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씨앗교회

의로운 일을 할 때 (마 6:1-4) / 산상수훈 24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https://youtu.be/XfNbW1I4B5Q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그렇게 하듯이 네 앞에 나팔을 불지 말아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 6:1–4)


마태복음 5장부터 시작하여, 이제 6장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5장에서와 마찬가지로 6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심을 강조하십니다. 6장에 나오는 “아버지”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우리말 개역개정에 13번 나옵니다. 대부분,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5장과 마찬가지로 6장에서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 되심을 전제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심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는 하나님 자녀의 특성을 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6장부터는 하나님 자녀의 삶에 관해 주로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6장 앞부분에서,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측면을 다루십니다. 신앙생활을 경건, 혹은 경건의 실천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6장의 뒷부분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측면을 다루고 계십니다. 


즉, 산상수훈의 전체 흐름을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절대적 과제는 우선은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만 하나님 아버지의 특성을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하나님 자녀의 신앙생활이 있고, 그다음에 하나님 자녀의 일상생활이 있습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의 논리적인 구조이며, 사실상 신약성경 전체의 논리적 구조이기도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자녀 된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기를 기대하실까요? 지금부터 주님께서는 그것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자선입니다. 1절부터 4절,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다음 말씀은 기도입니다. 5절부터 15절까지입니다. 이 단락 안에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즉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셋째는 금식입니다. 16절부터 18절까지입니다. 이 설교의 서론에서 여러분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신앙생활의 중요한 세 가지 요소로 자선과 기도와 금식을 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자선, 기도, 금식


주님께서는 5장에서 하신 것처럼 항상 대원칙을 먼저 말씀해 주십니다. 그 다음에 구체적인 사항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지요. 6장 1절에 나타난 대원칙은 우리가 의로운 일을 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원칙입니다. 이 원칙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자선뿐만 아니라 앞으로 말씀하실 기도와 금식에도 적용됩니다.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마 6:1)


이것이 대원칙입니다. 이 말씀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선과 기도와 금식이 의로운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선과 기도와 금식이 우리 신앙생활의 모든 것인 양 말씀하십니다. 신약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금생과 내생의 약속이 있는 경건의 표지인 양 말씀하십니다. (딤전 4:8)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자선과 기도와 금식을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자선과 기도와 금식이 하나님 자녀로서 행해야 할 의로운 일이라는 인식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스스로 우리 신앙생활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규정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 신앙생활의 규범을 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이것이 우리 신앙에 중요하다! 저것이 우리 신앙에 중요하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주제넘은 생각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사도들과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전승을 따라야 하며 그분들의 규범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자선과 기도와 금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자선과 기도와 금식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 생활을 이루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이루어가셨습니다. 목회서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은 구원을 얻는 경건의 비밀(딤전 3:6) 에 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초대교회의 문서들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디다케” 문서를 살펴 보아도 자선과 기도와 금식을 주님의 중요한 교훈으로 다루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자선과 기도와 금식에 관한 주님의 교훈을 실천하기 위해 애쓴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자선과 기도와 금식이 신앙 생활의 주요 실천사항이 아니라면 우리 신앙 생활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흐름에서 벗어난 것은 아닐까요?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아무튼, 우리 주님께서는 자선과 기도와 금식을 제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시고, 단지 주의할 점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마 6:1)


나의 기쁨인가? 하나님의 기쁨인가? 


어떻게 우리가 사람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의로운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면 대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단 두 가지만 염두에 두면 됩니다. 자선이나 기도나 금식의 실천에서 두 가지만 염두에 두고 조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 선택은 “나 자신이냐? 하나님이냐?”입니다. 


주님께서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겠습니까? 나를 위해서입니다.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문제입니다. 


내가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 사람들에게 좋은 소리를 들으면 즉시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남에게 보이려는 내 행동의 동기는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생활에서 다른 사람과 하나님의 선택이 문제가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의 선택이 문제입니다. 똑같이 자선을 하고, 똑같이 기도를 하고, 똑같이 금식을 하더라도 “나를 위해서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 하느냐?”는 하늘과 땅의 차이며, 천국과 지옥의 차이를 낳습니다. 이것이 오늘 하신 주님 말씀의 의미입니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늘 아버지와 자녀 된 나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자각하는 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번번이 잊어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구주 예수님과 사도들과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삶은 승리와 승리로 점철되는 데 반해서, …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실패와 실패를 거듭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 하늘에 진정 우리 아버지가 계십니까? 나는 진정 하늘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입니까?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큰 문제요, 유일한 문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진실로 자녀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 된 삶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이 하는 모든 말씀이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요 14:10)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온 생애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바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절대로 당신 자신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아버지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런 삶을 사신 우리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당신이 가신 그 길을 따를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마 16:24; 눅 9:23) 이것이 금생과 내생의 영원한 약속이 보장된 경건의 비밀입니다!


그리고, …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바리새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도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은 바라지 않으니 어떻게 나를 믿을 수가 있겠느냐?” (요 5:44/공동번역개정)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와 여러분 모두, … 주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우리가 서로의 칭찬을 구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교회 생활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 서로를 격려한다는 명분으로, … 서로에게 칭찬을 구하고, 서로에게 칭찬을 돌리고, 서로에게 칭찬을 바라는 그런 사람들로 가득하다면 그런 곳은 교회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격려와 칭찬이 없는 것이 교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이 교회의 문제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행한다면, 그것이 자선이든지, 기도이든지, 금식이든지, … 어떤 의로운 일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자녀로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모든 일을 행한다면, … 그런 자녀에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보상과 상급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코람데오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마 6:1)


좀 더 깊이 나아가 본다면 이 말씀은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경구를 생각나게 합니다. 코람 데오. 즉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구약의 용어로는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여러분 책상 앞에 하나의 성구만을 붙여 둘 수가 있다면 Coram Deo를 추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감찰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녀 된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 하늘 아버지께서는 보고 계십니다. 때로는 사랑의 눈으로 때로는 우려하시는 눈으로, 불순종하는 자녀들을 향해서는 도끼눈을 하시고 쳐다보십니다. … 우리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우리 각자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사람을 속일 수가 있습니다. 스스로 속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교훈을 비웃는 바리새인들을 힐난하신 적이 있습니다. “…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을 아신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러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 (눅 16:15)


왜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러한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이기적이 아니라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사실상 타인을 위한 것이며, 가족을 위한 것이며, 내 자녀를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 속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보다 교회에 특히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가족을 위한 것인지! 하나님을 위한 일인지! 타인을 위한 일인지!


하지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은 타인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타인이 아니라 나를 문제 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냐 타인이냐가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이냐 나이냐입니다! 우리 신앙,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는 타인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형제자매나 배우자나 자녀나 애인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선행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타인을 위할 수가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힘으로 남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가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의 자아는 아직 살아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착각하시는 것입니다. 그토록 우리 마음은 부패했고 교활합니다. 우리 마음은 교활하여 문제의 본질을 늘 피해 갑니다. 모든 선한 일을 타인을 위한 양 포장하지만 결국은 나를 위한 일인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더 테레사 같은 성인도 자기의 기쁨을 위해 희생적인 봉사를 할 수가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의 마음의 동기를 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칠 수가 있겠습니까? (시 139:7)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의 머리털까지 모두 세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0:30; 눅 12:7)


“하나님 앞에서” … 이것이 하나님 자녀 된 우리 삶의 기본 원칙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임재 의식”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주님의 임재를 알고 잘 때까지 그런 태도로 살아갈 수가 있다면, … 우리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아버지!”라는 말은 어떤 위선자들의 말과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항상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고 신앙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참으로 경건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 앞에는 아무 것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창조주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히 4:13) 


이것이 기본입니다. 우리가 드러내 놓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벌거벗은 아담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뻐해야 하고, 그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셨으니 우리는 부끄러워하지말고 젖먹이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 안겨야 합니다. 우리는 갓난 아기들처럼 신령한 젖을 먹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야 합니다. (벧전 2:2)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고 우리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 내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적나라한 나의 모습을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히 4:12, 13) 


이것이 기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본질을 똑바로 본 자만이 그리스도께로 달려가 성령 충만을 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들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만 자선을 행하며, 하나님 앞에서만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만 금식하는 심령에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성령을 반드시 부어주십니다. 


우리 하늘씨앗교회 지체 모두가, 저와 여러분이 한 마음으로 코람데오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이 자리 이곳에 즉시 부흥이 임할 것입니다. 저의 보장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이 보장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쓰신 교회의 역사가, 부흥의 역사가 그것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임재 가운데 우리의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을 유지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크게 혁신적으로 변하겠습니까! 그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저와 여러분 신앙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가 있습니다.


상주시는 하나님


오늘 말씀 중 가장 놀라운 부분은 순종하는 자녀에게는 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히 11:6)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람들의 관심과 칭찬을 전혀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의 칭찬만을 바라는 자녀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보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상을 기대하는 태도는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크게 실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어린아이와도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 보상을 기대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진정한 축복의 종교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채윤이에 이르기까지 주님께 나오는 모든 사람이 모두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기독교입니다.


우리 주님도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의 보상을 위해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히 12:2) 히브리서 11장에 적힌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들이 왜 고난을 견디셨습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곧 무너질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하나님께서 보상으로 허락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히 11:10)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믿음을 가지고 떳떳하게 하나님의 보상을 기대하면서 선한 일을 행할 수가 있습니다. 행해야 합니다. 신앙 생활과 일상 생활 전부에서 이러한 믿음을 가진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전 9:24–25)


결론


이제 말씀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그렇게 하듯이 네 앞에 나팔을 불지 말아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마 6:2)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미 상을 받았다라”고 하는 표현은 고대 상거래에서 돈을 갚은 것을 묘사하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IVP성경배경주석”, 크레이그 키너, 1274페이지) 우리가 사람의 칭찬을 받으려고 선행을 행하는 순간 하나님의 장부에서 우리에게 주실 돈에 관한 기록이 지워집니다. 주님은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모든 선택과 행동을 할 때마다 이것을 기억하고 기준으로 삼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어제 당근 거래를 하러 의왕역으로 가다가 근처의 큰 교회 교인들이 휴지를 줍고 청소를 하며 아파트 단지를 도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들 환한 웃음을 짓고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이 보기가 좋았습니다. 다만 교회명을 크게 적은 어깨띠를 한 모습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우리의 수준이 이 정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의가 이보다는 더 나아야 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한국의 초대교회 우리 선배들은 이렇지 않았는데, …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물론 드러내 놓고 나팔을 부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하기가 쉽습니다. 선한 일을 하는 개인과 교회는 사람들의 칭찬을 듣기가 너무 쉽습니다. 동시에 기대했던 칭찬이 돌아오지 않으면 무력감에 빠지거나 기분이 나빠지거나 심지어 분노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만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어떤 의미입니까? 나팔을 불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는 일을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 6:3–4)


우리는 제가 좀 전에 한 것처럼 자기를 선전하는 일을 멸시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가 되어 주님의 명에 따라 지역 사회에서 남모르게 자선을 베풀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선행을 나팔 부는 저들과 우리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고 하늘 아버지께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기도하는 그 순간 즉시 누가복음 18장 11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바리새인이 되고 맙니다. 저와 여러분은 언제라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도한답시고 다른 교회를 깎아내리고 우리 교회를 자랑할 가능성입니다.


주님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남에게 알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알려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선행을 할 때 은밀하게 행한 후에 그것을 우리의 장부에 기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표현들은 고대 상거래의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실상 우리가 선한 일을 은밀히 행한 후에 하나님 아버지의 장부에 기록되어 있음을 믿고 잊어버리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우리가 자선을 베풀면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보상하실 것입니다. 상을 주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는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다 …” 우리는 묻겠지요? 주님 너무 과분한 말씀입니다. 저희가 언제 주님께 그런 일을 하였습니까?” (마 25:31-46) 주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너는 그 사이에 잊어버렸구나! 하지만 하늘 아버지의 장부에는 그 날의 일이 이렇게 분명히 적혀 있다! ”


하지만 이 세상에서 나를 위해 행했던 모든 선행은 그곳에 기록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저 영원한 것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날에 나에게 벌어질 일들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크고 두려운 그날에, … 주님께서는 온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내셔서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날에 주님께서는 큰 책을 여시고 그 책에 적힌 대로 보상하실 것입니다. 그날에는 저와 여러분의 모든 비밀이 모든 피조물 앞에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쁨을 위하여 했던 모든 선행이 주님이 펼치신 그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했던 모든 일들이 세부사항까지 그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흘렸던 눈물, 주님의 백성을 위해 흘렸던 눈물, 주님의 이름으로 온갖 오해와 멸시를 당할 때 흘렸던 눈물을은 주님이 마련해 놓으신 병에 모두 담겨 있어서 정확하게 계수될 것입니다. (시 56:8) 우리가 지체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 흘렸던 눈물들은 한 방울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주님께서 보관하여 계수하실 것입니다. 
그날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섬겼던 주님의 모든 지체들은 영광과 존귀를 입고 주님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이 모든 사람이 듣도록 울려 퍼질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눈을 들어서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시다. 더 영원하고 더 궁극적인 것들을 바라봅시다. 우리가 항상 주님의 존전에 있음을 잊지 맙시다.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서 의로운 일, 즉 자선과 선행을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갑시다. 주님의 일은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합시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마 25:23)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것만 바라봅시다. 다른 것은 기대하지 맙시다.


주님과 함께하는 잔치를 함께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https://youtu.be/XfNbW1I4B5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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