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씨앗교회

거짓 예언자 (마 7:15-20) / 산상수훈 37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오늘 주신 하나님 말씀입니다. 오늘은 앞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살펴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마 7:15–20)

산상수훈 말씀의 중심 설교는 이미 끝났습니다.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 7:12) 이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뜻을 요약하시고 산상수훈을 마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경고의 말씀들입니다. 주님께서는 네 가지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먼저, 지난 주일에 말씀하신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좁은 문을 지나 좁은 길을 걷는 일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이것이 첫 번째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두 번째 경고의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새번역은 거짓 예언자들을 “살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공동번역개정은 “조심하라”, 개역개정은 “삼가라”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살펴라! 조심하라! 삼가라!” 이것이 두 번째 주님의 경고 말씀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 오늘날 보통의 건전한 교회에 예언자라는 정식 직분은 없습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의 예언자의 기능을 하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분명히 있습니다. 

옛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어떤 역할을 하였습니까? 하나님 백성에게 시대를 분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 백성을 교훈하고 책망하였고 때로는 격려하며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시대의 설교자들이 예언자 역할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 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 받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경고나 위로의 말씀을 전하는 성도들도 예언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성경 교사들도 예언자 역할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날 많은 교계 지도자가 시대정신을 말하고 시대의 징조를 말하고 종말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또, 옛 예언자들처럼 국가와 권세를 잡은 자들을 향해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도 있고 참 예언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말씀이 초대교회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해당하는 말씀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주의해서 살펴보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두 가지를 분명히 알기를 원하십니다. 

첫째는, 거짓 예언자들의 정체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와 거짓 예언자들의 정체를 밝혀 드러내십니다. 

둘째는, 거짓 예언자들을 분별하는 방법입니다.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마지막에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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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거짓 예언자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거짓 예언자를 규정하셨습니까?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양과 늑대라는 보편적인 은유를 사용하셔서 거짓 예언자들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양의 탈을 쓰고 하나님 백성에게 접근합니다. 양의 옷을 입고 다가옵니다. 하지만 거짓 예언자들의 속에는 굶주린 이리가 들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명백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알아차리기가 왜 어렵습니까? 우리를 속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거짓 예언자들의 속이 딴판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선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양 떼 중 하나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짓 예언자들의 속에는 마귀의 자식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아차리고 분별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들었던 동화 속의 늑대는 목소리와 털로 쉽게 알아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거짓 예언자는 아예 양의 옷을 입고 양의 탈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은 매우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에 살피고,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위험합니까? 겉으로는 선한 동기를 가지고 접근합니다. 하지만 거짓 예언자들의 본래 목적은 양을 먹는 것입니다. 양 떼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리의 최종 목적입니다.

이리는 양의 원수입니다. 마찬가지로 거짓 예언자들은 하나님 백성의 원수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시키고 멸망하게 만듭니다. 역사적으로도 거짓 예언자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교회를 파괴하였습니다.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기 때문에 더욱 알아차리기가 힘이 듭니다. 내부에서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교회를 파괴하기 때문에 거짓 예언자들이 더욱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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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말씀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는 오늘 말씀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과 오늘 말씀은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하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그림입니다.

문 앞에서 예언자들이 사람을 인도합니다. 넓은 문을 권하는 예언자는 목소리가 클 뿐만 아니라 그 숫자도 많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짓 예언자의 메시지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거짓 예언자들은 인기가 많습니다. 하지만 좁은 문을 권하는 예언자는 숫자가 적습니다. 좁은 문을 권하는 예언자는 안타까운 마음에 더욱 목이 터지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좁은 문을 권하는 예언자는 인기가 없습니다. 그 메시지를 대부분 사람이 아주 싫어합니다. 

넓은 문으로 사람을 인도하는 거짓 예언자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왼쪽에는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행위가 없는 구원”을 주장하는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더라도 가능하면 단순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왼쪽이건, 오른쪽이건 “나는 행위 구원론자다”라거나 “나는 행위가 없는 구원을 주장한다”라고 드러내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같이 소리 높여 믿음과 은혜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교묘하게 교회를 파괴합니다, 즉 주님의 표현에 따르면 양의 옷을 입고, 양의 탈을 쓰고 교회를 파괴하는 이리의 역할을 아주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먼저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거짓 예언자에 관해 살펴보고, 그다음에 “행위가 없는 구원”을 주장하는 예언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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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거짓 예언자들을 보십시오. 말씀드린 것처럼 “나는 행위 구원론자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이 속아 넘어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로마 가톨릭이 그랬습니다. 오늘날 개신교 안에도 많은 거짓 예언자가 있습니다.

제가 오래전 한 대학생 선교 단체(IVF)에서 일할 때입니다. 본부가 서초동의 한 상가에 있던 90년대 초의 일입니다. 우리 교회 바로 위에 명상하는 단체가 있는 것처럼, 제가 일하던 선교 단체 사무실 바로 위에 “능인선원”이라는 불교 단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궁금해서 특별한 법회가 있는 날에 올라가 복도에서 유심히 설법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그 단체가 크게 될 줄을 알았습니다. 설법이, … 굳이 말하자면 너무나 은혜로웠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이런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어떠한 큰 교회 유명한 목사님들보다도 인자하게 생긴 원장 스님의 설법이 더욱더 종교적이고 도덕적이고 사람의 마음 깊이 호소하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제가 30년이 지난 오늘 아침에 검색해 보니 신도 수가 무려 25만 명이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바는 이른바 “도덕적인 메시지”는 인간의 마음에 깊이 호소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물론 고루한 방식으로 전달하면 그렇지 않겠지요. 하지만 메신저의 전달 능력이 뛰어나고 메신저의 캐릭터가 매력적이라면 “도덕적인 메시지”는 많은 사람을 충분히 모을 만큼의 매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도덕은 인류 보편적인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양심에 도덕을 새겨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심이 있고 양심적이며 성실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도덕적인 메시지를 좋아하고 잘 요리된 도덕적 메시지에 열광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힌두교와 불교, 유대교와 이슬람까지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종교가 행위 구원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선한 사람이 되십시오. 선한 행동을 하십시오. 그러면 천국이 당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종교적이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행위 구원의 넓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수많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속마음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낳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정체성은 거짓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말해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옵니다. (마 15:18) 

거짓 예언자들도 구원을 이야기하고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의 온갖 은혜로운 말씀들을 인용하고 사람들을 감동하게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거짓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잘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들의 메시지를 제가 한마디로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선한 사람이 되십시오!” 이것입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십시오” 이것입니다! “더 도덕적인 인간이 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잘될 것입니다!” 이것이 “행위 구원”을 마음에 품은 거짓 예언자들의 한결같은 메시지입니다. 

이러한 메시지를 들은 청중의 마음속에 남는 것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아! 좀 더 노력하자. 이번 주에는 좀 더 열심히 살아야지!” 그것으로 끝입니다. 의지가 강하고 성실한 사람은 이를 악물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뭔가 자기가 좀 더 나은 인간이 되었다는 느낌만 간직한 채 메시지 자체를 잊어버릴 것입니다. 기억도 못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저와 같은 설교자들이 만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매주 제가 전하는 말씀, 제가 하는 설교를 듣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 마음에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저는 제가 거짓 예언자가 될까 봐 매우 두렵습니다.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로 여러분을 인도하는 목사가 될까 봐 두렵습니다. 제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여러분 마음에 무엇이 남을 지가 매우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마음에 남겨진 메시지가 여러분을 생명으로 인도할 수도 있고 멸망으로 인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제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면 저는 분명히 나쁜 나무입니다. 만약에 제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면 저는 좋은 나무입니다. 저는 저의 본질을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 예언자를 분별하시되 저를 먼저 분별하십시오. 하지만 제가 거짓 예언자가 아니라면 …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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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 구원의 길”은 넓은 길입니다. “행위 구원의 길”, 그 반대쪽 극단에는 더 넓은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행함이 없는 구원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이 길은 옛 이스라엘이 이미 많이 넓혀 놓았습니다. 옛 이스라엘은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성전 예배나 회당 예배에 참여하면 스스로 하나님 백성으로 여겼습니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공인하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지난 수 세기 동안에 넓었던 이 길은 더욱 넓어져 왔습니다. 

오늘날에는 “행함이 없는 구원의 길”이 더욱 넓어졌습니다. 이제는 몇몇 교리를 믿는다고 고백만 하면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오늘날에는 예수님을 단지 “주여주여”(마 7:21)라고 부르기만 하면 자동으로, 거의 마법처럼 죄가 사해졌다고 선포하고 구원의 확신으로 세뇌합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특히 보수주의 근본주의의 이름으로, 혹은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넓어진 이 길은 더욱 넓어져 왔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행함이 없는 구원의 길”이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구원의 기독교”의 역사는 이런 식으로 흘러왔습니다. 

한 세기 전에 기독교의 오랜 전통이었던 지성주의는 과학주의의 동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배격되었습니다. 미국의 주류 기독교는 한 세기 전에 과학주의와 지성주의를 한 편으로 보고 교회 안에서 몰아내었습니다.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그때부터 예수님을 믿는 동시에 뇌가 제거된 그리스도인들이 양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성경의 본뜻을 왜곡하여 결국은 복음을 단 몇 문장으로 요약함으로써 지성과 상식이 제거된 신앙인을 양산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왜곡해서 주님께서 다 이루셨으니, 우리들은 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조장하여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좇아가려는 선택하신 백성들조차 넓은 길로 이끌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거짓 예언자는 참 분별하기가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정통 교리를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성경의 주요 주제들을 조리 있게 잘도 말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예언자들도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정통 교리에 벗어난 주장을 하면 자기 영향력이 약화하거나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통 교리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유튜브 설교들을 분석해 보십시오. 우리는 거짓 예언자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거짓 예언자들이 하지 않는 말을 통해서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주로 이야기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거룩함이나 하나님의 공의나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매 주일 강단에서 수많은 회중을 하나님의 사랑 아래로 이끌어 갑니다. 위로, 하나님, 마음의 평안, 등등 …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고 다른 종교에서도 똑같이 말하는 그런 것들은 주로 이야기합니다.

반면에 … 십자가 죽음, 좁은 문, 좁은 길, 이 땅에서의 필연적인 고난, 하나님 백성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멸망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 하지 않거나 교묘하게 포장하여 왜곡합니다.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겁주기 위해서 잠시 활용합니다. 그러고 나서 금새 사람들에게 “평강”을 선포하고 “축복”을 선포합니다. 예레미야서나 에스겔서의 거짓 예언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렘 6:14; 8:11)

거짓 예언자들이 하는 행태를 잘 보십시오. 권세 있는 자들을 앞에서 하는 그들의 행동을 보면 가관입니다. 조찬기도회를 열어주고 설교와 기도로 온갖 축복의 말로 악인을 더욱 부추깁니다. 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전두환 정권을 축복하고 윤석열 정부를 옹호하는 모든 거짓 예언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주여 주여”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비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이미 예언자 전통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옛 이스라엘 시대부터 참된 예언자들은 주신 사명을 다했습니다. 곧 하나님 백성과 지도자들을 일깨우는 일이 그분들의 사명이었습니다. “네가 잘못하고 있다. 즉시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내가 너를 버릴 것이다!”라고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을 가감 없이 전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헤롯 안디바와 그 부인에게 예언자의 사명을 다하다가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여러 차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스라엘을 경책하며 돌아오기를 호소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을 모르셨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목자의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시며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총독 벨릭스와 부인 드루실라에게 어떤 복음을 전했습니까?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을 전했습니다. (행 24:25) 벨릭스가 바울의 말을 들었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예언자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렘 6:14; 8:11)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서 8장에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 6:14; 8:11/개역개정) 

여러분!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 설교나 듣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받아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이 더욱 뜨거워져 갈 때, 성경을 읽고 싶고, 말씀을 더욱 듣고 싶어 할 때, … 그때 우리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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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지난 주일 말씀과 오늘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의 마음에 더욱 선명하게 새겨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넓은 길을 뒤로하고 좁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 양쪽에서는 거짓 예언자들이 온갖 달콤한 말로 우리를 속이려고 합니다.

한쪽에서는 어떤 소리가 들립니까? 여러분! 한쪽에서는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족하다고 유혹합니다.

그런데 거짓 예언자들의 메시지에는 십자가의 영광이 없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메시지에는 온 세상의 모든 종교의 냄새가 나며, 바리새인의 악취가 풍깁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이를 악물고, 종교적 규율과 헌신으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고 합니다. 그리고 넓은 길의 바닥에는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지쳐 쓰러진 우울증 환자들과 바리새인의 화살을 맞고 쓰러져 신음하는 부상자들과 이미 죽은 사망자들이 즐비합니다. 

의지가 강한 소수의 사람만이 이를 악물고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마에는 주님께서 친히 붙이신 선명한 글씨가 쓰여 있습니다. “바리새인, 위선자!”

여러분, 다른 한쪽에서는 어떤 소리가 들립니까? 다른 한쪽에서는 거짓 예언자들이 우리를 안심시키려고 유혹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십자가는 이미 과거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우리 과거에 십자가의 은혜와 혜택을 받았으니, 이제는 십자가를 뒤로하고 평안과 행복을 추구하면 된다고 유혹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메시지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하신 말씀이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는 말씀은 거의 없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산상수훈을 설교할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기준선 이하로 낮추어버리거나 구원의 확신 등을 미끼로 회피해 버리게 만듭니다. 그들이 십자가를 이야기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묘사하는 십자가는 주님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철학적으로 어리석어 보이고 종교적으로 걸림돌이 되는 거치는 그런 험한 십자가가 아닙니다. 눈물의 찔끔 흘릴 만큼의 감상적인 십자가입니다. 축복을 가져다주는 매개체나 종교적 장식물 정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무게는 우리 주님의 생명의 무게인데 거짓 선지자들의 십자가는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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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말씀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는 지난 주일에 이어서 우리가 좁은 길을 걷기를 원하십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는 길”도 아니고 “행함이 없이 구원을 얻는 길”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길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비좁은 길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좁아지고 또 좁아져서 우리가 가는 길은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이 좁아져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중생의 좁은 문을 통과하여 주님의 은혜로 좁은 길을 걷는 삶은 좁디좁아서 마치 칼날 위를 걷는 것도 같습니다.

이 길만이 선택하신 하나님 백성의 유일한 삶의 여정입니다. 단지, 구원에 감사해서 선한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만드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그러한 여정입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으로 거룩하게 빚어지는 그러한 여정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결국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나무일 뿐이고 나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나쁜 나무는 나쁜 나무일 뿐이고 절대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잘되어봤자 바리새인처럼 될 것이고 잘못되면 우울증으로 자살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저와 여러분은 좋은 나무입니까? 우리의 말과 행동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만드시기로 작정하신 새로운 피조물은 점점더 많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 말씀을 하시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 15:11)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좁은 길을 걷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가난합니까? 슬픕니까? 가난하기에 천국의 소망이 있습니까? 슬프기에 하늘 아버지의 위로가 있습니까? 이런 영혼에게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집니다. 하늘 아버지의 위로가 주어집니다.


여러분, 어떤 신자들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행복을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이런 신자들은 절대로 영원한 행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의 행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얻는 영원하고 참된 행복이며 이러한 행복은 오직 우리 주님만 주실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신앙의 모델이 누구입니까?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존경받는 사역자들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모델은 예수님 뿐입니다.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가진 우리 주님과 우리 주님의 증인들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보니, … 우리 신앙의 모델이 될만한 분들은 구름떼보다도 더 많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거짓 예언자들로부터 고통을 받은 참된 성도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좁은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의 삶의 고백입니다. 좁은 길을 걷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8–10) 아멘!

좁은 길을 걷는 사도의 권면입니다. 이 권면이 오늘 주님의 말씀을 반영한 것이라고 여겨지신다면 오늘 제가 전한 말씀은 최소한 거짓 예언자의 말은 아닙니다. 이 권면대로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빚진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육신에 빚을 져서 육신을 따라 살아가야 할 사람들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아간다면 죽게 될 것이지만 성령님을 힘입어 몸의 못된 행실들을 죽이면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롬 8:12-14/새한글)

아멘!
오늘 주신 하나님 말씀입니다. 오늘은 앞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살펴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마 7:15–20)

산상수훈 말씀의 중심 설교는 이미 끝났습니다.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 7:12) 이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뜻을 요약하시고 산상수훈을 마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경고의 말씀들입니다. 주님께서는 네 가지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먼저, 지난 주일에 말씀하신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좁은 문을 지나 좁은 길을 걷는 일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이것이 첫 번째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두 번째 경고의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새번역은 거짓 예언자들을 “살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공동번역개정은 “조심하라”, 개역개정은 “삼가라”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살펴라! 조심하라! 삼가라!” 이것이 두 번째 주님의 경고 말씀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 오늘날 보통의 건전한 교회에 예언자라는 정식 직분은 없습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의 예언자의 기능을 하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분명히 있습니다. 

옛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어떤 역할을 하였습니까? 하나님 백성에게 시대를 분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 백성을 교훈하고 책망하였고 때로는 격려하며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시대의 설교자들이 예언자 역할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 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 받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경고나 위로의 말씀을 전하는 성도들도 예언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성경 교사들도 예언자 역할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날 많은 교계 지도자가 시대정신을 말하고 시대의 징조를 말하고 종말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또, 옛 예언자들처럼 국가와 권세를 잡은 자들을 향해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도 있고 참 예언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말씀이 초대교회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해당하는 말씀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주의해서 살펴보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두 가지를 분명히 알기를 원하십니다. 

첫째는, 거짓 예언자들의 정체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와 거짓 예언자들의 정체를 밝혀 드러내십니다. 

둘째는, 거짓 예언자들을 분별하는 방법입니다.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마지막에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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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거짓 예언자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거짓 예언자를 규정하셨습니까?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양과 늑대라는 보편적인 은유를 사용하셔서 거짓 예언자들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양의 탈을 쓰고 하나님 백성에게 접근합니다. 양의 옷을 입고 다가옵니다. 하지만 거짓 예언자들의 속에는 굶주린 이리가 들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명백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알아차리기가 왜 어렵습니까? 우리를 속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거짓 예언자들의 속이 딴판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선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양 떼 중 하나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짓 예언자들의 속에는 마귀의 자식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아차리고 분별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들었던 동화 속의 늑대는 목소리와 털로 쉽게 알아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거짓 예언자는 아예 양의 옷을 입고 양의 탈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은 매우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에 살피고,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위험합니까? 겉으로는 선한 동기를 가지고 접근합니다. 하지만 거짓 예언자들의 본래 목적은 양을 먹는 것입니다. 양 떼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리의 최종 목적입니다.

이리는 양의 원수입니다. 마찬가지로 거짓 예언자들은 하나님 백성의 원수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시키고 멸망하게 만듭니다. 역사적으로도 거짓 예언자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교회를 파괴하였습니다.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기 때문에 더욱 알아차리기가 힘이 듭니다. 내부에서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교회를 파괴하기 때문에 거짓 예언자들이 더욱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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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말씀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는 오늘 말씀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과 오늘 말씀은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하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그림입니다.

문 앞에서 예언자들이 사람을 인도합니다. 넓은 문을 권하는 예언자는 목소리가 클 뿐만 아니라 그 숫자도 많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짓 예언자의 메시지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거짓 예언자들은 인기가 많습니다. 하지만 좁은 문을 권하는 예언자는 숫자가 적습니다. 좁은 문을 권하는 예언자는 안타까운 마음에 더욱 목이 터지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좁은 문을 권하는 예언자는 인기가 없습니다. 그 메시지를 대부분 사람이 아주 싫어합니다. 

넓은 문으로 사람을 인도하는 거짓 예언자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왼쪽에는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행위가 없는 구원”을 주장하는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더라도 가능하면 단순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왼쪽이건, 오른쪽이건 “나는 행위 구원론자다”라거나 “나는 행위가 없는 구원을 주장한다”라고 드러내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같이 소리 높여 믿음과 은혜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교묘하게 교회를 파괴합니다, 즉 주님의 표현에 따르면 양의 옷을 입고, 양의 탈을 쓰고 교회를 파괴하는 이리의 역할을 아주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먼저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거짓 예언자에 관해 살펴보고, 그다음에 “행위가 없는 구원”을 주장하는 예언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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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거짓 예언자들을 보십시오. 말씀드린 것처럼 “나는 행위 구원론자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이 속아 넘어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로마 가톨릭이 그랬습니다. 오늘날 개신교 안에도 많은 거짓 예언자가 있습니다.

제가 오래전 한 대학생 선교 단체(IVF)에서 일할 때입니다. 본부가 서초동의 한 상가에 있던 90년대 초의 일입니다. 우리 교회 바로 위에 명상하는 단체가 있는 것처럼, 제가 일하던 선교 단체 사무실 바로 위에 “능인선원”이라는 불교 단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궁금해서 특별한 법회가 있는 날에 올라가 복도에서 유심히 설법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그 단체가 크게 될 줄을 알았습니다. 설법이, … 굳이 말하자면 너무나 은혜로웠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이런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어떠한 큰 교회 유명한 목사님들보다도 인자하게 생긴 원장 스님의 설법이 더욱더 종교적이고 도덕적이고 사람의 마음 깊이 호소하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제가 30년이 지난 오늘 아침에 검색해 보니 신도 수가 무려 25만 명이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바는 이른바 “도덕적인 메시지”는 인간의 마음에 깊이 호소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물론 고루한 방식으로 전달하면 그렇지 않겠지요. 하지만 메신저의 전달 능력이 뛰어나고 메신저의 캐릭터가 매력적이라면 “도덕적인 메시지”는 많은 사람을 충분히 모을 만큼의 매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도덕은 인류 보편적인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양심에 도덕을 새겨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심이 있고 양심적이며 성실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도덕적인 메시지를 좋아하고 잘 요리된 도덕적 메시지에 열광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힌두교와 불교, 유대교와 이슬람까지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종교가 행위 구원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선한 사람이 되십시오. 선한 행동을 하십시오. 그러면 천국이 당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종교적이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행위 구원의 넓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수많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속마음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낳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정체성은 거짓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말해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옵니다. (마 15:18) 

거짓 예언자들도 구원을 이야기하고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의 온갖 은혜로운 말씀들을 인용하고 사람들을 감동하게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거짓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잘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들의 메시지를 제가 한마디로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선한 사람이 되십시오!” 이것입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십시오” 이것입니다! “더 도덕적인 인간이 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잘될 것입니다!” 이것이 “행위 구원”을 마음에 품은 거짓 예언자들의 한결같은 메시지입니다. 

이러한 메시지를 들은 청중의 마음속에 남는 것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아! 좀 더 노력하자. 이번 주에는 좀 더 열심히 살아야지!” 그것으로 끝입니다. 의지가 강하고 성실한 사람은 이를 악물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뭔가 자기가 좀 더 나은 인간이 되었다는 느낌만 간직한 채 메시지 자체를 잊어버릴 것입니다. 기억도 못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저와 같은 설교자들이 만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매주 제가 전하는 말씀, 제가 하는 설교를 듣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 마음에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저는 제가 거짓 예언자가 될까 봐 매우 두렵습니다.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로 여러분을 인도하는 목사가 될까 봐 두렵습니다. 제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여러분 마음에 무엇이 남을 지가 매우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마음에 남겨진 메시지가 여러분을 생명으로 인도할 수도 있고 멸망으로 인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제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면 저는 분명히 나쁜 나무입니다. 만약에 제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면 저는 좋은 나무입니다. 저는 저의 본질을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 예언자를 분별하시되 저를 먼저 분별하십시오. 하지만 제가 거짓 예언자가 아니라면 …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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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 구원의 길”은 넓은 길입니다. “행위 구원의 길”, 그 반대쪽 극단에는 더 넓은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행함이 없는 구원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이 길은 옛 이스라엘이 이미 많이 넓혀 놓았습니다. 옛 이스라엘은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성전 예배나 회당 예배에 참여하면 스스로 하나님 백성으로 여겼습니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공인하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지난 수 세기 동안에 넓었던 이 길은 더욱 넓어져 왔습니다. 

오늘날에는 “행함이 없는 구원의 길”이 더욱 넓어졌습니다. 이제는 몇몇 교리를 믿는다고 고백만 하면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오늘날에는 예수님을 단지 “주여주여”(마 7:21)라고 부르기만 하면 자동으로, 거의 마법처럼 죄가 사해졌다고 선포하고 구원의 확신으로 세뇌합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특히 보수주의 근본주의의 이름으로, 혹은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넓어진 이 길은 더욱 넓어져 왔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행함이 없는 구원의 길”이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구원의 기독교”의 역사는 이런 식으로 흘러왔습니다. 

한 세기 전에 기독교의 오랜 전통이었던 지성주의는 과학주의의 동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배격되었습니다. 미국의 주류 기독교는 한 세기 전에 과학주의와 지성주의를 한 편으로 보고 교회 안에서 몰아내었습니다.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그때부터 예수님을 믿는 동시에 뇌가 제거된 그리스도인들이 양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성경의 본뜻을 왜곡하여 결국은 복음을 단 몇 문장으로 요약함으로써 지성과 상식이 제거된 신앙인을 양산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왜곡해서 주님께서 다 이루셨으니, 우리들은 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조장하여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좇아가려는 선택하신 백성들조차 넓은 길로 이끌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거짓 예언자는 참 분별하기가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정통 교리를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성경의 주요 주제들을 조리 있게 잘도 말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예언자들도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정통 교리에 벗어난 주장을 하면 자기 영향력이 약화하거나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통 교리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유튜브 설교들을 분석해 보십시오. 우리는 거짓 예언자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거짓 예언자들이 하지 않는 말을 통해서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주로 이야기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거룩함이나 하나님의 공의나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매 주일 강단에서 수많은 회중을 하나님의 사랑 아래로 이끌어 갑니다. 위로, 하나님, 마음의 평안, 등등 …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고 다른 종교에서도 똑같이 말하는 그런 것들은 주로 이야기합니다.

반면에 … 십자가 죽음, 좁은 문, 좁은 길, 이 땅에서의 필연적인 고난, 하나님 백성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멸망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 하지 않거나 교묘하게 포장하여 왜곡합니다.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겁주기 위해서 잠시 활용합니다. 그러고 나서 금새 사람들에게 “평강”을 선포하고 “축복”을 선포합니다. 예레미야서나 에스겔서의 거짓 예언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렘 6:14; 8:11)

거짓 예언자들이 하는 행태를 잘 보십시오. 권세 있는 자들을 앞에서 하는 그들의 행동을 보면 가관입니다. 조찬기도회를 열어주고 설교와 기도로 온갖 축복의 말로 악인을 더욱 부추깁니다. 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전두환 정권을 축복하고 윤석열 정부를 옹호하는 모든 거짓 예언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주여 주여”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비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이미 예언자 전통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옛 이스라엘 시대부터 참된 예언자들은 주신 사명을 다했습니다. 곧 하나님 백성과 지도자들을 일깨우는 일이 그분들의 사명이었습니다. “네가 잘못하고 있다. 즉시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내가 너를 버릴 것이다!”라고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을 가감 없이 전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헤롯 안디바와 그 부인에게 예언자의 사명을 다하다가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여러 차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스라엘을 경책하며 돌아오기를 호소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을 모르셨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목자의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시며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총독 벨릭스와 부인 드루실라에게 어떤 복음을 전했습니까?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을 전했습니다. (행 24:25) 벨릭스가 바울의 말을 들었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예언자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렘 6:14; 8:11)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서 8장에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 6:14; 8:11/개역개정) 

여러분!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 설교나 듣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받아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이 더욱 뜨거워져 갈 때, 성경을 읽고 싶고, 말씀을 더욱 듣고 싶어 할 때, … 그때 우리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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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지난 주일 말씀과 오늘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과 저의 마음에 더욱 선명하게 새겨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넓은 길을 뒤로하고 좁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 양쪽에서는 거짓 예언자들이 온갖 달콤한 말로 우리를 속이려고 합니다.

한쪽에서는 어떤 소리가 들립니까? 여러분! 한쪽에서는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족하다고 유혹합니다.

그런데 거짓 예언자들의 메시지에는 십자가의 영광이 없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메시지에는 온 세상의 모든 종교의 냄새가 나며, 바리새인의 악취가 풍깁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이를 악물고, 종교적 규율과 헌신으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고 합니다. 그리고 넓은 길의 바닥에는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지쳐 쓰러진 우울증 환자들과 바리새인의 화살을 맞고 쓰러져 신음하는 부상자들과 이미 죽은 사망자들이 즐비합니다. 

의지가 강한 소수의 사람만이 이를 악물고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마에는 주님께서 친히 붙이신 선명한 글씨가 쓰여 있습니다. “바리새인, 위선자!”

여러분, 다른 한쪽에서는 어떤 소리가 들립니까? 다른 한쪽에서는 거짓 예언자들이 우리를 안심시키려고 유혹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십자가는 이미 과거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우리 과거에 십자가의 은혜와 혜택을 받았으니, 이제는 십자가를 뒤로하고 평안과 행복을 추구하면 된다고 유혹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메시지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하신 말씀이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는 말씀은 거의 없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산상수훈을 설교할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기준선 이하로 낮추어버리거나 구원의 확신 등을 미끼로 회피해 버리게 만듭니다. 그들이 십자가를 이야기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묘사하는 십자가는 주님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철학적으로 어리석어 보이고 종교적으로 걸림돌이 되는 거치는 그런 험한 십자가가 아닙니다. 눈물의 찔끔 흘릴 만큼의 감상적인 십자가입니다. 축복을 가져다주는 매개체나 종교적 장식물 정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무게는 우리 주님의 생명의 무게인데 거짓 선지자들의 십자가는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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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말씀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는 지난 주일에 이어서 우리가 좁은 길을 걷기를 원하십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는 길”도 아니고 “행함이 없이 구원을 얻는 길”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길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비좁은 길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좁아지고 또 좁아져서 우리가 가는 길은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이 좁아져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중생의 좁은 문을 통과하여 주님의 은혜로 좁은 길을 걷는 삶은 좁디좁아서 마치 칼날 위를 걷는 것도 같습니다.

이 길만이 선택하신 하나님 백성의 유일한 삶의 여정입니다. 단지, 구원에 감사해서 선한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만드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그러한 여정입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으로 거룩하게 빚어지는 그러한 여정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결국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나무일 뿐이고 나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나쁜 나무는 나쁜 나무일 뿐이고 절대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잘되어봤자 바리새인처럼 될 것이고 잘못되면 우울증으로 자살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저와 여러분은 좋은 나무입니까? 우리의 말과 행동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만드시기로 작정하신 새로운 피조물은 점점더 많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 말씀을 하시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 15:11)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좁은 길을 걷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가난합니까? 슬픕니까? 가난하기에 천국의 소망이 있습니까? 슬프기에 하늘 아버지의 위로가 있습니까? 이런 영혼에게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집니다. 하늘 아버지의 위로가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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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어떤 신자들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행복을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이런 신자들은 절대로 영원한 행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의 행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얻는 영원하고 참된 행복이며 이러한 행복은 오직 우리 주님만 주실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신앙의 모델이 누구입니까?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존경받는 사역자들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모델은 예수님 뿐입니다.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가진 우리 주님과 우리 주님의 증인들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보니, … 우리 신앙의 모델이 될만한 분들은 구름떼보다도 더 많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거짓 예언자들로부터 고통을 받은 참된 성도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좁은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의 삶의 고백입니다. 좁은 길을 걷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8–10) 아멘!

좁은 길을 걷는 사도의 권면입니다. 이 권면이 오늘 주님의 말씀을 반영한 것이라고 여겨지신다면 오늘 제가 전한 말씀은 최소한 거짓 예언자의 말은 아닙니다. 이 권면대로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빚진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육신에 빚을 져서 육신을 따라 살아가야 할 사람들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아간다면 죽게 될 것이지만 성령님을 힘입어 몸의 못된 행실들을 죽이면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롬 8:12-14/새한글)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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