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씨앗교회

숨어서 보시는 내 아버지께 (마 6:5-8) / 산상수훈 25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https://youtu.be/DqUDOtq4aDk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마 6:5–8)


오늘 설교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자선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기도입니다. 다음 주일에는 “주기도문”, 즉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기도에 관해서 설교하는 일은 저에게 무척 부담스럽습니다. 기도에 관해서 저는 여러분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이라기보다는 부끄러움입니다. 기도를 잘하고 싶지만, 기도는 저에게 항상 어려운 과제입니다. 우리 중 몇몇 지체도 저와 마찬가지 심정일 것입니다. 
우리 중에 기도 생활을 잘하고 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은 오늘 하시는 주님의 경고를 받아서 더욱 잘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응답받고 열매를 맺어서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중 기도의 사람이 있다면 그 지체의 기도는 개인의 축복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에는 계속해서 기도에 실패한 지체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 말씀은 애초부터 제자들이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십니다. 다만 기도의 잘못된 관점과 마음의 태도를 경고하실 따름입니다. 기도를 회복해야 할 지체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시작할 마음과 용기를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삶의 모든 비결이 기도에 있습니다.


말씀의 개요


오늘 기도에 관한 주님의 말씀은 단순합니다. 부정적인 사례를 두 가지 말씀하시고, 각각에 대해서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 부정적인 사례는 위선자들처럼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마 6:5)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 이것이 위선자들의 문제입니다. 지난 주일, 자선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고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이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 6:6)


은밀하게 하나님과만 만나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을 잘 보십시오. “너희”라고 하시다가 기도의 은밀성을 강조하시기 위해 “너는”이라고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특정한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혼자만 있을 수 있는 곳, 하나님과 은밀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을 의미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라고 하셨습니다. 은밀하게 하나님께만 기도해야만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두번째 부정적인 사례가 무엇입니까? 이어서 보겠습니다. 이방 사람과 같이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마 6:7)


이방 사람들과 우리가 무엇이 달라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에 우리의 기도는 위선이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이방 사람들은 다릅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의 신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듣는 신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마 6:8)
주님께서는 기도 응답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어떤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말을 많이 하여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들이 어떻게 기도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 때 열매를 맺게 하십니까? 결국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핵심입니다. 결국은, …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관점이 우리의 기도 전반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자기애, 위선의 뿌리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살펴보겠습니다. 위선자들의 사례입니다. 위선자들은 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할까요?


만약에 제가 기도하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해 봅시다. 목사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제가 그런 마음을 품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사람을 의식하는 것이 잘못임을 압니다. 그런 마음을 품는 것 자체로 잘못된 것입니다. 왜 잘못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의로운 일, 선행, 경건과 관련해서는 더욱더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의로운 일을 함에 있어서 자기에게 관심을 둘 권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만 와야 합니다. 자기에게 관심을 두는 것, 그 자체가 죄의 본질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순간 우리가 하는 모든 의로운 일과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할 경건한 삶은 크게 손상이 됩니다. 자기애, 자기 사랑, 자기에게 관심을 두는 마음이 위선이라는 죄의 뿌리입니다.


자기에게 관심을 두는 그 마음 위에 “다른 사람이 내가 기도하는 모습을 좀 보아주었으면 …” 하는 욕망이 자라납니다. 이런 욕망은 우리 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매우 교묘하게 생겨납니다. 하나님 말씀이 아니면 이런 교묘한 욕망의 정체를 폭로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은밀한 욕망은 하나님 자녀의 순결한 마음 밭에 뿌려진 마귀의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로운 일과 선행을 할 때, 즉 자선과 기도와 금식에 있어서, … 우리가 싸워야 할 죄는 바로 “다른 사람이 보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러한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죄의 교활함에 대하여 …


여러분은 언제 기도하십니까? 식사 기도이든지, 예배 중 맡은 대표 기도이든지, 스스로 정한 시간에 하는 기도이든지, … 기도하려고 애쓰는 지체라면 누구도 이 교활한 위선의 죄를 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죄의 무서운 점입니다. 가장 경건한 자리까지도 따라 들어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슬쩍 끼어드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자리에까지 따라옵니다. 우리 경건의 핵심, 개인적으로 하늘 아버지와 만나서 교제하는 기도의 자리에까지 따라와서 죄는 우리 경건을 무력화시키고자 애를 씁니다.


죄는 하나님 자녀들을 끝까지 따라다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을 때만 죄가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존전에 나아가 하나님 바로 앞에서 기도할 때, 그때마저도 죄는 우리를 따라와 공격하고 괴롭히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삶에 지쳐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삶을 새롭게 하겠다고 결단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며 용서하시고 축복을 내리시는 그 순간에도 죄는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에 서서 그 사람의 목을 조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하기가 그토록 힘든 이유입니다. 우리는 죄의 권세가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 합니다.


죄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이 존재하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천사가 타락해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존재하기 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안에서도 죄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죄의 무서운 영적인 차원입니다. 여러분은 죄가 영적인 권세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눈에 보이는 우리의 행동이나 말의 관점에서만 생각한다면 참으로 순진한 생각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기에 죄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죄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죄는 하나의 영적인 흐름이며 우리 마음의 경향성과 어우러져서 우리 마음을 도도히 휘젓고 있습니다.


천사의 죄나 아담의 죄나 죄는 궁극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요. 자기를 경배하는 것이며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사탄의 죄나 아담의 죄나 본질은 동일합니다. 자기애가 죄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서 죄의 본질을 보아야 합니다. 특히 기도라는 가장 신성한 영역에서 작용하는 교활한 죄의 실체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늘 아버지와 하나님 자녀가 소통하는 가장 신성한 영역에 죄가 끼어들지 못하게 싸워야 합니다. 마음공부나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을 깨닫고 성령의 능력으로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장 신성한 축복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한 행동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중생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합니다. 왜요! 죄사함을 위해서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는 주님의 보혈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여전히 필요합니다. 왜요? 죄사함을 받았는데요? 죄의 권세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의 능력과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주님의 보혈을 여전히 필요로 합니다. 


“…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는 점점 더 거룩해지고 점점 더 경건해 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기도할 때는, 기도할 때라도,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자기도 의식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 …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말씀하신, 이른바 “경건의 연습”에 관한 교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배워왔습니다. 옳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참된 교제에는 자연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모든 참된 교제는 완벽하고 세련된 말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비즈니스 미팅을 위해서는 깊이 생각하고 여러 사항을 정리해야 하고 해야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정리해야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준비가 필요없지 않습니까? 다만 두근대는 가슴과 만남에 대한 설렘만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만남도 그래야 합니다.


저는 지금, 우리 주님께서 간곡하게 당부하시고 경고하시는 바를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때만이라도 나를 생각하지 말자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적어도 기도할 때만이라도 우리의 전 존재가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식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잊고 오직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존전에 있는 것처럼, 그런 마음 자세로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가 어떻게 달라지겠습니까? 우리 각자의 자연스러운 개성이 드러나게 되겠지요. 예를 들어서 교회에 함께 기도할 일이 생겼을 때 우리가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게 될 때, … 우리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지체는 또박또박, 논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겠지요. 어떤 지체는 할 말을 잃고 눈물만 뚝뚝 흘릴 것입니다. 어떤 지체는 조용히 입술만 오물거리며 기도할 것입니다. 아마도 두 손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기도하는 지체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지체는 방언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어떤 지체는 이른바 “깊은 기도”로, … 즉 성령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몇 주간 계속하실 주님의 교훈에 따라 이른바 참된 기도를 드리게 될 때 우리 교회는 이렇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함께 드리며 옆의 지체를 책망하거나, 누구도 저 지체는 “저렇게 기도하지?”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얼굴만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기도하는 교회가 됩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즉 “주기도”를 드릴 준비가 된 것입니다. 


장소나, 시간이나, 자세나, 형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을 잃고 눈물만 흘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미사여구로 가득 찬 기도보다 훌륭한 기도일 수가 있습니다.


저는 향유를 부은 여인은 사실상 사랑하는 주님께 기도하고 있었다고 믿습니다. 과거에 창녀였던 그 여인의 마음은 주님 뒤편에서 눈물을 흘리는 그 순간, …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죄인이었던 그 여인에게 이 순간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님의 현존만이 중요했습니다.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새찬송가”, 288장)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가 응답을 받습니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눅 7:36-50)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드린 이런 기도가 응답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을 잃고 세리처럼 자기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잘 보이게 앞에 서서 당당하게 기도한 바리새인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멀찍이 떨어져서 가슴을 치며 눈물만 흘리다 시간을 다 보낸 세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드러내고 높이는 기도를 거절하십니다. 하지만 자기를 낮추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구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눅 18:9–14)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골방으로 들어가서 마음의 문을 닫고 세상과 나를 차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의 골방에 임재하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을 열어 말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입을 열어 부르짖는 첫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우리 아버지입니까? 아닙니다. “내 아버지”입니다! “내 아버지여!”


오직 내 아버지 앞에서 …


모든 종교의 기도는 본질적으로 신을 설득하고 신의 환심을 사서 신에게 많이 받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이방 종교인의 기도는 빈말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방 종교를 빋는 사람은 그들이 기도하는 신은 많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아닌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주고 받기식, 기브 앤 테이크의 종교입니다. 많이 주어야 많이 받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시라는 관점과는 정 반대의 끝 지점에 있는 관점입니다. 기도에 대한 이런 생각들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악한 관점입니다.


우리 입을 열어, 기도의 말을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기 전에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다. 내 아버지는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시며, 영원하시며, 소멸하는 불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얼굴을 뵈러 간다. 나는 지금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 그리고 입을 열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아버지여!”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복 받기를 원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저와 여러분에 대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각각 다르겠지만 지금 저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말은 제 말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예수님과 사도들과 성경의 권위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실 복은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3장에서 에베소교회 성도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엡 3:20)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분이십니다.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은 자기가 얻을 축복과 자기 사이에 하나님이 끼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사이에는 걸리적거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기도하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앞에는 오직 살아계시고 참되시며 전능하시며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계셨습니다. 그분들의 눈에는 세상도 없고 자기도 없고 오직 구속하신 주만 보였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기도의 비결입니다. 


영적 전투


하지만 마귀는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싸우라고 주신 무기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무기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구원을 위한 싸움에서 절대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에베소서 6장 등이 우리가 갖추어야 할 무장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허리띠, 정의의 가슴막이, 복음을 전하는 발에 신겨진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관한 말씀이 에베소서 6장 1절부터 20절까지 이어집니다. 우리 모두가 주일학교 때 배운 내용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전신갑주로 단단히 무장하더라도 마지막 한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갖 기도와 간구로 언제나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이것을 위하여 늘 깨어서 끝까지 참으면서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시오.” (엡 6: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우리가 가진 올바른 신앙입니다. 예수님과 사도의 전승에 기반한 정통이요 정통 교리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만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와 간구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말씀에 이어서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힌 자신이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에베소교회 성도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위대한 기도의 사람인 바울도 성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이런 곳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에베소서 6장 강해를 하며 성령 충만한 옛 성도가 쓴 찬송가 가사를 소개했습니다.


“기도로 각 부분을 무장하고서, 복음의 갑주를 입고 싸워라.”


또 다른 찬송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당신의 갑옷을 빛나게 하려면,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너의 대장 앞에서 항상 행하고, 힘을 다해 늘 기도하여야 한다.”


결론


이제 우리는 오늘 주신 말씀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해 오셨습니까? 오늘 하늘씨앗교회 지체된 우리에게 해 주시는 경고의 말씀이 너무나 적절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술책이 얼마나 교묘합니까!
우리모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기도의 자리로 나갑시다. 무너진 기도의 진지를 다시 쌓읍시다. 가능하면 각자가 한 군데라도 견고하게 진지를 쌓고 앞으로 돌격할 태세를 갖춥시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 예배 드리기 전에, 예배를 섬기는 자들과 참여하는 자들이 한 마음으로 주님의 임재와 보호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 예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루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서 내 육신과 정신이 무장해제되고 편히 쉬는 그 시간을 하나님께 의탁하지 않고 어떻게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영혼의 단잠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루를 시작할 때를 생각해 봅시다. 하늘 아버지께, 어린아이처럼 오늘 하루 벌어질 일들이 어떻게 진행될지 전혀 알 수 없다고 고백하고, 계획된 모든 일들을 아버지께 의탁하지 않는다면 어찌 하루를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성도가 말했습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기도로 짜여진 아름다운 직물과도 같다.” 


맞는 말 같습니다. 기도 없이 어찌 우리의 남은 삶이 하나님 아버지께 아름다운 직물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기도는 호흡이다”라는 경구는 진부할지라도 분명히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기도 없이는 우리 구원의 여정을 끝까지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 자녀의 생명이기도 합니다. 기도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신의 힘으로는 실천 불가능한 삶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의 기도에 불씨를 당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이번 한 주간의 기도가 다음 주일에 우리가 “주님 가르치신 기도”를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https://youtu.be/DqUDOtq4aDk

 

블로그의 정보

하늘씨앗교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