를 할 때 손을 높이 들고 열정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영적인 열정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도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의 열정이 잘못된 것입니까? 믿음은 냉랭해야 하며 믿음에 감정을 개입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뜨거운 마음으로 뜨겁게 믿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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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올바른 믿음과 열정도 구원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더 나아가서 사도들이 행했던 일과 똑같은 놀라운 일을 할지라도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주님께 변명할 것입니다.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주님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은 주님의 권능으로, 주님의 권세로라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이런 권세를 주신다고 예언하신 바가 있습니다. (막 16:17–18) 문제는 주님께 버려질 거짓 예언자들도 이런 일을 얼마든지 할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매일 성경을 읽는 열심을 가진 많은 그리스도인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현혹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어떤 교회라도 단지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기만 하면 수많은 사람이 몰려듭니다. 오늘날 교회가 쇠퇴하는 지역에서도 주님의 권능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는 교회는 놀랍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사역자를 가진 교회는 반드시 양적 성장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한 예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사역자가 나타내는 권능이 진짜임을 보증해 주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교훈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민수기 22장부터 24장까지 나오는 거짓 예언자 발람을 보십시오. 발람은 권능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올바른 예언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발람은 천국에서 배제된 저주받은 자였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를 막대기 사용하듯이 사용하시고 버리셨습니다. 이런 예가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바로가 그렇습니다. 고레스 왕이 그랬습니다.

사무엘상 10장과 19장의 사울 왕을 떠올려 보십시오. 사울은 여러 차례 예언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저주받은 자입니다. 

신약성경에는 훨씬 더 분명한 사례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알았습니다.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이 많이 나타났지만, 그것이 자기 구원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바울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두려움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참된 확신이었습니다. (빌 2:12)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를 통해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구원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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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을 쫓아내는 권능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주의해서 들으십시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을 수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좋은 예입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신 목적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막 3:13-19) 마가복음은 분명히 이러한 권능을 가진 자 중에 가룟 유다도 있었음을 의도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70인의 제자들이 전도 한 후에 다시 주님께 돌아와서 기뻐했던 누가복음의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들에게 항복하였습니다.”라고 제자들이 말했을 때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눅 10:20) 

여러분은 여러분 신앙에서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저는 오랫동안 주님의 권세와 주님의 권능을 기대하였습니다. 성경과 역사를 통해 주님께서 권능을 베푸시는 곳에 영적 각성과 부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저에게 개인적으로 그런 것보다 너의 구원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그런 권능을 베푸신다면 그것은 오직 나와 지체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권능과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의 구원입니다. 구원이 우리의 기쁨이어야 하고 우리의 추구여야 합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구원,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구원에 필요하다면 주님께서는 주님의 권능을 얼마든지 베풀어 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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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과 축귀에 이어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권능으로 어떤 사람이 기적을 행하더라도 이것이 그 사람의 구원을 보장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현혹되고 있습니다. 애굽의 마술사들은 모세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행한 거의 모든 일을 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이 다가올 때 기적으로 사람을 홀리는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서, 큰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면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받은 사람들까지도 홀릴 것이다.” (마 24:24)

“… 그 불법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작용에 따른 것인데, 그는 온갖 능력과 표징과 거짓 이적을 행하고, 또 온갖 불의한 속임수로 멸망을 받을 자들을 속일 것입니다. …” (살후 2:8–10)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모든 것이 성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말씀에 의하면 마귀는 빛의 천사로 자기를 가장해서까지 성도를 속이려 할 것입니다. 마귀를 위해서 일하는 일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의 마지막은 그들의 행위대로 될 것입니다. (고후 11:11-15)

어쩌면 저와 여러분은 마지막 날에 일어날 놀라운 일들을 목격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정확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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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뭉크의 유명한 그림 “절규”를 떠올리실 수가 있습니다. 경악! 절규! 이것이 많은 사람의 슬픈 종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제목의 그림에서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의 경악하는 표정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경고하셨는데도 거짓 확신에 매달려있던 사람들입니다.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기에 주님의 이름으로 이런저런 놀라운 일들을 하였기에 자기 구원을 확신하고 있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주님께서 주신 교훈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믿음과 순종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행함이 없는 고백이 우리 주님께 얼마나 공허합니까? 행함이 없는 고백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서 생명을 내어주신 우리 주님께 얼마나 큰 모욕입니까!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잘못된 구원의 확신이라는 가느다란 끈을 붙들고 있는 분이 계신다면 명심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거기서 한 발 더 나가셔야 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 너무나 분명하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에 행위가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도 믿음과 행위 모두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고 그래서 믿음과 행위, 은혜와 율법 둘 다를 강조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불의를 행하는 자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확언하셨습니다. 착각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고전 6:9-10) 이 모든 말씀이 주님의 교훈에 따른 것입니다. 에베소교회에 보낸 서신에서는 행실이 깨끗하지 못한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확언하시고 누구든지 헛소리로 에베소교회 성도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엡 5:5-6)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반율법주의자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믿음은 마법의 공식이 아닙니다. 믿음은 순종과 충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반드시 한 쪽 손에는 믿음, 그리고 다른 쪽 손에는 순종을 붙잡고 좁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입니다.

둘째로, 여러분은 적당한 순종으로 적당히 만족하는 그런 거짓된 만족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찌하든지 좁은 길의 어려움을 적당한 균형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상의 삶의 무게 때문에 무엇인가 주님께 죄송하고 양심의 가책이 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해결할 만큼만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해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구원도 중요하지만, 생계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구원을 잃지 않을 만큼만 나름의 균형을 이루려고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좁은 길을 걸었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자세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살다가 망한 사람의 대표적인 예가 사울입니다. 사울은 진멸하라는 절대적인 명령을 어느 선까지는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불순종한 부분을 선행으로 채우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당신이 섬기시는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고 양떼, 소떼 중에서 좋은 놈을 살려 두었습니다.” (삼상 15:15) 이것이 소위 “삶과 신앙의 균형잡기”의 완벽한 사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삶을 지속하면 반드시 영적으로 파산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에 순종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왜 버림을 받았습니까?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렸습니다.” (삼상 15:26) 이러한 말씀들이 언젠가 최후의 심판을 맞이할 저와 여러분에게 큰 교훈이 됩니다. 

우리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주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반응하면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신실하게 반응하실 것입다.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께 순종하면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약속하신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계 2:10)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때때로 여러분 자신을 점검해 보는 기회를 가지십시오.

없으면 만드십시오. 반드시 자기를 성찰하십시오.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자기 속을 깊이 성찰하고 들여다보고 점검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반율법주의자들은 자기 자신과 자기 마음, 자기의 행동과 말을 들여다보아서는 안 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성경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가 스스로 시험하고 증명하고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지 내가 포도나무이신 주님과 연합하여 열매를 맺고 있는지 날마다 점검해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 (고후 13:5)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잣대는 주님의 심판을 염두에 둔 것이어야 합니다. 나의 욕망이 그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심판이 잣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우리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과 연합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주님을 아는 관계 안에서 주님 뜻을 알고 행하는 그런 참된 순종의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실 저주받은 많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그런 꼴을 당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마지막 날에 저와 여러분도 모든 사람과 함께 주님의 발밑에서 무릎을 꿇고 주님이 선고하시는 말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때 저와 여러분은 반드시 평생 사모하던 주님의 달콤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0, 13)

많은 사람이 자기 뜻을 주님 뜻인 양 위선을 떨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양은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것을 때때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교리인가? 행위인가? 아니면 본질인가? 나는 지금 좋은 나무인가,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순종의 열매를 받으시고 기뻐하며 영광을 받으시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여정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고는 태양보다 더 뜨거운 심판의 좁은 길을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7) 아멘!

“…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히 12:14) 아멘!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3:2–3) 아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힘들더라도 평생 좁은 길을 갑시다. 그리하여 끝내는 심판의 좁은 문을 통과해서 영생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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