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할 때 (마 6:16-18) / 산상수훈 29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띠지 말아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낯을 씻어라. 그리하여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고 보이지 않게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서 보시게 하여라.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 6:16–18)
주님께서는 오늘까지 우리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의로운 행위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자선입니다. 그다음이 기도입니다. 기도에 관해서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하시며 더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다음에 오늘 말씀 주제인 금식입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의로운 일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자선, 기도, 금식”을 사례로 드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왜 이 세 가지를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을까요? 이 세 가지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굳이 세 가지를 사례로 드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초대교회 시대를 살았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주님의 교훈에 따라 이 세 가지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자선이 무엇입니까? 자선이라는 행위는 우리와 다른 사람의 관계를 규정하며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와 마음을 반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위하여, 이웃을 돕고자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다음에,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우리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관계와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마음을 규정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기도로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금식은 무엇입니까? 금식은 나에 대한 태도와 마음을 규정합니다. 자선은 타인과의 접촉점이며, 기도는 하나님과의 접촉점입니다. 그리고, 금식은 나와의, 내 안에 있는 영과의 접촉점입니다. 이런 것들을 일반화하여 교리로 만들어서는 안 되겠지만 자선과 기도와 금식에 관한 몇몇 선배들의 이러한 통찰들은 저에게 매우 의미심장하게 여겨집니다.
현대 교회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이나 초대교회에 비해 금식이 신앙생활에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고 생각합니다. 금식을 생각하면 우리 안에 나름의 생각들은 있지만 잘 정리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도 주님께서 금식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시는 내용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하신 기도의 경우에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하시며 비교적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금식이 무엇인지, 어떻게 금식해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지는 않으시고 금식하는 자의 동기나 마음의 태도에 관해서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내용이 앞서 자선이나 기도에서 말씀하신 것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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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우리 주님께서는 자선과 기도와 금식, 즉 “의로운 일”의 대원칙을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마 6:1)
이것이 대원칙입니다. 이 원칙을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의로운 일에 적용이 됩니다. 자선에 관해서, 기도에 관해서도 똑같은 원칙을 적용하셨고, 오늘 본문 말씀인 금식에도 마찬가지 원칙을 적용하셨습니다. 어떻게 적용하셨습니까? “그리하여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고 보이지 않게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서 보시게 하여라.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 6:18)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의로운 일의 대원칙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동기는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의로운 일은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의로운 일의 대원칙입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제정하신 이 대원칙은 자선이나 기도나 금식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의로운 일, 혹은 개인 경건 생활에 적용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모든 일들을 사람에게 보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주님이 보시기에는 위선입니다.
먼저, … 저와 여러분이 금식에 정통하거나 금식에 관해 잘 알고 있지 않기에 성경에 나오는 금식을 간단하게라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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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금식에 관해서 일년에 단 한 번 금식하라고 명시적으로 명하셨습니다. 레위기 율법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은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레 23:27)에 전국적으로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약성경과 당시의 유대 문헌을 살펴보면 옛 성도들은 일 년에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유로 금식을 하였습니다. 죄를 회개할 때, 혹은 중요한 기도를 드리기 전에 준비하는 과정으로, 혹은 개인이나 국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 혹은 시편이나 지혜서를 보면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중보하기 위하여, … 등등 다양한 이유로 옛 성도들은 금식을 하였습니다.
물론 잘못된 금식도 많았습니다. 이사야서 58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금식, 곧 하나님의 의를 행하지 않으면서 단지 용서를 받기 위한 금식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36장을 보면 여호야김 왕은 금식을 하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적인 두루마기를 찢고 불순종해 버리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이 없는 종교적인 행위는 그때나 지금이나 싫어하십니다.
신약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였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어떤 종교인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넘어서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시의 문헌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이나 금식하면서 물도 마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매우 건강에 해로운 일을 하면서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자기가 의롭게 되는 하나님께 드리는 공로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금식에 관해 가르치시면서 당시의 이런 잘못된 종교적인 관행을 염두에 두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금식을 하셨을까요? 마태복음 4장 2절을 보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예수님은 분명히 금식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금식하라고 명하시거나 금식에 관해 직접적으로 가르치신 적은 없습니다. 다만 여러차례 간접적으로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 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마 9:14)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이 자기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이니, 그때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마 9:15)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절기로서의 금식이나 규칙적인 금식은 주께서 명하신 바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금식을 옹호하십니다. 그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도 분명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금식하는 것을 승인하셨다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너는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낯을 씻어라.”(마 6:17)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금식하는 것을 드러내지 말고 자연스럽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시의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피부의 건조를 막고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평소에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낯을 씻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머리에 기름을 바르지 않고 낯을 씻지 않고, 본문에 나오는 대로 슬픈 기색을 한다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튑니다. 다른 사람이 당장에 “금식하고 있구나”라고 알게 될 것입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낯을 씻으라는 것은 평소대로 자연스럽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이 튀어보이면 여러 문제가 생깁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들은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금식하는 것은 옳은 일이며 의로운 일이라고 여기셨음을 기억합시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였음을 기억합시다. 다만 예수님은 바르게 하는 금식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금식하지 않는데 주님의 이 교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다. 주님과 사도들의 모범과 교훈에 따라서 초대교회 성도들도 예수님의 교훈에 따라 금식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 금식을 엄중하게 명령한 바는 없지만 분명히 금식은 역사를 보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삶의 일부였습니다.
우리들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졌던 영성의 맥이 끊어져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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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했던 금식을 살펴보면 기도와 깊이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구약성경도 그런 면이 많지만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금식은 기도와 더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금식할 때 성령이 성도들에게 명령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하며 금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위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에게 맡기려 하는 일이 있다.’” (행 13:2)
또한 14장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세워진 교회들을 위해 장로들을 임명한 후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써 장로들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임명한 뒤에, 금식을 하면서 기도하고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맡겼다.” (행 14:23)
이러한 말씀들에서 우리는 기도와 금식이 깊이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복음서를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 오신 후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 주셨지요. (막 9:14-29; 마 17:14-21) 제자들은 실패하였지만 예수님은 단번에 귀신을 내 쫓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초기 사본에는 단지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후의 사본들에는 “기도와 금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진 성경을 보면 여기에 각주 처리되어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초대교회 우리 믿음의 선배들에게 기도와 금식이 얼마나 깊게 관련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귀신 들린 아버지의 믿음 없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마태복음의 기록에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라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최근의 사본에서는 “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을 하지 않고는 나가지 않는다”라는 말씀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의 교훈에 의하면 금식과 기도는 깊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금식과 믿음은 모순된 것이 아닙니다. 금식과 기도에 매달리는 것은 믿음이 없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금식에 관한 이런 교훈들을 어떻게 적용할 수가 있을까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어떤 때는 단지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할 때입니다. 때로 어떤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잠히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를 기다려야 할 때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단지 기다리는 것이 믿음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단지 믿고 기다리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어떤 때입니까? 귀신들린 아버지가 처한 상황처럼, 악과 대면할 때, 악한 자와 싸울 때,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가 없는 악한 세력의 공격을 당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 교회나 국가를 위해서 기도할 때가 되겠지요. 그런 경우에는 단지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금식하며 기도하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금식과 기도와 우리 믿음이 깊이 결부가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는 금식에 관한 많은 교훈이 있고 우리는 그 일부를 살펴보았습니다. 역사를 살펴보아도 금식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주님의 교훈에 따라 금식에 관해 깊이 생각하고 탐구하고 실천을 해왔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몇 가지 가르침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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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우리는 육체적인 금식과 영적인 금식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금식과 영적인 금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적인 존재이며 또한 영적인 존재입니다. 금식은 육체와 영의 밀접한 관계를 기반으로 한 활동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육체적인 목적이 아니라 영적인 목적을 위해 금식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때로는 육체적인 금식이 필요할 수가 있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금식은 영적인 금식입니다. 금식이 영적인 행위라고 생각해 보면 금식에 관한 오해와 잘못된 금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육체적인 금식은 어떤 금식입니까? 특정 절기가 되면, 혹은 어떤 특정한 시간을 두고 반복적으로 하는 금식은 일종의 육체적인 금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육체와 영을 구분 짓는 이러한 분별은 참으로 미묘한 면이 있어서 주의해야 합니다. 좀 구체적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금식의 유익함을 알고 있습니다. 이전의 경험을 통해서 금식하면 정신이 명료해지고 기도에 더 집중할 수가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금식을 자기의 종교적 규율로 삼고 다른 사람에게 권유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이 사역자라면 회중에게 정기적으로 금식을 선포하고 공동체가 금식하도록 압박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금식은 유익한 종교적인 규례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금식이 아닌 육체적인 금식입니다. 사도 바울이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딤전 4:8)라고 하셨는데 저는 이러한 금식이 유익이 없다고는 말을 못 하겠습니다. 그 동기가 올바르다면 약간의 유익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추구했던 금식과는 다른 육체의 금식이라는 것이지요.
몸에 에너지원이 되는 음식의 공급을 끊으면 놀라운 유익이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 과학이 최근에 밝혀낸 과학적 사실입니다. 한 가지 예만 들자면 면역력의 극적인 증가와 집중력의 향상입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금식 중에 기도에 더 집중할 수가 있고 금식 후에도 유익이 있다고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에서도 금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영적인 금식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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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여러분 안에는 바리새인이 있습니다. 규칙을 좋아하고 규칙 안에서 편안해하며 규칙이 사라지면 불안해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규칙은 육체에 속한 것들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율법 아래 있기를 좋아합니다. 사도 바울이 지적하신 것처럼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갈 3:3)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느덧 금식이나 기도와 같은 하나님과 관련이 있는 지극히 숭고한 행위도 내 공로가 되고, 내 만족이 되고, 내가 하나님께, 그리고 동료 인간들에게 내세우고 싶은 나의 자랑거리가 됩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성향입니다. 규칙을 잘 지키는 것으로 안심하고, 규칙을 잘 지키지 않는 것으로 죄책감을 가집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규칙을 좋아하고 스스로에게 종교적 율법을 부여하는 것은 비단 금식에만 국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에 관해서도 우리가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성경 공부든지 기도든지 자선이든지 금식이든지 봉사이든지 어떤 종교적인 활동도 단지 육체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영적인 것이 될 수가 있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육체의 훈련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 육체를 잘 다스리고 제어해야 마땅합니다. 음식을 절제해야 하고, 건강을 위해 적절하게 움직여 주어야 하고, 깨끗하게 씻고, 필요할 때 쉬고, 과도한 쾌락을 삼가야 하고, 좋은 것이든지 나쁜 것이든지 관계없이 중독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주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 중에 “절제”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갈 5:22-23) 하지만 이것은 육체의 훈련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사도들의 교훈에 따라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금식은 훈련의 영역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니 금식은 영적인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극히 높이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자기를 위한 혹은 지체를 위한 혹은 국가를 위한 강렬한 중보기도를 드리고 내 영이 더 높은 곳에 도달하여 더 높은 영적 차원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려는 행위가 금식입니다. 그러한 열망의 결과가 금식입니다. 그러므로 금식은 기본적으로 성령께서 시키실 때 해야 하는 성질의 활동이지 나의 종교적 욕심으로 해야 하는 활동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금식은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려고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금식은 가장 개인적인 경건 행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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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금식과 관련된 가장 끔찍한 오해는 금식을 마치 하나님과 거래하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입니다. 내가 10일 이상 내 생명을 아끼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했으니,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셔야 한다는 식의 관점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금식을 통해서 육체가 회복되고 영이 충만해지는 경험을 하였다고 합시다. 이런 사람은 만나는 사람마다 금식 이야기를 하며 자기를 자랑하며 금식을 권유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금식이 만병통치약입니다. “금식 기도해 봐! 그러면 모든 일이 해결될 거야!”라는 것이 이런 사람의 모토입니다.
“축복의 통로”라는 표현은 지극히 성경적입니다. 그리고 금식은 분명히 “축복의 통로”가 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기계적인 의미로 사용할 때는 지극히 위험한 교리가 될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면 성령을 받을 수가 있을 것이다.” “금식 기도하면 축복을 받을 것이다.” “기도하면 부흥이 올 것이다.” “선교하면 주님의 재림을 앞당길 수가 있다.” 이런 것들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오해들입니다. 이러한 오해의 예들은 오직 우리 아버지께만 드려져야 할 많은 선한 행동들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부흥의 역사를 읽어보면 금식 기도와 부흥은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을 오해한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우리가 모여서 금식 기도를 하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부흥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유와 인권과 차별의 영역에서는 하나님 뜻에 전혀 순종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 이러한 주장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악마적입니다. 순종이 뭔지도 모르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모든 견해는 악마적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는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부흥이 임한 곳에는 항상 성도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역은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기도가 있다고 반드시 하나님이 부흥을 내려 주셔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모든 것에 초월하신 분이시며 당신의 생각은 우리 모두의 생각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행한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자유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자들은 모두가 이것을 알고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행한 모든 것과 상급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일꾼들의 비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조금 일한 일꾼이나 적게 일한 일꾼이나 같은 품삯을 주었습니다. 많이 일한 일꾼들은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내가 많이 일했으니 많이 받아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이런 일꾼들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을 기대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금식이든지 자선이든지 기도이든지, 그 어떤 선한 행위도 하나님과 거래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우리의 마땅한 도리를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녀이며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올 때에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고 그에게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오히려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너는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야,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그 종이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눅 17:7–10)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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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말씀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금식은 오직 하나님께만 하는 금식입니다.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하는 금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작은 교회이며 저는 지난 일 년간 우리 교회 지체가 금식하며 기도한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금식에 관한 설교를 하고 이제 마무리를 하려고 하니 두렵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맙시다. 오직 하나님만 신경을 씁시다. 금식이 나에게 유익이 있거나 나를 의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시키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금식합시다. 이것이 주님의 교훈입니다.
주님은 때로 금식과 기도에 매진하라고 강하게 권하실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때로 여러분 각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금식과 기도로 나에게 간구하여라. 너의 육신을 죽이고 오직 영으로 나에게 매달려라. 더 높고 더 깊고 더욱 신령한 기도를 나에게 바쳐라. 나의 뜻과 나의 나라와 나의 영광을 위해서… 너의 모든 것을 내게 바쳐라.” 이렇게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순종합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그리고 광야길을 넘어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이 길은 얼마나 험난합니까?
마귀의 무서운 공격과 시험과 유혹을 당하면서도 우리는 기도하지도 않고 금식하지도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실 때 단지 금식만 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유혹과 시험을 받는 상황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이를 악물고 참고 인내하는 것이 그것이 믿음이겠습니까? 내게 기도할 힘이 없다면 형제자매에게 나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자존심의 문제이겠습니까? 예수님 시대에는 종교인들의 잘못된 과도한 금식과 기도가 문제가 되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너무 금식을 경시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어떤 일을 하다가 밥먹는 것을 잊고 열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일에 그토록 열중하기가 힘들다면 뭔가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금식을 하는 제자들에게 경고하시며 또한, 동시에 너무나 금식을 경시하는 우리에게도 경고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이 있다면 교회에도 숨기고 함께 사는 가족에게도 숨기고 오직 주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며 매달리는 것이 정상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모습이 과도하게 종교에 열중하는 광신자의 모습이겠습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건전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올바른 자선과 올바른 기도와 올바른 금식을 아무리 많이 배운다 하더라도, 정작 우리가 자선도 행하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금식도 하지 않는다면 많이 배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기도도 기도로만 배울 수가 있습니다. 금식도 금식으로만 배울 수가 있습니다.
때로 밥때를 놓치더라도 기도를 놓치지 않는, 성령 충만한 하나님 자녀의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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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거룩하게 하소서 (마 6:9b-10) / 산상수훈 27 (0) | 2024.12.09 |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소서 (마 6:9b-10) / 산상수훈 27 (0) | 2024.1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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