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맘몬 (마 6:19-24) / 산상수훈 31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다가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간다.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지도 못한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맘몬)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마 6:19–24)
지난 주일에 저는 이 말씀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드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늘의 보물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늘의 보물에 관해서 관심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 나라를 믿으며 영생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이 땅은 눈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 하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옛 이스라엘이 반복해서 타락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옛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우상에게는 쉽게 끌리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옛 이스라엘은 반복해서 너무나도 쉽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리도 이 땅을 살기에 옛 이스라엘이 처한 위험과 똑같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땅의 보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위험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명하셔야만 했습니다. “보물을 땅에다가 쌓아 두지 말아라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이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말씀으로 우리를 설득하시고 권유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지 얼마나 상식적인지, 그리고 우리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옳고 타당한지, … 우리가 이해할 수가 있도록 충분히 설명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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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늘에 보물을 쌓아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모든 보물을 “좀과 녹”에 비유하셨습니다.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 하늘에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지도 못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이 땅에 보물을 쌓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젊은 시절에는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젊은이의 꿈이 큰 꿈이든지 단지 행복하게 살고 싶은 소박한 꿈이든지, … 바라고 기도하고 추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젊은 시절의 보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주님의 비유가 얼마나 적절합니까? 젊은이의 생명력 있는 육체에 담고 있던 꿈과 희망도 언젠가는 “좀”이 먹고 “녹”이 습니다. 때로는 “도둑이” 훔쳐 갑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모든 인류가 진정한 사랑, 영원한 사랑을 갈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G.K. 체스터턴은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였습니다. “창녀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사실은 하나님을 찾고 있다” (G.K. 체스터턴)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말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랑을 갈구하지만 이 땅에 진정한 사랑은 없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반사체이거나 편린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은 좀이 먹거나 녹이 슬거나 도둑이 훔쳐 갑니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보물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우리 모든 인간에게 충만한 만족과 기쁨과 쾌락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이 땅의 사랑이 주는 만족과 기쁨과 쾌락은 좀이 먹고 녹이 슬고, 때로는 박탈을 당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늘은 어떻습니까? 하늘의 사랑과 쾌락과 기쁨은 어떻습니까? 절대로 좀이 먹거나 녹이 슬거나 빼앗기지 않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롬 8:38–39)
“… 하나님께서는 …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셨으며,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물려받게 하셨습니다. 이 유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벧전 1:3–4)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4:18)
그러므로 영원한 것을 믿는 우리에게 오늘 주님의 말씀은 얼마나 상식적입니까! 영원한 것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진심으로 오늘 주님의 말씀에 응답할 수가 있습니다.
“옳습니다. 주님! 우리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 상식적입니다. 저희는 옛 이스라엘처럼 자주자주 이 땅을 추구하고 이 땅의 보물을 추구하고 이 땅의 것들이 영원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영원토록 저 하늘의 영원한 것들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이런 축복이 2025년 내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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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 주님의 말씀은 상식을 기반으로 하되 항상 상식을 넘어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 보물을 쌓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 보물을 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여러분, 영적인 위험입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영적인 위험입니다.
마음은 심장이라는 단어와 같은 헬라어로써 우리 인격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지성, 우리의 감정, 우리의 의지 전부를 의미하는 단어가 바로 마음입니다. 즉, 저와 여러분은 우리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은 오직 영원한 하늘에 두어야 합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라는 주님 말씀은 일종의 경고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보물의 힘은 우리 마음을 하늘로부터 끌어 내려서 지옥 끝에 두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반복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풍요의 신이 얼마나 강력하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있는 것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보물이 위험한 것입니다.
배우자가 자기 마음의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빼앗긴다면 이미 간음이라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마 5:27-28)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이 보물에 가 있다면 이미 하나님께 간음한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이 땅의 보물은 얼마나 힘이 셉니까!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이 땅의 보물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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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서 주님께서는 맘몬의 교활한 부분을 지적하셨습니다. 맘몬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까지도 사로잡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이 말씀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이 말씀에서 “눈”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땅의 보물은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 땅의 보물에 사로잡힌 인간의 마음은 세상을 보는 방식에서도 이 땅의 보물의 통제를 받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의 교훈에 따르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은 단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는 “성한 눈”이고 다른 하나는 “성하지 않은 눈”입니다. 개역개정에서 성한 눈이라고 번역한 부분을 보면 “네 눈이 성하면”이라는 부분에 “네 눈이 순전하면”이라는 각주가 붙어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눈은 건강한 눈이거나 건강하지 못한 눈이 있습니다. 성한 눈은 세상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봅니다. 건강하지 못한 눈은 순전하지 못한 눈입니다. 순전하지 못한 눈은 사물을 이중적으로, 흐릿하게 봅니다. 이것이 비유의 의미입니다.
개역개정은 성하지 않은 눈을 “나쁜 눈”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왜 사물을 흐릿하게 이중으로 봅니까? 죄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편견이 가득하면 모든 것을 왜곡해서 봅니다. 때로는 자기 욕심으로 똑바로 보지 못하고 흐릿하게 봅니다. 우리가 가진 각종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물을 왜곡된 관점으로 받아 들입니다. 그래서 성하지 않는 눈은 사악한 눈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성한 눈은 영적인 눈이며, 성하지 않는 눈은 육적인 눈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눈은 어떻습니까?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의 보물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서 시야가 흐려져 있습니다. 영적으로 혼탁해 진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세상의 소리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악을 보는 관점이 잘못되면 결국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법에 대한 관점도 잘못된 관점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기도 많이 한다고 영이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열심이 성령을 받은 증거가 아닙니다. 성령을 받은 증거는 똑바로 보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순전하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똑바로 볼 수 있는 이유는 성령께서는 우리 안의 죄의 영향력을 억제하시고 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신앙이 성숙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장성한 사람은 경험을 통해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히 5:14/새번역)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성령을 “지혜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받은 사람은 참된 지혜로 세상을 바라본다라고 확실히 말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지혜를 말씀하십니까? 가장 중요한 지혜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때까지 어느 정치인에게 어느 정당에 투표해 오셨습니까? 완전한 정당도 있을 수가 없고 온전한 정치인도 있을 수가 없기에 우리는 우리가 가진 나름의 가치 판단으로 투표하게 됩니다. 어떤 부분은 가중치를 두고 어떤 부분은 소홀히 취급한 결과가 나의 투표용지에 반영이 됩니다. 이때도 우리의 보물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의 판단 기준은 달라집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관점에 달려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관점은 사실상 세상 사람보다 더 악합니다. 더 위선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문을 따고 들어와서 보석을 훔치면 도둑질이라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소득세 신고서를 약간 변경하면 자신의 그런 행위는 지혜로운 절세라고 스스로 감쌉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일들을 서슴없이, 혹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스스로 설득해 가면서 쉽게 저지르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이 땅의 보물 때문입니다.
이정도 단계가 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아니라 이 땅의 보물의 지배와 통제를 받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단계를 넘어서서 자기의 보물의 손실을 두려워하는 단계라고 감히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핑계를 대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압니다. 그래서 비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을 위선자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눈이 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보물에 마음이 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과 관점의 인도를 받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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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관점이 법이나 윤리, 도덕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관점의 무서운 점은 우리의 종교적인 관점에도 깊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말년에 “데마가 나를 버리고 갔다”라고 썼습니다. 데마가 왜 바울을 버리고 갔습니까? 사도 바울은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였다”라고 데마의 관점을 평가하였습니다. (딤후 4:10) 하지만 데마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하였다고 스스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수많은 결정과 선택을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하겠다고 20대에 결심한 후에 오랜 기간을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60대 중반에 접어든 이 시점에 서서 돌이켜보면, 주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결정을 많이 하였는지 모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굳이 사역자가 아니더라도 나중에 돌이켜보면 어리석고 후회스러운 결정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직업이나 사업이나 결혼이나, … 우리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땅의 보물을 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 주변과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고 왜곡해서 보게 만드는 것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악한 동기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기에 마땅히 소유할 수가 있고, 소유해야 하고, 때로는 추구해야만 할 선한 보물들도 위험할 수가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인간관계의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 세상에서의 직업과 책임 있는 지위, 심지어는 소명까지 … 이 모든 것들은 마약이나 술이나 성욕만큼이나 위험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땅의 보물을 위하여 선교사가 되는 것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오늘 다루고 계시는 주제가 얼마나 교묘하고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 많은 사람이 이 땅의 보물을 위하여 선교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땅의 보물을 위해 직장을 그만둡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땅의 보물을 위해서 직장에 붙어 있습니다. 얼마나 교묘합니까? 맘몬이 얼마나 교활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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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주님의 말씀의 마지막 단계가 남아 있습니다. 가장 엄숙하고 심각한 단계입니다. 우리의 마음, 그리고 우리의 정신이 지향하는 관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주님의 결론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장 엄숙한 결론이며 성경에서 가장 자주 다루어지는 주제입니다. 우리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끝까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 백성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요구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요구의 본질과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요구의 본질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 하나님의 요구도, 세상의 요구도, … 둘 다 모두 전체주의적인 요구이며 독재적인 요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인격 전체를 요구하시며 전적인 헌신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이제껏 주님의 말씀에서 들었듯이 이 세상도 실제로 우리에게 전체주의적인, 독재적인 요구를 합니다. 세상의 보물은 우리의 인격 전체를 장악하고 우리의 전 존재가 세상의 요구에 굴복하기를 원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세상을 사랑하기를 요구합니다. 동시에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가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개역개정)라고 요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차례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37–39)
우리 그리스도인, 즉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신 우리 주님의 교훈은 명백합니다. “(우리 마음은)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즉 “양자택일”입니다. 타협은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중도는 아얘 없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맘몬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개역개정)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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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말씀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아니면 재물을 사랑하느냐? 너희는 양다리를 걸칠 수가 없다. 언제까지 머뭇거리고 있을 것이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선지자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도 같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 (왕상 18:21)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오늘 주님 말씀의 본질을 열왕기하 17장의 한 사건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직후의 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마리아인을 멸시하게 된 사건이 바로 이 사건입니다. 앗수르 왕은 사마리아 지역에 앗수르 사람들을 데려와서 정착시켰습니다. 물론 앗수르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사람 몇몇이 사자에게 물려 죽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고대 앗수르인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는 신이 노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신을 숭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앗수르 왕이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사로잡았던 이스라엘 제사장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는 신을 섬기는 법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주님도 경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잡혀 오기 전에 살던 그 지역의 관습을 따라 그들 자신이 섬기던 신도 섬겼다.” (왕하 17:33)
주님을 경외하면서 자신들의 신도 섬겼습니다. 이것이 사마리아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며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생각보다 더 끔찍한 생각이 있을까요? 사마리아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풍요의 신도 섬길 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보다 더 하나님께 모욕적일 수가 있을까요?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이 “주님, 주님, 주님을 위해서 이런 저런 일을 하였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이런 저런 일을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릴 것이 주님을 위해 이런 저런 일을 한 것 뿐이다면 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눅 16:19-31) 부자는 평생 자기를 정당화했을 것입니다. 매일 매일 자기의 삶을 긍정하며 “이만하면 괜찮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야 부자는 자기 현실을 똑바로 보았습니다. 자기가 평생 바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부자는 평생 자기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았고 부자의 마음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었습니다.
부자는 평생 자기의 든든한 반석이었다고 생각했던 재물이 흔적도 없이 스러져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부자는 평생 자기 안에 있던 빛이 지옥과도 같은 큰 어둠이었다는 사실을 지옥에 와서야 발견했습니다. 이제는 소용이 없습니다. 지옥에서 부자는 멀었던 눈이 뜨였지만, 이제는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도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야고보 선생님의 말씀처럼 두 마음을 품은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약 1:8)
저와 여러분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궁극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계십니까? 여러분에게 우상은 없습니까? 맘문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합니다. 우리가 주여주여 한다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우리 주님의 전체주의적인 요구를 기꺼히 수용하셔야 합니다. 오직 하늘 아버지의 뜻에만 순복하겠다고 결단하셔야 합니다. 영원한 저 하늘에만 소망을 두겠다고 결심하셔야 합니다.
이러한 결단의 축복이 2025년 내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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