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씨앗교회

완전하여라-3(마 5:43-48) / 산상수훈 22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마 5:43–48)


우리는 동일한 본문을 세 번에 걸쳐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순서입니다. 오늘로써 산상수훈의 매우 중요한 본문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시니 당연히 하나님 자녀도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셨습니다.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자녀 된 우리가 세상 사람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범위가 더 넓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이웃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입니다. (눅 10:25-37)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일련의 말씀을 이렇게 마무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이제 산상수훈 앞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5장 20절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 5:20) 그리고는 여섯 가지 사례를 말씀해 주셨지요.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보복, 그리고 원수 사랑입니다. 그리고, …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마무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그러므로, 이 전체 단락의 제목을 “그리스도인의 더 나은 의”라고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부터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할 것을 하나님 백성에게 요구하셨습니다. (레 11:44-45; 19:2; 20:26)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왕이신 예수님이 하나님 자녀 된 모든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거룩, 완전, …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만 가지고 계시는 품성인 거룩과 완전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 자녀라면 이 말씀을 진지하고 엄중하게 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절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말씀들은 너무나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누가 이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의 역설”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넘어지게 합니다. 동시에 복음은 우리를 일어서게 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성령의 사람 시므온이 예수님에 관해 예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다고 시므온이 예언하였습니다. (눅 2:34)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십니다. 참된 복음은 반드시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회개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참된 복음은 동시에 우리를 무한한 희망으로 이끕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으로 나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철저하게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를 무한한 희망의 창공으로 높이 솟구치게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단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우리의 노력 외에 우리에게는 뭔가가 더 필요합니다.


일반 은총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이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하나님이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녀에게나 세상 사람에게는 똑같이 내려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일반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최근에 한 지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먹는 일이 그렇게 좋습니다. 세상에 먹는 기쁨보다 더한 기쁨이 없는 것 같아요!” 먹는 기쁨! 이런 것들이 일반 은총입니다.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세상 사람들에게 이러한 은혜가 없겠습니까? 이러한 은혜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시는 것이겠습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의 이방인에게 급박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짧은 설교 가운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모르던 때도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때에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시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시고, 먹을거리를 주셔서, 우리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행 14:17)


사도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부터 시작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어떤 의미에서는 복음의 기초, 혹은 복음의 일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은 일반 은총을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먹는 것, 배설하는 것, 일하는 것, 쉬는 것, 자는 것, 사람을 만나는 것, 문화를 누리는 것, 건강한 육체, 건강한 마음, … 이런 것들이 일반 은총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은총들을 세상 사람들에게도 허락하셨는데, 하나님 자녀 된 우리들은 더욱 감사함으로, 더욱 풍성히 누려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 자녀 된 우리들이 삶을 긍정하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르고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런 우리의 삶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신 말씀과 가장 동떨어진 삶이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소금과 빛이라는 은유는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의미하는 데, … 우리 그리스도인이 침울한 모습으로, 일반 은총에 대한 감사와 기쁨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가 과연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자녀 됨의 은혜 - 특별 은총


하나님 자녀 된 우리에게 일반 은총의 축복만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특별함은 사실상 일반 은총이 아닌 특별 은총에 있습니다. 일반 은총도 감사하지만, 특별 은총의 은혜는 더욱 큽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특별 은총에 더욱더 감사하며 더욱더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말씀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별함은 하나님의 특별 은총으로 말미암는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자녀의 특별하고 별난 삶은 일반 은총이 아니라 하나님 자녀만 받은 독점적인 특별한 축복에 기인합니다.


“…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엡 2:4–7)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현재이며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적 현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을 살아가지만 우리의 영적 현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사도의 이 놀라운 언명은 상상이나 판타지가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한 영감으로 주신 진리의 언명입니다. 


여기서, … 살리셨다, 하늘에 앉히셨다 등의 동사는 부정과거형입니다. 헬라어 부정과거는 과거의 확정된 사실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성령을 통하여 이렇게 기록하신 이유는 우리 미래에 주실 하나님의 은총은 이미 우리 과거에 주어진 확정적인 사실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미래에 속한 것이지만 과거에 확정된 저와 여러분의 분명한 영적 현주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 된 우리에게 주신 특별 은총이며, 영원히 우리가 새 노래로 찬송할 제목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이미 주신 이러한 축복을 아셔야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가 믿을 때 이미 과거에 확정적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영적 현실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영적 현실의 격차가 너무나 크기에, …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으로 우리에게 이루실 미래의 영광스러운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며 절망함과 동시에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모든 하나님 자녀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 은총을 누리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반 은총에 감사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만 주신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가 실제적으로 여러분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에 힘이 되고 있습니까? 자녀됨의 은혜가 여러분의 행동이나 말에, … 어떤 의지나, 하고자 하는 욕구나, 동기를 부여하고 있습니까?


또, 사도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골로새서 2장의 말씀입니다. 과거에 저와 여러분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과거는 이미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우리의 영적 과거입니다. 과거의 우리는 이미 죽었고 땅속에서 썩어 없어졌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우리가 아직도 죽은 것처럼,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무덤에 계신 것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습니다. 과거를 붙들고, 껴앉고, 사랑하고, 그 안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골 2:12) 


“우리는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골 2:12)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2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3장을 시작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러므로”가 중요합니다. 골로새서 2장의 말씀을 믿은 그리스도인 만이, 3장의 말씀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의 말씀이 이루어져야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완전을 추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럴 힘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 (골 3:1-4)


순종의 동력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서 하나님을 닮기 위해 애썼습니다. 하지만 단지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 그분들이 순종하는 동력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에게 진정한 순종의 동력은 항상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사랑을 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주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 (엡 5:1-2)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동네에서 창녀로 유명한 한 여인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던 바리새인을 당황케 한 일이 있었습니다. (눅 7:36-50) 당시에는 음식을 먹을 때 비스듬히 기대어 먹었다는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의 테이블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무튼, …) 


여인이 뒤에서 가만히 다가가 발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울었습니다. 사람들이 눈치를 주었지만 여인은 울기를 멈출수가 없습니다. 이윽고, 눈물이 예수님의 발에 떨어졌습니다. 만찬 중에 난처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인이 갑자기 긴 머리를 풀어 헤쳐서 예수님의 발에 떨어진 눈물을 닦았습니다. (당시에 공개적 장소에서 여자가 머리를 풀어 헤치는 것은 금기였습니다.) 


만찬이 더는 진전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인은 울면서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했던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왜 이 여자가 창녀인 줄을 모를까? 왜 죄인이 예수님을 부정하게 만들고 있는데도 예수님은 그대로 가만히 계실까?” 


모든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쳐다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계속 쳐다보시며 시몬을 향해 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들어보아라. 어떤 사채업자에게 빚진 사람이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다른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빚진 두 사람 다 갚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사채업자는 두 사람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다. 두 사람 중에 누가 사채업자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느냐?”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판단이 옳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돌리시고 시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는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나를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용서받는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여인의 주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종교 사회적인 관례에 맞지 않고 심지어 윤리와 도덕에 맞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 외에 누가 여인의 사랑이 주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임을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보시기에 여인은 하나님의 큰 용서를 받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고 있었습니다. 여인의 행동은 생명의 은인에게 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여인을 바라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여인이 이후에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다시 동네에서 성매매하는 생활로 돌아갔겠습니까? 저는 지금 이름없는 이 여인이 저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은 보이지 않으십니까?


결론


이제 말씀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완전하다는 것은 “무엇에 마음을 다 바치는 것” 혹은 “분열되지 않은 마음으로 무엇을 하는 것” 혹은 “어떤 일을 완전하게 처리하는 것”을 뜻합니다. (“독일성서공회해설성경”, 신약 17페이지) 이렇게 보면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완전함은 하나님과 똑같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앞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계명들, 곧 여섯 사례를 드시며 말씀하신 명령들을 완전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아시다시피 신약성경은 히브리 사상으로 쓰인 것이기도 하고, … 예수님께서 아람어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아람어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들은 모두 아람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헬라어 완전에 해당하는 아람어 단어의 뜻은 “완벽”이라는 뜻도 있고 “전체”라는 뜻도 있습니다. (“IVP성경배경주석”, 1274페이지) “전체”라고 해석해 보면 보면 예수님께서는우리가 5장 21절부터 말씀해 오신 여섯 가지 계명에 관한 말씀들을 충족할 것을 요구하신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그 완전함입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1/개역개정)


개역개정의 이 구절은 새번역성경은 히브리어의 의미를 풀어서 이처럼 잘 번역하였습니다.


“아브람의 나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 (창 17:1)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온전히 순종하는 삶입니다. 야고보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분열되지 않은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마음을 품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말씀에 신실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하나님 자녀 된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 두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마음의 우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제물의 예배가 아니라 순종의 예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요, 자녀 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이 자녀 된 우리에게 마땅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녀된 자의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된 자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사랑을 입은 구름 떼와 같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완전하여졌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빌 3:12)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말씀을 제쳐놓고서 완전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 (히 6:1)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골 1:28/개역개정)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특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라면 우리는 특별해야 합니다. 특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사람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점점 더 부패하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 자녀는 점점 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벧후 1:4) 


태어난 아기가 부모를 많이 닮지 않는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실제 부모라도요! 그래도 왠만하면 부모 중 하나의 불륜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보고는 “아빠를 닮았네!” “엄마를 닮았네!”라고 하며 신기해하며 기뻐합니다.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닮은 구석이 있습니까? 이것이 시금석입니다. 판박이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육신의 성장과 영적 성장의 다른 점은 육신의 성장은 한계가 있지만 영적 성장은 한계가 없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조금만 닮았을 수도 있습니다. 발가락만 닮았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아주 특별한 증거가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산상수훈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자녀된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것에 관해 계속 말씀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의 원리 원칙을 계속 설명해 오셨습니다.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힘입읍시다. 주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힘써 앞으로 나아갑시다. 어디를 향해 가야 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완전을 향해 나아갑시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반드시 이루실 우리 구원의 완성을 바라봅시다. 


이 일은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으로만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의 끝은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는 길의 끝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 자녀로서 드러날 것입니다. 증명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이 영광과 덕으로 귀중하고 아주 위대한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십시오. … 형제자매 여러분, 더욱 더 힘써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하심을 받은 것을 굳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벧후 1:4–10)


주님의 말씀으로 절망하고, 동시에 말씀으로 다시 일어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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