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씨앗교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마 6:9a) / 산상수훈 26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https://youtu.be/0uO2znlnmUQ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마 6:9)

주님께서는 지금 세 가지 의로운 일에 관해 말씀하시는 중입니다. 바로 자선, 기도, 금식입니다. 자선에 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고 기도에 관해서도 일부 살펴보았습니다. 주기도에 관해서는 오늘부터 세 번 정도 살펴본 후에 금식에 관해서 살펴볼 예정입니다. 주기도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저는 주님께서 자선과 금식에 비해 기도를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가르쳐주셨다는 점을 환기하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자선과 금식에 관한 교훈은 비교적 간단하게, … 부정적인 면과 함께 긍정적인 면을 간단하게 언급하셨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하지 말고, 저렇게 하여라”라는 식으로 간결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에 관해서는 부정적인 면도 길게 언급하시고 긍정적인 면도 상대적으로 길게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라고 하시며 기도하는 법까지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선과 기도와 금식이 모두 중요하지만, 그중에서 기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활동 중에 기도가 가장 거룩한 활동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인간이 무릎을 꿇고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보다 더 거룩한 행동이 있겠습니까?

자선이나 금식도 경건한 활동입니다. 하지만 자선이나 금식으로는 기도만큼이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불쌍한 동료 이웃을 돕는 일이 인간으로서 가장 고결한 활동이기는 해도 기도해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활동이 왜 거룩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기도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또,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는 기독교가 말하는 기도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누구라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대면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소에 들어가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뵐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 거룩한 무리, 즉 성도의 특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육체를 찢으시고 우리가 성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히 10:19-20) 1년에 한 번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지극히 거룩한 그곳에서 우리는 무릎을 꿇고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향해 “아빠”라고 부르짖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도입니다. 

저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단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성소에 들어간 자녀의 부르짖음으로 해석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왜 우리의 기도가 그렇게 쉽지 않을까요? 기도가 잘되지 않는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쉽게 단정할 수가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라고 하시며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는 사실은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도 말해주지만, 또한 기도에 훈련이라는 차원이 있다는 것도 말해줍니다. 그냥 훈련이 아닌 경건의 훈련입니다. 

어떤 훈련이라도 훈련은 힘들고 어려운 법입니다. 기도가 훈련이라는 말의 의미는 기도가 단순히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행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자선과 금식은 이를 악물고 순종하면 어느정도는 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그런 종류의 경건과는 다릅니다. 이를 악물고 순종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훈련에는 육체의 훈련도 있고 경건의 훈련도 있습니다. 

기도 훈련의 육체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 노력하면 성과를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이에 관한 사도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후배 사역자가 된 디모데를 다음과 같이 권면하셨습니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 이 말은 참말이요,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입니다.” (딤전 4:8–9)

여기서 몸의 훈련(개역개정은 육체의 훈련)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행하는 훈련입니다. 예를 들어 자선할 생활비의 비율을 정해 놓고 실천한다든지, 일 주일에 하루는 금식을 한다든지,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금식한 식재료를 이웃을 위해 따로 모은다든지 하는 것이 육체의 훈련입니다. 

기도의 경우에 육체의 훈련은, 시간을 정해놓고 한다든지 한 달에 한 번은 철야 기도를 한다든지, 2025년에는 새벽 기도를 반드시 빠지지 않고 하겠다는 결심을 한다든지 하는 그런 영역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의로운 활동에는 육체의 훈련도 필요하고 경건의 훈련도 필요합니다. 육체의 훈련이 율법적이라는 이유로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서 진보가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도는 육체의 훈련도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반면에 기도는 한계가 없습니다. 기도에는 놀라운 유익이 있습니다. 개역한글의 번역 그대로 말하자면,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합니다.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습니다. 사실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기도를 통해서 옵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증언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기도의 유익과 축복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의 상급에 관해서는 주님께서 이미 지난번에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아무튼 기도에는 훈련이나 연습의 차원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실천하기가 그토록 힘이 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의지가 강한 사람은 의지가 약한 사람에 비해 실천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울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그리고 가르쳐주실 참된 기도를 생각해 보면 기도에는 더 알아가고, 더 훈련하고, 시행착오를 교정하고, 반복 숙달해야 하는 훈련의 차원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기도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도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저는 약간의 위안을 얻고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도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베단 여사가 목사님이 기도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목사가 모든 교인을 속일 수가 있어도 아내는 속일 수가 없다는 말은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베단 여사의 증언을 믿습니다. 

기도의 사람인 로이드 존스가 기도의 어려움을 후배 목사들에게 넌지시 비추신 적이 있습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서 자신만의 방법을 개발하여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읽던 성경이나 딱딱한 책이 아닌 영혼을 따뜻하게 데우는 믿음의 선배들의 부드러운 경건 서적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겁니다. 저는 이런 일화를 읽으면 자극도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안이 됩니다.

하지만 영적 거장들의 전기나 기도에 관한 글을 읽을 때는 전반적으로 위안이 되기보다는 정신이 번쩍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냉랭한 영국 교회의 강단을 뜨겁게 달구었던 찰스 시므온은 하루 네 시간을 뜨겁게 기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존 웨슬리는 종종 친구들에게 “나는 하루 네 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참으로 불쌍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라고 농담하며 친구들의 기도를 격려하곤 했습니다. 조셉 얼라인은 보통 새벽 4시에 일어나 8시까지 기도하였습니다. 때로 잠을 조금 더 자게 되어서 신문 배달부가 돌아다니는 소리를 듣고 깰 때면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내 주님께서 신문 배달부의 정성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시다니! 너무나 부끄럽다!”

이런 글들을 읽으면 저도 기도를 더 잘하고 싶고 배우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 심정일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주님의 제자들도 우리와 같은 심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눅 11:1) 우리가 기도의 갈증을 느낄 때 주님께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하는 것처럼 주님의 제자들도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기도를 배우고 싶은 열정이 솟아났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기도의 갈급함이 있습니까? 그래서 주님께 기도를 배우고 싶으십니까? 이제껏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새롭게 기도의 훈련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십니까? 그런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께 기도를 배울 그런 마음이 있다면, 이제 저와 여러분은 주기도를 배울 마음의 준비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음에 말씀드릴 것이 이 말씀의 의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주기도는 모든 기도의 완전한 본이라는 사실입니다.

주기도는 단지 외워야 할 예식으로서 기도의 본일 뿐만 아니라 한 구절, 한 구절 마음을 담아서 기도한다면 하나의 완전한 기도라는 의미에서도 기도의 본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기도가 위대한 모든 기도의 원리와 원칙을 주기도가 담고 있다는 면에서도 주기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완벽한 기도의 본입니다.

물론,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라는 말씀이 반드시 “이렇게만” 기도하라거나 “주기도문”만 반복하라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이 기도문을 외울 만큼의 짧은 시간만 기도하라”는 의미는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의 선배들뿐만 아니라 주님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주님께서 밤새도록 기도하셨다거나 새벽에 일찍 일어나 오랜 시간 기도하셨다는 기록을 읽습니다. 아까 살펴본 것처럼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짧은 기도문을 일러주시면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라고 하셨을까요?

주기도가 모든 기도의 본이라는 말은 말씀드린 대로 주기도가 기도의 모든 원리 원칙을 포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남긴 모든 위대한 기도들을 정리하여 핵심만 뽑아본다면 주기도가 남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17장에 나와 있는 우리 주님의 위대한 대제사장적 기도를 정리하여 핵심을 뽑아 보면 단지 주기도가 남습니다. 이것이 주기도가 모든 기도의 본이라는 이유입니다.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주기도를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주기도는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기도로서 기도의 중요한 원리 원칙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면에서 기도는 설교와 비슷합니다. 제가 설교 원고를 가지고 여러분께 설교하지만, 사실 저는 여러분에게 반드시 전해야 할 몇 가지 개요만 마음에 담고 자유롭게 설교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말을 하지만 사실은 서너 가지의 개요를 전달하려고 애쓰고 있고, 사실은 단 한 가지의 위대한 진리만을 전달하기에 애쓰고 있습니다.

제가 개요만을 말씀드린다면 10분이면 족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무엇입니까? 개요를 제외한 나머지는 진리에 대한 성경적인, 혹은 역사적인 사례이거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증언이거나 우리 삶과 관련된 몇 가지 정보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은 여러분께 잘 전달되게 하기 위해서 논리적으로 배열하고 가능하면 모든 것이 결론 부분에 명확하게 모이도록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건물로 치면 골격이 있고 골격에 붙어 있는 아름다운 건물을 이루는 다른 요소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말은 하지 않으셔도 마음으로는 불평할 것입니다. 단지 골격만 전달하면 빨리 밥을 먹을 수가 있겠는데 너무 쓸데없이 길게 설교하지 않느냐고요! 그 말씀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결국 말로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골격만 전달해서는 온전한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복음은 단 10분이면 요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때로 밤새도록 설교하셨습니다.

저라면 설교자가 저에게 뼈다귀만 던져주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가능하면 살코기가 가득 붙은 맛있는 부위를 잘 익혀서 소스를 잘 발라서 주기를 원할 것입니다. 주기도는 모든 기도의 하나의 골격이며 뼈대입니다. 이것이 매 주일, 그리고 매일매일 우리가 주기도를 암송하고,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여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는 주기도의 변주입니다. 이것이 주기도가 모든 기도의 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기도라는 기도의 뼈대, 혹은 골격 앞에 섰습니다. 여러분 눈에 무엇이 보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큰 기둥이 보입니다. 자세히 보면 그 기둥은 건물 제일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건물의 중앙에서 건물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둥을 빼버리면 건물이 지탱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기도드리는 분은 다름 아닌 아버지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문장 제일 처음에 나옵니다. 저는 헬라어 문법 때문이 아니라 의미상으로도 “아버지”라는 것이 주님의 핵심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는 모든 면에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 땅에 있고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초월한 차원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녀가 아니면 우리 마음은 절대로 하나님께 가 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가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에 기도가 하나님께 가서 닿을 수가 있습니다.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는 점도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의 개인적인 측면을 가르치실 때는 “내 아버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마음의 골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서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치실 때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주기도를 가르치시며 “우리 아버지”라고 하신 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는 개인 기도이든지 대표 기도이든지 모두가 공동체의 기도라고 표현한다면 과한 것이겠습니까? 개인의 기도 응답은 공동체의 축복이며 개인이 하나님의 교제로부터 단절되면 공동체의 상처라고 말씀드린다면 이것은 과한 것입니까? 제가 우리는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고 지체로 연결된 한 몸이라고 주장하며 모든 개인기도는 사실상 공동체기도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성경에 어긋난 주장입니까? 

저는 제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온전한 교회가 되어 간다는 말은 우리의 기도 가운데 “나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하늘씨앗교회 교인이라면 영적 개인주의는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런 식으로 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아버지”라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본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장 6절에서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시기를 빕니다.”(롬 15:6)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사도 바울은 이 구절에서 우리가 기도드리는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라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나누던 깊은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 토대 위에 굳게 서서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말처럼 “기도의 줄”이라는 것이 있다면 사랑의 확신이야말로 우리 기도의 줄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사람의 아버지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아버지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만드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을 전도할 때 그리스 시인의 말을 인용하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상기하며 복음을 전하였던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행 17:28/공동번역개정) 그런 면에서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또 시편과 선지서 등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을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 백성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여도, 오직 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 (사 63:16)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의 의미는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완전히 다르게 취급하셨습니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빕니다. 나는 세상을 위하여 비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하여 빕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요 17:9)

이 구별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구별입니다. 우리가 몇 주일에 걸쳐서 살펴본 것처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입양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녀”, “마귀의 자녀”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가정으로 입약되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나서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영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시금석이 이 점에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시금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는 그리스도인만 드릴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는 마음을 다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신감이 기본입니다. 확신이 시작입니다. 그리하여 기도하는 사람은 아직 상황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하더라도 소망 가운데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신앙이요 살아 있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원리, 이러한 질서를 우리는 시편에서 수 없이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가 절체 절명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성도는 기도합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자는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신뢰하고 응답을 받기도 전에 미리 마음의 평화를 경험합니다. 미리 기뻐하며 미리 감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 하나님을 모신 자녀의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것이 기도의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우리 아버지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진리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과 우리의 친밀성을 의미한다면, “하늘에 계시는”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의미합니다. 친밀성과 초월성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친밀하시지만, 동시에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의 강조점은 두 가지 모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둘 다를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는 땅에 있고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초월해 계십니다. 지혜와 능력에 있어서 초월해 계십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다는 면에서도 초월해 계십니다. 당연히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초월하심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엄,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전능하심, 전지하심, 초월하심을 의지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땅에 있는 존재임을 상기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는 피조물로서의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서 무릎을 꿇을 때마다 이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고통과 우리 한계를 인지합니다. 이것이 기도자의 올바른 마음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자녀로서 담대하게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계신 지성소에 가서 닿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을 열어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마 6:9b)

이제 우리는 말씀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 핏덩이 벌거숭이이며 하나님은 저주와 축복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도 있고 파괴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급히 나아가기 보다는 먼저 멈추어 서서 상기해야 합니다. 전도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을 꺼낼 때에, 함부로 입을 열지 말아라. 마음을 조급하게 가져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 위에 있으니, 말을 많이 하지 않도록 하여라.” (전 5:2)

이 모든 말씀들을 생각해 볼때에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급히 하나님 앞에서 뭔가 아뢰기 전에, … 잠시 멈추어서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급해도 하나님 앞에 달려나가서 이것저것 말을 쏟아내서는 안 됩니다.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급하면 인사를 생략하고 상대방이 누구인지도 잊은 채 뭔가를 요구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의 대화에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초월하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나의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아는 깊은 영성을 지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도의 첫 단계가 다름 아닌 깊은 생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뭔가 말하기 전에 우선은 입을 굳게 닫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았던 욥도 이런 것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비참한 상태로 밀어 넣으시자 욥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저럼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심하게 다루신다고 느낀 욥은 모든 생각과 감정을 말로 털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은 욥을 가만히 두셨음을 기억하십니까? 하지만 욥기의 말미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친히 욥을 다루시 시작하실 때,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드러내시고 말씀하실 때 욥은 어떻게 했습니까? 욥은 입을 닫았습니다.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깊이 인식하고 입을 닫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깊은 비밀입니다. 욥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입을 닫는 일이었습니다. 욥이 말합니다.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주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욥 40:4–6)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고 우리가 기도에 대상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심을 확신하고 기도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기도의 모든 것을 배운 것이라고도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기도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단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라고 진심으로 부르짖는다면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린다 하더라도 그 기도는 온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기도를 들으실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나의 영이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롬 8:26)

이것이 기도에 관한 영적 진실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닥다립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이 땅에서 축복을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참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날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짖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https://youtu.be/0uO2znlnmU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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