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영, 양자의 영 (롬 8:15-17) / 마틴 로이드 존스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영적 침체” 12장, 마틴 로이드 존스, 복있는 사람, 강남호 개정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 8:15-17)
성경에 기록된 말씀 중에 이보다 위대한 말씀은 없습니다. “복음의 절정”이라고 일컫는 로마서 8장에서도 이 말씀은 매우 특별합니다. 우리는 사도가 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엄청난 진리일수록 우리가 감동적인 느낌만 받고 지나가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단지 감동만 받고 정작 교훈은 우리 것이 되지 못할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왜 이 말을 했을까요? 이 말을 한 목적과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 바울이 이 말씀을 한 목적은 분명합니다. 바로 앞 구절과 연관이 있습니다. 로마교회의 성도들은 낙담해 있었습니다.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로마교회의 성도들은 실제로 우리가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낙담의 영, 침체의 영, 두려움의 영에서 로마교회 성도들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은 갓 믿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의 삶은 전투와도 같았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안팎의 악과 싸우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교훈대로 그리스도인답게 살고자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태도가 낙심과 침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려고 할 때 마귀는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하고 예수님이 가신 영광스러운 그 길을 따르려고 할 때, 마귀는 즉시 우리를 공격하여 낙심하게 하고 침체에 빠지게 하고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로마교회 문제의 핵심이 어디에 있을까요? 믿음에 관한 성경 진리를 명확하게 모르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모르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 행동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이 바로 행동이라는 진리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신앙의 곤경에 빠집니다. 또, 우리는 믿음이 순간의 결단이 아니라 평생의 여정이라는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미 거듭났다고 안심하며 방심해 버립니다. 그래서 곤경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특별히 본문에서, 믿음을 내 것으로 삼지 못해서 곤경에 빠지는 경우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리를 잘 이해했어도 여러분 것으로 삼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성경을 읽고 동의하면서도 정작 성경 진리를 내 것으로 삼지 못하면 내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저는 영적 침체와 낙심의 원인이 여기 있다고 믿습니다. 진리를 알더라도 내 것으로 삼지 못하면 바울이 말한 대로 종의 영에 매이게 됩니다.
여기서 종의 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속박하는 영이며, 노예의 정신이자 노예의 태도입니다. 대개는 그리스도인이 자기 삶을 더 높은 율법의 차원으로 끌어 올리려다가 종의 영에 매이게 됩니다. 저는 지금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압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에서 그들을 자유롭게 해 주셨다는 것,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자기를 구원하시고 의롭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믿음에 관한 진리를 명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 그리스도인의 자기 삶을 좀 더 의롭게 해보려다가, 사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려다가, … 종의 영, 노예의 영에 매이고 맙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신들이 노력해서 살아내야 할 일종의 중대한 과업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산상수훈 말씀을 듣고,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라고 깨닫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의 교훈을 읽고 “이것이 내가 바라는 삶이다”라고 규정하고, 사도들의 교훈을 읽고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인 내가 살아내야 할 삶이다”라고 확신합니다. 여기까지는 정상입니다.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그리하여 그런 사람은 말씀으로 깨달은 것들이 실천해야 할 목표로 여기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도움이 되는 방법들을 찾아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 자체가 목표가 되고 과업이 되는 것이지요! 교회 역사를 보면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에 관하면 말하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대충 살아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살 수가 없지요. 이를 악물고 온 마음을 다해 전념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삶을 살 수가 없어요!” 이런 사람들은 거룩한 영적인 삶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헌신해야 하며 각종 원칙과 규칙들을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세상과 멀어지며 주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과도 점점 더 멀어져갑니다. 로마 가톨릭의 역사에서 수도원이 나타나게 된 것이 한가지 예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 의하면 이러한 오해가 그리스도인을 종의 영에 매이게 만듭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로마 가톨릭뿐만 아닙니다.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쉽게 율법을 만들어내는 경향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만든 것들을 율법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경건을 위한 10가지 법칙”이니 “참된 그리스도인의 12가지 비결”이니 “응답받는 기도의 원리”라고 하면서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삶을 위한 선한 규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신약 성경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2장 끝부분, 사도의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 문제로 아무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서 떠났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이 세상에 속하여 사는 것과 같이 규정에 얽매여 있습니까? ‘붙잡지도 말아라. 맛보지도 말아라. 건드리지도 말아라’ 하니, 웬 말입니까? 이런 것들은 다 한때에 쓰다가 없어지는 것으로서 사람의 규정과 교훈을 따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꾸며낸 경건과 겸손과 몸을 학대하는 데는 지혜를 나타내 보이지만,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는 데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골 2:16–23/새번역)
이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종의 영이 침투한 것입니다. 물론 요즘의 행태는 그때와는 다르지만 종의 영은 오늘날도 여전히 역사합니다.
채식주의자인 신앙이 좋은 한 자매님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동물 살해가 사랑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믿었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율법을 부과하였습니다. 어떤 목적으로 그랬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상 그분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교리를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무의식중에 자기만의 율법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비추어서 본문 말씀을 살펴봅시다. 즉, 우리가 가진 새로운 율법을 만들어내는 성향을 고려해서 본문을 보자는 것입니다. 오늘은 간단히 원리만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딤후 1:7)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도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운 마음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종의 영은 어떻게 우리 속에 두려워하는 마음을 만들어 낼까요?
첫째, 종의 영은 하나님께 잘못된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는 마땅히 느껴야 할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땅히 느껴야 할 두려움을 무시한다면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종의 영이 만들어내는 두려움은 비겁한 두려움이자 “형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요일 4:18) 종의 영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형벌을 무서워합니다. 하나님을 우리 잘못과 흠을 찾기 위해 계속 감시하다가 결국은 벌을 줄 형사 재판관처럼 생각합니다. 종의 영에 매인 사람들은 항상 이러한 성향을 보입니다.
둘째, 이런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뿐만이 아닙니다. “거룩한 삶”이라는 중대한 과업도 두려워합니다. 스스로 성경이 요구하는 삶의 무게를 가늠해 보고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사업이나 직업을 포기하지 않고는 저런 삶을 살아낼 수가 있을까?”를 두려워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이런 삶 자체가 부담감과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과업의 엄청난 무게를 생각하고, 자기의 연약한 모습을 고민하고, “과연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면서 주저앉아만 있습니다.
셋째, 두려워하는 마음의 또 다른 형태는 마귀를 과도하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느껴야 마땅한 영적 두려움도 있습니다.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에 그런 예들이 나옵니다. 경솔하고 무지한 자들은 마귀를 농담거리로 삼는데 이들은 모두 어두운 세력의 무서운 능력을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악한 영적 세력을 마냥 무서워하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분들이 주로 이런 시험에 빠집니다. 영적인 능력을 알기에 마귀를 과도하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은 자기 속의 죄도 두려워합니다. 항상 자기를 비판합니다. 자기 마음의 어둠을 고백하기를 즐겨합니다. 물론, 자기 죄성과 자기 마음의 어둠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이 과연 그리스도인인지 의심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자기 죄를 모르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날은 옛 성도들처럼 죄에 대해서 애통하며 슬퍼하는 사람을 찾기가 힘듭니다. 현대인은 너무나 죄에 둔감해서 문제입니다. 반면에 오늘날 과도하게 자기 안의 죄를 두려워하며 자기 안의 죄의 능력을 과도하게 평가해서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다시 말하자면, 종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겪는 두려움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기 실패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했다. 이것은 맞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과연 이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과연 내가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는 그런 차원이 높고 고결한 삶을 살 수 있는가?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 나는 과연 그런 삶을 살아 낼 수가 있을까? 살고 싶긴 한 걸까?”
사도는 이런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종의 영과 두려워하는 마음에 매여 있던 과거의 삶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왜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려 하는가?” 사도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에게 해결책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도가 제시하는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과 성령의 내주에 대한 교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의 영에 대한 사도의 해결책입니다. 여기에 따르면 몇 가지 세부적인 해결책이 있습니다. 모두 다 믿음에 관한 진리의 해결책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 십자가를 지고 주님께서 가신 길을 가겠다고 결단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 아들의 형상으로 변할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속에는 “과연 내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즉시 성경 진리를 붙잡고 성령의 내주하심의 교훈으로 가야 합니다.
사도는 로마서 8장 13절에서 우리가 육신대로 살지 않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 (롬 8:13) 본문에서도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
사실상 사도는 로마교회 성도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 혼자만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너희 죄를 사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서도, 마치 하나님께서 너희 죄를 사해 주시고 은혜 베푸시는 일을 그만두신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너희는 두려움의 영, 종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 너희가 만약 너희 힘으로 산다면, 너희는 또 다른 율법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성령이 계신다. 너희는 홀로 있지 않다. 성령이 계신다!”
사도가 8장에서 계속 다루어 온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컨대 3절을 보십시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3) 여기에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서 할 수 없는 그것”이 무엇일까요? 율법은 연약하지 않습니다. 육신이 연약한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만든 율법이라 하더라도 그 율법을 지키기에 우리 육신은 너무나 연약합니다. 그래서 율법이 사람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나이 많은 목사님이 이 점을 잘 설명하셨습니다. 손잡이가 자꾸 흔들거려 빠지는 삽으로 땅을 파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쇠로 된 부분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손잡이가 연약하여 땅을 제대로 팔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좋은 예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연약한 손잡이로 땅을 파려고 합니다. 이것이 종의 영이며 율법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신 자들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롬 8:9)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사도는 말합니다. “…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종의 영에 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매일 필요가 없습니까?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힘과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동일한 주장을 반복해 오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루어야 합니까?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야 합니다. (빌 2:12) 이것이 참된 두려움입니다.
참된 두려움이 거짓된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이런 일을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 이런 일을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종의 영에서 벗어나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이 능력 주실 것을 믿고 싸우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지 않으면 노력하는 마음 자체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고 우리가 순종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이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병행 구절인 갈라디아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다”(갈 4:6)라고 말씀하십니다. 독생자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 안에 거하셨던 성령과 똑같은 분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동일한 성령을 자녀에게도 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능력 있게 만드셨던 그 성령께서 우리도 능력 있게 하십니다. 내주에 관한 진리를 믿고 여러분 것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진리와 더불어 우리가 알아야 할 두 번째 진리가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하나님과 우리의 깊은 관계를 상기시키십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다 자라서 입양된 아들이 되었음을 상기시키십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떨쳐 낼 수가 있습니다. 경건한 두려움과 경외감까지 떨쳐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히 12:28) 종의 영에서 나오는 두려움을 떨쳐 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습니다. 종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종의 영에 매인 자는 하나님 자녀가 하는 것처럼 두려움과 친밀함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종의 영에 매인 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영존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 사실이 명확해지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항상 우리를 돌보시며 영원히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주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깨닫는 순간 우리 신앙생활의 모든 것이 바뀝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소원은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됩니다.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느끼는 사랑과 두려움은 종으로써 느꼈던 사랑과 두려움과 완전히 다릅니다. 자식으로서 느끼는 두려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에서 비롯됩니다. 이렇게 되어야만 우리는 종의 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야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규칙과 규범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과 감사의 문제가 됩니다. 사도는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받은 축복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 이 논리는 신약성경의 일관된 논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형제 중에 중에서 맏아들”이십니다. (롬 8:29) 우리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자 상속자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3절의 예수님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 17:23)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사랑하시듯이,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과 똑같이 우리도 사랑하십니다.
성령께서 일하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지위, 새로운 신분을 가졌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아버지를 영화스럽게 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이 변화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영광스러운 삶을 살도록 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내 관점과 내 시각을 바꾸심으로써 종의 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에 매이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진리를 아셔야 합니다. 성령이 여러분 안에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 (고전 6:19) 이것이 비결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육신의 죄를 이기는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삶의 여러 문제를 제게 가져와서 “저는 이 문제로 계속 기도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반드시 점검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몸이 성령의 전인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나요?” 이것이 해결책입니다.
오해의 여지를 무릅쓰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는 줄이고 오히려 생각을 더 많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항상 기도하면서, 동시에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가 단순한 감정의 도피처가 되거나 절망과 좌절 속에서 외치는 비명인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도는 지적인 활동이기도 하다고 믿습니다.
오직 자기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에게 응답이 오고 능력이 임합니다. 어떤 사람의 기도를 응답하십니까? 아들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어떤 사람의 기도가 허공을 칩니까? 종의 영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확신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운명을 끊임없이 상기시키십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
이러한 관점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계속 사용하는 논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의 운명을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이 말씀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기준을 지키는 삶도 아니고 자기 힘으로 뭔가 해보고자 헛되이 애쓰는 삶이 아닙니다. 장차 우리가 있을 곳을 위해 준비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영광에 이를 것이며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 아버지의 의지를 꺾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확신이 두려워하는 우리가 종의 영에게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믿는 믿음입니까? 나의 궁극적인 운명을 믿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어떻게 할까요? 그다음 절을 보십시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3:3)
믿음이 우리의 힘이요 능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라는 사실, 우리의 운명이 이처럼 확실하고 안전하다는 사실, 우리의 운명을 막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하는 동력입니다. 이것이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을 율법으로 바꾸지 마십시오. 성령의 능력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변화된 신분에 주목하십시오. 가장 영광스러운 복음을 굳게 믿고서 자기 삶을 다시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살게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된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거룩한 성령께서 여러분의 몸에 거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아신다면 과연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운명을 믿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렇게 노래하게 됩니다.
“내 영혼아, 구원을 이루라. / 죄와 두려움과 염려를 이기고 어느 곳에서나 기쁨을 찾으라. / 아직 할 일이 있고 견딜 일이 있다. / 어떤 성령이 네 안에 계신지 생각하라. / 어떤 아버지가 널 향해 웃고 계시는지, 어떤 그리스도가 널 얻기 위해 죽으셨는지 생각하라. / 하늘의 자녀여, 그래도 한탄하겠는가!” (헨리 프랜시스 라이트 Henry Francis Lyte)
종의 영과 무서워하는 마음에 매이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하늘의 자녀여, 그래도 한탄하겠는가!” 여러분! 절대 한탄하지 마십시오! “어떤 성령이 네 안에 계신지 생각하라. 어떤 아버지가 널 향해 웃고 계시는지, 어떤 그리스도가 널 얻기 위해 죽으셨는지 생각하라. 하늘의 자녀여, 그래도 한탄하겠는가?”
이 찬송은 오늘 본문 말씀의 훌륭한 강해입니다. 이 찬송을 붙잡고 내 것으로 삼아 실천하십시오. 지금 내 감정이 어떻든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나에 대한 성경의 진리는 이처럼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죄와 두려움과 염려를 이겨내십시오. 구원을 이루십시오. 이기고 승리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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