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률 (마 7:12) / 산상수훈 35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 7:1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산상수훈 본론에 있는 모든 교훈을 요약하시며 마무리하고 계십니다. 산상수훈의 첫 부분을 되살려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 5:17)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 산상수훈 본론에서는 율법이나 예언자가 말하는 본뜻을 알려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하지만 너희는 이렇게 하여라”라는 식으로 많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한마디로 산상수훈의 중심 교훈들을 요약하셨습니다. 오늘 이후에는 경고의 말씀들이 이어지고 산상수훈이 끝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랜 시간 산상수훈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지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문장으로 율법과 예언서를 요약하셨습니다. 어떻게 요약하셨습니까?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로 통칭하던 구약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 말씀의 본뜻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우리 마음에 이 말씀이 이미 깊이 새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설명해 드릴 필요도 없을 정도로 여러분은 이미 본능적으로 이 말씀의 뜻을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의 양심에 이 말씀을 새겨두셨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이전에 태어난 힐렐이라는 유명한 랍비가 있습니다.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와 함께 유대교의 한 축을 이루었던 유명한 율법 교사입니다.
어떤 이방인이 힐렐을 찾아와서 한쪽 다리로 서 있을 수 있는 짧은 시간에 유대 율법을 설명해 줄 수가 있다면 기꺼이 유대교로 개종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힐렐은 단 한마디의 말로 유대 율법을 요약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마십시오. 바로 이 한마디에 모든 율법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 밖의 것들은 그저 부연 설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힐렐)
예수님의 말씀과 아주 유사하지요? 단지, 힐렐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라는 식의 소극적 실천을 강조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 하여라”라는 말씀으로 적극적인 실천을 강조하신 것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듭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온 인류의 양심에 새겨 놓았다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유대 문화권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모든 문화권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유사한 경구가 발견됩니다. 동양에서는 공자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제가 평생 지키고 행해야 할 덕을 한마디로 표현할 말이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서(恕)라는 말이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아라.” (己所不欲勿施於人) 랍비 힐렐의 말과 거의 같지요? 인간관계의 도리를 나타내는 이런 경구는 온 세상에 퍼져 있습니다. 그만큼 오늘 말씀은 인류 보편적인 말씀입니다. 세상에 존재했던 어떤 지혜로운 사람도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고 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적극적인 실천을 강조하셨기에 더 고결하고 뛰어난 윤리라고 상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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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때로 선한 불신자들이 악한 그리스도인보다 율법을 더 잘 지키는 모습을 봅니다. 참으로 부끄럽지만 … 하나님께서 때로는 선한 불신자들의 행동을 더 기뻐하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고결한 윤리를 자랑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정작 자랑해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진 율법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선한 행동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고결한 윤리를 자랑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산상수훈 결론의 주님의 말씀이며 또한 로마서 초반부 내용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마음에 율법을 새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인종과 종교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종이나 종교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실천으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확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롬 2:14–16)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을 온 인류의 양심에 새겨두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인간이라면 네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켜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마음에 새기신 율법대로 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자기 양심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옳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도, 자기 양심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데도, … 아무렇지도 않게 옳지 않은 그 일을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이기심 때문입니다. 죄인 된 인간은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 자기 양심에 반하여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행합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공감 능력을 주셨습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이것이 나의 인간 동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최소한의 윤리입니다. 하지만 이런 윤리조차 세상에서는 가장 위대한 선생들이 말한 고결한 윤리로 취급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양심에 새겨두신 최소한의 율법조차 거의 지키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법에 때때로 복종하는 소수의 선한 사람들로 인해서 점점 더 지옥으로 되어가는 것을 겨우 면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늘 싸우는 두 아들을 앞에 두고 제 어머니가 자주 해주시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 어머니는 누구에게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동생과 싸울 때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천국과 지옥에는 식당이 있는데 똑같은 풍성한 음식이 차려져 있습니다. 천국이든지 지옥이든지 모든 사람이 1m가 넘는 긴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데 천국과 지옥의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옥에서는 긴 숟가락으로 서로 자기가 먹으려고 하다가 식사 시간이 끝나버리고 결국은 아무도 밥을 먹지 못한다는 겁니다. 말 그대로 “지옥 같은 풍경”을 연출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천국은 어떤 풍경일까요? 배고픈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 모든 사람이 긴 수저를 들고 옆에 있는 형제자매의 입에 음식을 넣어 준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속아 넘어갈 법한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 오늘 말씀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 행동하는 공감 능력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 말씀이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분명한 경계선일 것입니다. 아마도 천국은 공감 능력이 충만한 곳일 것이고, 지옥은 공감 능력이 전혀 없는 곳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왕이십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거부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온 힘을 다하셔서 이 세상이 더는 지옥이 되지 않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신다.”(히 1:3)는 히브리서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바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 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순종하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집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며 당신께서도 하나님 나라가 속히 오기를 지금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세상 사람의 마음에 새겨두신 하나님의 법과 성령님이 성도의 마음 판에 새기신 하나님의 법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남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소극적 명령과 “남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그 일을 하여라”는 적극적 명령의 미묘하지만 큰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전자는 더는 지옥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명령이며 후자는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드시기 위한 명령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명하신 것이고 후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 백성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전자는 나쁜 일을 하면 심판하시겠다는 뜻이고, 후자는 선한 일을 하지 않으면 심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작아 보이지만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 7:12)
### 실천을 위한 명령
먼저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실천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마음과 느낌이 아니라 실천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러므로”라고 하셨습니다.
일단, …“그러므로”는 먼저, … 산상수훈 전체를 받습니다. 산상수훈 첫 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누가 말씀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 (마 5:1-2) 산상수훈은 일반 랍비가 아니라 모세보다 더 뛰어나신 분, 율법을 받은 자가 아니라 율법을 베푸신 분, 곧 (마태복음 마지막에 나타나신 바대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우리 주님의 말씀이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베푸시고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해 주셨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 뒷부분으로 가 봅시다.
우리가 여러 차례 살펴본 바처럼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은 산상수훈의 결론부에 있는 한 구절에 제한을 받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하늘 아버지의 자녀라면 모두 절대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듣고 내일 잊어버릴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절대 이 말씀을 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참 훌륭한 말씀이야!”라고 감탄하고, “좀 노력해 보아야지”라고 가볍게 넘길 계명이 아닙니다.
물론 이 말씀이 이 땅에서는 온전히 지켜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열심으로 이 일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이 땅에는 자기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 사는 이런 사람들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례 요한 이래로 하나님 나라는 계속 커져가고 있습니다. (마 11:12)
2월 23일은 전 세계적으로 “노예 해방의 날”로 지켜집니다. 1807년 2월 23일, 미국보다 50년가량이나 앞서서 영국에서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사람, 윌리엄 윌버포스가 노예들의 고통에 공감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황금률이 부족함이 많지만 절대 순종한 한 청년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영국의 젊은 하원의원이었던 윌리엄 윌버포스는 법안 통과 20년 전, 1787년 10월 28일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내 일생을 바쳐 완수해야 할 두 가지 사명을 주셨다. 하나는 노예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국 사회의 악습을 개혁하는 일이다.” 그리고 11번의 법안 통과의 좌절 끝에 20년 만에 노예 제도 폐지의 시작이 되었던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통과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동료 인간의 고통에 공감한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갑니다. 세상이나 교회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를 보내주셔서 모범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말씀에 순종함이 얼마나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오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지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고자 하는 당신의 자녀에게 당신의 권능과 지혜를 얼마나 한량없이 부어주시는지,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얼마나 힘 있게 하도록 하시는지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핑계 댈 수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가끔 서로를 쳐다보며 서로의 연약함을 통하여 약간의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오늘 말씀을 비추어볼 때 하나님의 뜻은 명백하게 “남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바대로 내가 먼저 남에게 해주는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전기를 읽어 보십시오. 성도의 행위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내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 심판하시는 명령
더 나아가서, 이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오늘 말씀 시작의 “그러므로”는 산상수훈 전체를 받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7장 앞 부분을 받습니다. 본문 앞 7장 전반절에서는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형제자매를 심판하는 그 잣대로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동일한 원리가 본문 말씀에도 적용됩니다. 형제자매를 내 몸처럼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동일한 기준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실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율법의 기준은 자신과 이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윤리를 낳습니다. 최고의 선을 낳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나와 이웃의 관계 외에 더욱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잘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너와 너 이웃의 관계로 내가 너를 심판하듯이 네가 이웃에게 행하는 그대로 내가 너에게 행할 것이다.”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이웃에게 해 주는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는 산상수훈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에 나타난 위대한 원리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잘못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의 빚을 진 형제자매의 빚을 탕감하여 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의 빚을 탕감해 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만 달란트 빚졌던 종 이야기가 기억나실 것입니다. 왕이 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셨는데 어찌 몇 푼 안 되는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하겠습니까? 주님이 들어주신 이야기의 결론은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받은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한 그대로 우리를 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만 달란트 빚졌던 종 비유”의 결론으로 우리 주님은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과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 18:35)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님의 말씀이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의 말씀은 읽을 때마다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우리를 어떻게 대하실지 결정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 기독교 도덕의 가장 기초요 근본 원칙입니다.
이 위대한 영적 원리는 우리를 말씀의 결론으로 이끌어갑니다. 이제까지 오늘 말씀의 “그러므로”가 산상수훈 중심 교훈의 결론으로써 “그러므로”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말씀의 “그러므로”는 본절 앞 부분인 7장 전반부를 받는 “그러므로”라는 사실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을 대하는 잣대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이러한 영적 원리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산상수훈의 가장 핵심적인 교훈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 사랑을 증명하는 명령
이제, 주님께서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라고 하신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오늘 말씀은 율법과 예언서, 즉 성경 전체의 본뜻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에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마 22:37–40)
그리고 오늘 말씀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 7:12)
놀랍게도 우리 주님께서는 사실상 모든 율법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중에 바로 이웃 사랑이라는 점을 극적으로 강조하고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이웃 사랑이 중요합니까? 산상수훈 교훈의 핵심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중요합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이웃 사랑의 잣대로 우리를 판단하시기 때문에 중요합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는 이웃 사랑의 잣대로 우리를 평가하실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진리는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그것이 본문 말씀의 “그러므로” 바로 앞에 있습미다.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할 이유가 될까요? 바로 앞 절과 함께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 7:11–12)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기로 결심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는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아버지이시라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전체를 꿰뚫는 진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바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고 우리는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버지의 온전함을 추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의로운 일을 행할 수가 있으며, 하나님 아버지만 의지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재물에 의존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제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를 이기고 오직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만을 추구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 위대한 “그러므로”의 중심부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에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을 이기고 이웃을 선하게 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은혜로 새로운 성품, 새로운 은사, 곧 사랑의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선뜻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 안의 죄뿐만 아니라 우리 안의 두려움 때문이기도 합니다. 광야를 걸을 때 하나님께서 물과 양식을 공급하지 못하실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옛 이스라엘의 믿음을 빼앗아 간 것처럼, 가나안 땅에서도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 옛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니라 맘몬을 섬기게 한 것처럼, 상처받을 두려움이 우리 이웃을 선대하지 못 하도록 합니다. 내가 선대한다고 상대방도 나를 선대할 것이라는 보장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 아버지를 신뢰함으로 내 이웃을 선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사랑의 동기는 상대방이 아닙니다. 우리 사랑의 동기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이웃사랑의 동기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가 아버지의 큰 용서를 받았느냐? 그렇다면 형제자매가 너에게 죄를 짓더라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마 18:22) 네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 내 생명을 통해 한량없는 사랑과 은혜를 받았느냐? 그렇다면 네 이웃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라. 이것이 나에 대한 네 사랑의 보답이다. 너는 이웃 사랑으로 나에 대한 너의 사랑을 증명하여야 한다.” 이것이 “그러므로”의 참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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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말씀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왜 이웃을 사랑하는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느 세상 사람들처럼 우리 행위의 동기는 우리의 이기심이 아닙니다. 세상의 고결한 인격의 선한 사람들과 종교인처럼 우리의 행위는 상대방도 아닙니다. 우리 행위의 동기는 나를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사랑의 동기는 나를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차이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망이 없는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가망 없어 보이는 이웃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두려움없이 마음껏 형제자매를 사랑할 우리의 유일한 동력입니다.
아무리 악한 세상이라도 주님의 율법이 조금이라도 지켜지는 곳은 사람이 살만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율법이 지켜지지 않고 서로를 공감하지 않는 곳은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게 되고 점점 더 살기 힘든 곳이 되어갑니다. 세상이든지 교회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참된 문제는 자원의 문제도 아니고 환경의 문제도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참된 문제는 관계의 문제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라도 우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지옥으로 치달아가는 세상과 다름없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 면에서 전형적인 INTP인 저는 하나님과 여러분 앞에 회개할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계명은 느끼는 영역이 아니라 실천의 영역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율법은 실천의 영역이라는 점을 강조해 오셨습니다. 공감 능력이 뛰어나든지 공감 능력이 떨어지든지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뇌과학자들은 공감 능력이 전혀 없이 태어난 사이코패스도 교육과 학습을 통해서 남이 좋아하는 일과 선행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정말입니다.
우리는 수년 간 매 주일 하나님께서 속히 천국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고 찬송해 왔습니다. “주님의 백성 서로 헤아려 시기와 미움 아주 버리고 하나님만을 홀로 섬기는 천국을 어서 이뤄주소서.” (새찬송가 322장)
그러므로, 이 시간 사랑하는 주님 앞에서 다 함께 말씀드립시다. 이제는 내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자매의 마음을 먼저 돌아보겠다고 말씀드립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유일한 길임을 고백합시다.
세상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에 따라 이웃의 마음과 필요에 공감하면서 사는 사람은 상처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악한 세상은 선한 사람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아직도 하나님의 공의와 인과응보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교회도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진정 지체의 필요에 공감하는 사람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는 그 사랑을 먼저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대접을 받고자 하시는 대로 우리를 대접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먼저 살피라고 요구하실 권한이 없으시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 사랑은 바로 하나님 사랑입니다! 우리의 이웃 사랑은 바로 우리 하늘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도 마땅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형제자매가 싸우는데 어떤 부모가 기쁘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롬 13:8–10)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갈 5:14)
아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과, 성령님이 이루시는 사귐이, … 저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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